제579화
“마, 말도 안 돼!”
울텔이 소리를 빼액 질렀다.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일제히 울텔을 쳐다봤다.
지크 일행은 물론, 그들과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던 부하들의 시선도 마찬가지.
하지만 울텔은 남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곳이, 아무런 방어 수단도 갖추지 못한 채 적들에게 노출된 것이다.
‘대, 대체 어떻게! 어떻게 문을 연 거지!’
설마 황제의 반지 같은 물건이 하나 더 있던 것일까.
하지만 울텔은 그 가능성을 무척이나 낮게 봤다.
‘그런 중요한 물건이 세 개씩 있을 리가 없어!’
다른 하나 정도는 혹시나 하는 상황의 예비로써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숫자는 오히려 다른 곳으로 빼돌려질 위험도만 증가한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
‘…그걸 타인에게 줬다고? 황제의 반지와 비슷한 물건을?’
울텔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자그마치 브뤼셀 시스템을 제어할 수 있는 열쇠다. 그 귀한 걸 어떻게 타인에게 넘긴단 말인가.
울텔의 측근들은 능력과 충성심이 뛰어난 이들로 채워져 있다. 수많은 회귀들로 얻은 정보들을 토대로 선별한 인재들이니 당연한 일.
하지만 아무리 믿을 수 있는 측근이라도 울텔은 황제의 반지를 맡길 생각이 없었다.
남은 남인 것이다.
한데 아무래도 지크는 그걸 타인에게 맡긴 것 같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중요한 걸 맨정신으로 타인에게 맡길 리가…!”
“그거야 네 생각이고.”
울텔의 중얼거림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지크에게 그 목소리를 포착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 적은 지크에게 있어 무척이나 맛있는 먹잇감이다.
“반응을 보니 내 동료들이 그 섬에 도착한 것 같군. 왜, 내가 그 녀석들에게 무척 중요한 걸 맡긴 것 같아 당황했나?”
“이 자식, 설마 진짜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지크의 말을 들어보면 그 믿기지 않는 일을 그가 행했음은 분명한 사실 같았다.
“이, 이 미친놈! 제정신으로 그딴 짓을 했단 거냐!”
“이게 바로 그릇의 차이 아니겠냐? 담이 바퀴벌레 더듬이보다 작은 너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
지크가 이죽댔다.
하지만 울텔은 성질조차 나지 않았다. 저건 그저 지크가 돌아버린 것일 뿐이다.
의문이 풀렸지만 울텔의 속이 시원해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바로 다른 의문이 샘솟았다.
지크가 탑에서 전성기의 힘을 펑펑 써대는 것에 울텔은 의문을 품지 않았다.
황제의 반지는 세계수의 마력이 미치는 곳에서 소유자의 모든 마력을 사용하게 해준다. 탑은 세계수의 마력이 흐르는 곳.
즉, 황제의 반지와 비슷한 물건을 갖고 있는 지크가 모든 마력을 사용하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지금, 지크에게 황제의 반지와 비슷한 물건은 없다 했다.
‘만약 녀석이 그 물건을 정말로 다른 이에게 줬다면 저 힘은 대체…!’
누가 봐도 지크의 힘은 최전성기의 그것이다. 분명 모든 마력을 깨운 상태임이 분명하다.
한데, 그 물건이 지크에게 없다면 대체 어떻게 저 힘을 사용한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힘을 내는지가 궁금해?”
울텔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지크가 외쳤다.
울텔의 부하들이 계속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고작 그 정도의 공격력으로 지크의 주둥아리를 봉인하기는 불가능했다.
“무척 간단한 이유야. 난 지금 내 모든 마력을 해방한 상태거든.”
“웃기지 마라! 네놈의 마력이 얼마만 한데 그 나이에 모든 마력을 해방한단 말이냐!”
울텔이 탑 안에서 지크가 힘을 휘두른 걸 보고 기뻐한 이유가 그것이다.
아무리 회귀를 했다고 해도 고작 저 나이에 모든 마력을 해방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정도로 지크의 마력은 막대했다.
따라서 울텔은 지크가 황제의 반지와 비슷한 물건을 지금 갖고 있다고 판단했다. 물건을 지크가 갖고 있다면 섬의 안전은 자동으로 보장된다.
때문에 울텔은 고민 없이 섬의 모든 병력을 탑으로 불러들였다.
한데, 지크는 지금 황제의 반지와 비슷한 물건 없이 모든 마력을 해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당연히 울텔은 믿을 수 없었다.
울텔의 외침에 대한 지크의 대답은 무척이나 단순했다.
“간단해! 네 예상을 아득히 상회할 정도로 내가 천재니까!”
울텔을 할 말을 잃어버렸다.
혹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하는 말일까. 그도 아니면 자신의 판단력을 흐리기 위한 기만?
하지만 저 확신에 가득한 어조와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면 도저히 조롱이나 기만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울텔은 당장 세계수가 있는 섬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다 멈칫했다. 자신의 부하들을 썩은 나무 베듯 베어버리는 지크가 보인다.
저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는 걱정이 샘솟았다.
“핀!”
“네, 주인님!”
울텔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브 한 명이 뛰쳐나왔다. 울텔은 그에게 토르니움을 건네며 말했다.
“섬에 침입자가 생겼다! 당장 가서 제압해라!”
“네!”
“데려갈 녀석들은….”
측근 중 가장 실력이 좋은 놈을 뽑아 지휘권을 부여하고, 이제 섬에 보낼 병력의 수를 정해야 했다.
그리고 울텔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얼마나… 보내야 하지?’
적이 침입했다는 것만 알았을 뿐, 적의 수준과 숫자는 알지 못한다.
다만 섬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절대 수준 낮은 이들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소수의 병력을 보냈다가는 그저 부하들만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거야 많은 수의 부하를 보내면 해결되겠지만, 문제는 지금 여기서 대량의 병력을 빼기가 녹록치 않다는 것이었다.
지크 일행은 여전히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며칠간 싸우며 쇠락해진 모습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체력이 적은 루벨라와 윌위스가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들의 실력도 여전히 날카로웠다.
몬스터와 언데드, 그림자들을 총동원해 압도적인 물량으로 지크 일행의 힘을 빼서 잡는다는 것이 울텔의 기본적인 전략.
하지만 지크 일행의 실력은 고작 물량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대가리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밀어버리고 탑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게 지크 일행의 실력이었다.
때문에 지크 일행을 탑에 잡아두기 위한 정예가 꼭 필요했다.
몬스터, 언데드, 그림자들을 희생시켜 지크 일행의 공격을 막아내고, 그 빈틈을 찔러 어떻게든 지크 일행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자들.
섬에 침입한 자들도 정예들일 터이니 어느 정도는 이 고급 병력을 투입해야 한다.
아니, 섬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대량으로 투입하는 게 옳다.
한데 그렇게 된다면 지크 일행은?
‘지금도 간신히 놈들의 발목을 묶고 있는 판에….’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 괴물 같은 놈들은 두 개의 층계를 뚫어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 와중에 만약 대량으로 병력을 섬으로 뺀다면 당장 지크 일행이 탑 끝까지 올라가 순간이동으로 섬까지 쳐들어 올 것이다.
“주인님?”
핀이 울텔을 불렀다. 명령을 바라는 것.
하지만 울텔의 입이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브뤼셀 시스템이 있는 섬에 집중해야 하나, 아니면 최악의 적이 있는 탑에 집중해야 하나.
“어라? 그렇게 고민만 하고 있을 거야? 여유가 넘치나 보지? 과연, 우리 대 밸리드의 교황님! 일반인들과는 다르다니까!”
“닥쳐!”
안 그래도 머리가 과열돼 증기라도 뿜어져 나올 것 같은 상황에 지크가 그 간교한 혓바닥을 놀리자 결국 울텔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내 동료는 착실하게 시스템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그렇게 멍 때리고 있을 시간 없다니까? 이건 내 친절한 충고…!”
“닥치라고 했다!”
지크의 의도는 뻔했다. 조롱으로 자신의 판단력을 흐리게 해 적적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
“싫은데? 싫은데? 싫은데?”
…어쩌면 그저 조롱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시간만 끌다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못하고 섬과 브뤼셀 시스템, 세계수를 적에게 넘기게 생겼다.
울텔은 일단 급한 대로, 당분간 지크를 막을 수 있으리라 추측되는 병력을 제외한 최대한 많은 정예를 섬으로 보냈다.
브뤼셀 시스템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몬스터와 언데드들도 그들에게 딸려 보내려 했다.
그러나 그걸 조용히 보고 있을 지크가 아니었다.
“어딜 가!”
콰아앙!
에스텔레이드의 검신이 환하게 빛났다.
“우리와 계속 춤을 추고 싶다며! 그러면서 일방적으로 무대를 내려가려 하면 안 되지!”
“맞아요! 하여간 예의를 모르는 것들이에요!”
루벨라도 뒤이어 외쳤다. 그녀의 말투에 즐거움이 가득 배여 있는 게 기분 탓은 아니리라.
지크는 일행을 돌아봤다.
“조금 거칠게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어이구, 늙은이에게 무리시키는구먼.”
“얼마든지! 화살은 아직 충분히 있어!”
“부상은 걱정 마세요! 즉사만 아니라면 어떤 상처든 바로 회복시켜 드릴게요!”
지크 일행의 공격이 격렬해졌다.
지금껏 지크 일행은 어디까지나 최대한 체력과 마력을 온존하는 방어적 형태로 적들의 공격을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지크의 명령과 함께 그들의 기세가 완전히 변했다.
그들의 전진 속도가 확연하게 빨라졌다. 자신들을 가로막는 적들을 분쇄하며 지크 일행은 앞으로 앞으로 전진했다.
공격에 중점을 주기 시작한 터라 아무래도 방어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그들의 몸에 상처가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몇 개는 치명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상처든 루벨라의 성력이 머무르면 얼마 안 가 깨끗하게 회복되었다.
“막아! 어떻게든 막으란 말이다!”
울텔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른다.
그도 직접 지팡이를 든 채 지크 일행을 공격했다.
그러나 거세진 지크 일행의 공격에 병력까지 뭉텅이로 빠진 밸리드 군은 지크 일행의 발목을 붙들지 못했다.
오히려 섬으로 보내려던 지원군이 지크 일행에게 끊겼다. 몬스터와 언데드 같은, 머릿수를 채우기 위한 병력은 탑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던 것이다. 그것을 지크 일행이 중간에서 모조리 쳐 죽이고 있었다.
섬에 나타난 적도 수틀리면 물량으로 밀어버리려 했던 울텔의 의도가 틀어지는 순간이었다.
“멍청이! 그러니까 우리를 탑 안으로 끌어들이지 말았어야지! 네놈의 병력이 분단되는 꼴밖에 더 되냐! 이거 그렌 제너드를 욕할 꼬라지가 아니잖아, 네놈!”
그리고 끊임없이 날아드는 지크의 조롱.
“이, 이 개자식이…!”
울텔은 지크 브레이브와 싸워 본 적은 있어도 지크 모어와는 싸운 적은 없다. 지크 모어는 철저하게 그렌이 만들어낸 인물이었으니.
하지만 그래도 브뤼셀 시스템으로 인해 지크 모어가 어떤 이인지는 잘 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정보로 안 지크 모어와 실제로 겪는 지크 모어는 완전히 달랐다.
‘그 용사 병신은 이런 놈을 상대해 왔다고?’
힘의 강약을 떠나서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혓바닥. 그렌 제너드가 그에게 주던 굴욕과는 정반대의 모욕에 울텔은 뇌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지크의 선물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