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7화
“…무시무시한 살기군. 정말로 자네와 직접적으로 칼을 맞대는 건 심장에 좋지 않아.”
하지만 그럼에도 울텔은 자신의 승리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또 하나 확실해졌어. 자네는 너무 위험해. 앞으로 회귀를 할 때마다 자네만큼은 확실히 죽이고 시작해야겠어.”
“그런 쓰잘데기 없는 미래 계획을 뭐 하러 세워? 앞으로 네가 회귀할 일은 없으니 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에스텔레이드가 빛을 내뿜었다.
콰아앙!
하지만 빛은 탁하고 반투명한 회색 벽에 막혀 사그라졌다.
그러나 그 빛은 시작일 뿐이었다. 곧 온갖 빛의 향연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쾅! 쾅! 쾅! 콰쾅!
이미 많은 음식들이 놓여 있던 식탁은 에스텔레이드의 빛과 울텔의 성력에 맞부딪쳐 산산이 박살 났다.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더러운 쓰레기로 바뀌어 식탁의 잔해와 함께 바닥에 뒹굴었다.
콰아앙!
다시 한번 에스텔레이드의 빛이 폭발했다. 울텔은 지팡이를 들어 요격했다.
과연 울텔의 실력은 밸리드의 교황이라는 이름에 전혀 부끄럽지 않은 실력이었다.
웬만한 실력자라면 그의 거대한 성력과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성법에 일방적으로 농락당하다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지크였다. 아무리 울텔이 단단한 벽을 세우고 위협적인 공격을 날려도 지크의 공격은 그 모든 것을 짓이기고 부쉈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힘. 이대로면 얼마 안 가 울텔의 방어는 모조리 박살 나고 에스텔레이드의 검신에 목이 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울텔의 얼굴에 절박함은 보이지 않았다.
후우웅!
지크가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에스텔레이드는 주인에게 반응해 폭발적인 빛을 내뿜었다.
콰아아앙!
섬광이 굉음을 만들어 주변을 뒤흔들었다.
감촉이 있다. 에스텔레이드가 무언가를 확실히 베었다. 그러나 지크는 전투태세를 풀지 않았다.
쿠웅!
지크의 앞에서 무언가 쓰러졌다. 붉은 핏물이 흘러나와 대지를 적신다. 하지만 그것은 울텔이 아니었다. 로브를 입고 있는 낯선 이였다.
어느새 울텔의 곁에는 로브를 입은 이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위층에서 계속 적들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밀리니까 부하들 뒤에 숨는 거냐?”
“조직을 이끄는 수장의 이점이지. 성스러운 밸리드를 이끄는 입장에서 어찌 자네와 야만적인 드잡이질을 계속할 수 있겠나.”
“지랄도 수장의 능력 중 하나라면 넌 최고의 수장 중 하나일 거다.”
엄지를 치켜세우며 지크가 빈정거렸다.
“물론! 그리고 난 유일한 세계 최고의 수장이 될 거다. 너를 해치운 이후에 말이야.”
“꿈이 너무 크시군. 설마 그놈들만으로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나와 꾸준히 싸워온 모양인데, 날 너무 모르는 거 아냐?”
울텔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하지만 네가 상대해야할 건 이 녀석들만이 아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일단의 무리가 위로부터 우르르 몰려 내려왔다.
“혹시 날 탑으로 몰아붙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오히려 여기서 내가 널 기다렸지.”
함정에 빠진 사냥감을 확인하는 하는 것처럼 울텔이 느긋하게 말했다.
“네놈, 토르니움을 통해 내 행동을 들여다보고 있었지?”
“그 정도는 눈치채나?”
“네가 코어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다는 예상을 하자마자 바로 든 생각이었다. 그래서 함정을 하나 팠지.”
“나한테는 토르니움을 통해 거짓 정보를 흘리고, 진짜 계획은 갖은 이유를 붙여 토르니움을 떼어내고 있을 때 진행한 모양이군.”
“역시 눈치는 빨라. 하지만 너도 참 대단해. 그렌 제너드에게 토르니움을 쥐여 준 채 일부러 도망치게 했었지? 정보를 빼내려고 말이야. 드래곤이 나타난 그 난장판 속에서 반쯤 맛이 간 그놈이 쉽게 도망칠 수 있었던 게 어쩐지 이상하긴 했다.”
“놈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한 거 아냐? 그래도 도망 정도는 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네 손아귀에서? 그 병신이?”
“그건 그렇군.”
“하여간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말은 단 하나도 부정하지 않는군.”
“사실을 부정할 순 없잖아.”
“크흐흐! 그래, 사실을 부정할 순 없지. 그리고 네가 내가 판 함정에 걸렸다는 사실도 마찬가지고.”
“고작 네 계획 하나 숨긴 거 가지고 너무 희망에 젖을 것 없어. 나는 상대의 계획을 박살 내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니까. 너도 잘 알잖아?”
“하지만 이 계획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려왔다.
“탑의 순간이동 능력을 사용했군.”
“그렇다!”
이 섬은 클로원의 유산 중 하나다. 언제나 거센 급류로 보호받고 있어 배를 타고 접근하는 건 지크처럼 무지막지한 힘으로 강제로 뚫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때문에 섬에 들어오고 나가는 데 사용하는 것이 바로 순간이동이었다.
세계수에서 끌어 온, 탑에 흐르는 막대한 마력은 탑 1층과 호숫가를 연결했다. 또한 세계수의 본체와 브뤼셀 시스템이 있는 섬과는 탑의 꼭대기로 순간이동이 가능했다.
한마디로 이 탑 자체가 거대한 순간이동의 중계지인 셈.
섬이나 호숫가에 병력이 있다면 울텔은 언제든지 그들을 불러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일단 병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나 울텔은 자신만만했다.
“병력은 충분해. 지금의 상황을 대비해 섬과 호숫가에 엄청난 병력을 배치해 뒀거든. 네놈이 전장에서 보이지 않자마자 크로뇽 왕국에 있는 정벌군에서도 상당히 많은 병력을 빼왔고.”
“그러다간 전선을 유지하지 못할 텐데?”
“상관없다. 시간을 벌 수 있을 만큼은 남겨 뒀으니. 브뤼셀 시스템만 복구시키면 모든 게 해결돼.”
회귀만 한다면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다. 때문에 지크도 브뤼셀 시스템을 그토록 무력화시키려고 하지 않았던가.
“자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기대해보지.”
로브들이 무기를 치켜세운다. 지크도 에스텔레이드를 들었다.
콰앙!
커다란 소리가 들리며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는 쪽의 문이 열렸다.
“지크! 괜찮아?”
레오나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울렸다. 아래층에 있던 지크 일행이 올라온 것이다.
그들은 지크와 대치하고 있는 로브들을 확인했다.
“역시 벌레 대장 따위가 약속을 지킬 리가 없죠. 놀랍지도 않은 일이에요.”
루벨라가 로브들 뒤에 숨어 있는 울텔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나에 대한 신뢰가 너무 박한 것 아닌가, 성녀여. 네 동료가 먼저 습격을 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흥!”
짧은 코웃음으로 그녀는 울텔의 주장을 일축했다.
“적절하게 올라오셨군요.”
“아래층에서 갑자기 공격이 시작되어서 말일세.”
윌위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계단에서 소란이 일었다. 누가 봐도 아래로부터 엄청난 수의 무언가가 뛰어 올라오는 소리였다.
“내가 말했지? 호숫가에도 병력을 충원해 놨다고. 게다가 자네들이 남겨 놓고 온 몬스터들도 아직 많네. 마탑의 자체적인 방어 병력도 있지.”
그림자와 골렘들이 아래에서 계속해서 올라왔다. 드문드문 밸리드의 병력과 몬스터들도 섞였다.
지크 일행은 순식간에 포위됐다.
만족스럽게 그 모습을 지켜본 울텔이 입을 열었다.
“해치워.”
적들이 지크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 * *
지크 일행의 실력은 무시무시했다.
지크와 틸이 각자의 검을 맹렬히 휘두른다. 적들의 공격은 그 검에 걸려 찢기고 파괴되어서 지크 일행에게 닿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의 검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만 국한되지 않았다. 조금의 여유만 생겨도 쏟아지는 막대한 검기는 가장 앞서 달려드는 적들을 사정없이 베어버렸다.
게다가 뒤에서 튀어나오는, 빠르고 은밀한 레오나의 화살.
척 보기에도 적들 중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쏘아져 나간 화살들은 적의 급소를 찔러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밀집된 실내에서 터지는 윌위스의 마법은 적들을 말 그대로 일소했다.
그 막강한 공격을 뚫고 상처를 입혀도 곧 루벨라의 성력으로 회복된다.
정말로 적으로 상대한다면 욕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지크 파티의 실력이었다.
하지만 울텔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정말로 목숨을 소모품처럼 던져가며 지크 일행을 공격했다.
목숨을 희생해 지크 일행의 몸에 칼자국 하나를 낼 수 있다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렇게 했다.
게다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물량.
어느 순간부터 울텔의 세력 중 언데드도 섞이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언데드는 물론, 꽤 정성을 들여 만들어낸 것이 확실한 고위 언데드도 잔뜩 보였다.
정말로 울텔은 자신의 모든 세력을 투입한 것 같았다.
아직까진 버틸 수 있다. 지크 일행의 실력을 생각하면 며칠 동안 싸우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들의 체력과 마력이라고 무한하지는 않다. 드래곤급의 마력을 가지고 있는 지크조차 한계는 있는 것이다.
지크 일행은 포위를 뚫으려 전진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적들은 악착같이 지크 일행의 앞길을 막아섰다.
특히 울텔은 역시 밸리드의 교황이라는 듯 엄청난 성법을 사용해 일행들을 몰아붙였다.
“흐읍!”
지크가 에스텔레이드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에스텔레이드가 빛을 환하게 내뿜었다.
우르르르르르!
지크의 주변으로 언데드와 몬스터들이 모여들었다.
그것들은 서로의 몸을 덮고 덮어 거대한 벽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고위 병력이 그것들을 강화시켰다. 그 위로 그림자들이 또 뒤덮였다.
콰아아아앙!
지크의 공격이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뿜으며 날아간다. 벽은 물론이고 그 뒤에 있는 자들까지 그 빛에 휩쓸렸다.
엄청난 병력이 지크의 공격에 죽어나갔다.
하지만 적의 병력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지크의 공격이 쏘아지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빛 속으로 뛰어들어 공세를 약화시키기까지 했다.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났다.
그 파상 공세 속에서도 지크 일행은 전진했다. 정말로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실력.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보고 있던 울텔도 질린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그러나 울텔의 계획은 착실히 진전되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또 해가 뜨고, 또 한 번 달이 떴으며, 다시 해가 떴다.
며칠 간 지크 일행은 탑의 포위를 뚫어 두 개의 층계를 올라갔다. 울텔이 위층으로 도망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적들은 쏟아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지크 일행의 공격력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크와 틸, 레오나는 여전히 쌩쌩 움직였지만, 윌위스와 루벨라의 얼굴에는 확실한 피로감이 엿보였다.
게다가 쌩쌩하게 보이는 틸과 레오나의 마력도 상당히 소모된 상황.
“슬슬 포기하는 게 어떻겠나?”
울텔의 목소리가 요란한 전투의 소음을 뚫고 지크 일행에게 도달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적 일곱을 한꺼번에 벤 지크가 코웃음 쳤다.
“슬슬 병력이 달리나?”
“아니. 아직 많다네. 그림자들은 무한히 샘솟기도 하고. 그저 나도 슬슬 자고 싶거든. 자네들도 그렇지 않나?”
“걱정 마. 네놈을 해치우고 푹 쉴 생각이니까.”
“하긴, 자네가 순순히 포기를 할 인간이라곤 생각할 수 없지. 그럼 계속하게나. 어디 체력과 마력이 통째로 떨어지더라도 계속 반항할 수 있을지 두고 보겠네.”
어차피 탑이라 도망을 칠 곳도 없다. 창문이 있긴 했지만, 이 탑은 입구를 제외한 출입을 마력으로 철저하게 통제한다.
즉, 지크 일행은 여기서 말라 쓰러질 수밖에 없다.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 며칠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올 지크 일행의 최후를 감상하려던 울텔.
하지만 느긋한 그의 얼굴에 갑자기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지크는 전투 와중에도 비릿한 조소를 날렸다.
“왜 그래? 뭐가 잘못됐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