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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76화 (576/628)

제576화

울텔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껏 지크와 친한 친구처럼 그렌을 비웃으며 왁자지껄 웃던 모습이 순식간에 확 날아갔다.

남은 건 그렌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며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한 야심가의 모습뿐.

“그거 안타깝군. 하지만 어디까지나 난 착한 일을 하며 돌아다닌 것뿐이야. 만약 그 탓에 손해를 봤다면 겸허히 감수하라고.”

“지금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착한 일? 천하의 지크 모어가 말인가? 내가 헛것을 들은 것이든 네가 헛소리를 한 것이든 아직 취하긴 이르지 않나? 아니면 자네는 모어가 아니라 브레이브인가?”

“헛소리.”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가 안 가는군. 내가 알기로 모어와 착한 일은 하늘과 땅보다 더 거리가 있는 걸로 아는데. 농담인가? 농담이라면 정말로 재미없는 농담이라고 해 두지.”

“아니, 진심이야. 혹시 바로 전 시간선을 확인해 본 적 있나?”

“했다.”

“그때 그렌이 내게 뭐라고 했는진 알아?”

“아니. 하나의 시간선을 그리 자세히 보진 않아. 그저 계획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만 대충 훑어보는 편이지.”

“어떻게 보면 그때가 그 용사 병신이 원하던 완벽한 인생이었는지도 몰라. 녀석은 세계에 완벽한 용사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난 결국 마왕으로서 녀석에게 패했다.”

지크의 말에 꽤 큰 흥미가 일었는지 울텔이 지크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마지막 일격을 날리기 직전 녀석이 그러더군. 다시 태어나면 착하게 살라고.”

“…그 말 때문에 회귀 후에는 착하게 살았다?”

“이래 봬도 난 날 쓰러뜨린 자는 존중하는 성격이다. 때문에 한 번 착하게 살아 봤지.”

“그리고 그게 결국 그렌 제너드를 방해하는 길로 이어졌다?”

“아이러니하지?”

“자신의 일을 방해한 놈이 자신이었다니. 대체 저놈은 얼마나 병신 짓을 더 해야 분이 풀리는 거지.”

울텔은 혀를 내둘렀다.

“나야 좋은 계기였어. 나쁜 놈들인 마인 놈들을 찾아 쳐 죽이고 다니면서 진실에 근접할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라일라를 만난 게 컸지.”

“그래. 브뤼셀 시스템의 코어.”

울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너와 만나게 된 게 상황이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 같기도 하더군. 솔직히 난 그것이 그렌 제너드와 만나는 걸 두려워했다. 강제적으로 깨어나면 기억 대다수가 지워지며 자아까지 날아간다지만 그렇다고 모든 기억이 지워지는 건 아니지 않나. 그렌 제너드가 그것과 만나 녀석이 회귀라는 힘에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게 되면 일이 정말로 꼬일지도 모를 일이었지. 한데 설마 네가 회귀를 하고 그것과 만나게 되다니.”

“내게는 굉장한 행운이었지. 여러모로.”

“내게는 굉장한 불운이었네. 여러모로.”

한 번 더 한숨을 내쉰 울텔.

“하나 묻지.”

“계속 묻고 있잖아? 뭘 그리 무게를 잡아.”

지크가 가벼이 대꾸했다. 그러나 울텔의 진지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코어의 기억을 읽었나?”

“응? 라일라의 기억은 브뤼셀 시스템의 제어 장치를 통해서만 읽을 수 있는 거 아니야?”

“나도 지금껏 쭉 그렇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네가 알고 있는 정보가 너무 자세해.”

“노력의 성과지.”

“특히 밸리드의 역사에 대해 너무도 자세하다. 그건 기록으로 남을 것들이 아냐. 구전으로 내려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것들이지.”

울텔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 내가 한창 회귀를 할 때, 몇 번 정도 밸리드의 역사를 부하들에게 설명한 적이 있었지.”

“그럼 부하 중 입이 싼 놈이 있었나 보군.”

“설령 그렇다 해도 회귀를 하면 그 모든 것이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려. 즉, 그 정보를 아는 자는 다시 나 혼자가 되어 버린다는 거다. 그래, 코어에 입력된 정보를 제외하고는.”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거지?”

“변하는 건 없지.”

지금까지의 기세가 거짓이라도 되는 듯 울텔의 목소리가 다시 차분해졌다.

“어차피 너나 나나 여기서 끝장을 보려 하는 건 마찬가지니. 이야기를 나누는 김에 물어보는 것뿐이다. 하지만 내 결심이 더더욱 확고해지긴 했지.”

울텔은 잔을 들어 조금 남은 포도주를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이번 시간선에서 너에게 참 특이한 상황이 많이 발생했더군. 네가 얼마나 천재인지는 잘 안다. 하지만 종종 보여주는 폭발적인 실력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 그건 지크 브레이브나 지크 모어 같은, 네가 네 재능을 완벽하게 가다듬었을 때의 모습이었거든. 하지만 아무리 네가 천재라도 그 나이에 모든 마력을 해방했다고는 생각 않는다. 네 마력의 양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네가 네 마력을 해방하기 위한 특수한 방법을 갖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남은 포도주마저 전부 마셔버린 후, 울텔은 확신 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그 비슷한 걸 나도 가지고 있지.”

그가 자신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브뤼셀 시스템의 제어 권한을 가질 수 있다는 황제의 반지.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너도 이 반지와 비슷한 걸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이 반지와 같이 브뤼셀 시스템의 제어 권한을 가질 수 있는 걸지도 모르지.”

“꽤 생각을 많이 했군.”

“더 있다. 너는 그 힘을 언제나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필요가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특정한 조건하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을까? 내 반지처럼, 세계수의 힘을 받아야만 사용이 가능하다든가.”

울텔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그렇다면 네가 마력을 완전히 해방한 곳마다 세계수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고 보는 편이 옳겠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울텔은 분명 핵심에 접근하고 있었다.

“어쩌면 브뤼셀 시스템에 대한 이해는 나보다 네가 더 높을 수 있겠어. 그러고 보니 그렌 제너드에게 더 이상 회귀를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지? 회귀 능력을 제어하는 장치가 먹통이 됐는데, 아무래도 그것도 네 짓 같군.”

“이봐, 자꾸 온갖 누명을 나에게 씌우지 마.”

지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울텔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상관없다. 여기서 너를 붙잡아 정보를 뜯어내고, 의심 가는 곳들을 철저히 뒤져보면 되니까. 코어도 다시 잡아넣고 말이야. 너와 함께 다니며 보고 들은 정보 또한 코어의 머릿속에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너에게 감사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네 덕으로 그토록 많은 회귀를 하고도 찾아내지 못했던 브뤼셀 시스템의 본질에 더 접근할 수 있겠어.”

“그게 그토록 쉬우려나?”

지크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전까지 꽤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공간 안에 무척이나 짙은 살기가 요동쳤다.

“결국 중요한 싸움의 결판은 너와 나 사이에 나야 하는 모양이다. 웬만하면 그렌 제너드가 목적을 이루길 원했다만.”

“꼭두각시에게 정이라도 들었나 보지?”

“주제 파악을 못하고 감히 내게 기어오르던 놈이라 꼭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 열심히 달리던 놈이 아니던가. 원하던 과실 정도는 따 먹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놈이 네게 보통 집착을 한 게 아니거든. 그래서 녀석에게 회귀 능력을 준 시간대에는 네가 훌륭한 용사가 되게 그냥 내버려두기까지 했어.”

“흥, 날 그렌 제너드의 주적으로 각인시켜 계속 내 정보도 캐내려 했을 뿐이었잖나.”

“들켰나?”

울텔은 과장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훌륭한 판단이었지. 그렌 제너드의 집착이 결국 널 이 자리까지 불러왔다. 내가 모르는 브뤼셀 시스템의 모습과 함께.”

“자신감이 너무 과하지 않아? 내가 여기서 널 쳐 죽여버리면 끝이야.”

“그건 확실히 무섭군.”

겁먹은 듯 어깨를 움츠리는 울텔.

하지만 빙글거리는 표정과 과장된 움직임은 그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렸다.

“물론 자네는 강해. 아니,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지. 많은 회귀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내가 보장하건대 세계 최강은 너다. 아마 과거에도 미래에도 너 같은 인물은 없었을 거야. 있다고 해도 극소수겠지.”

“음, 음!”

지크는 그의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일행은 또 어떻고. 카르위먼의 성녀 아이네 프리멜 루벨라에 그렌이 만든 세계에서는 자네와 같이 3마왕이라 불렸던 윌위스 드웨인과 틸. 그리고 호수의 일족의 공주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까지. 파티로도 최강의 수준이야. 만약 내게 아무런 준비 없이 너희들과 맞서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난 일단 그 누군가의 목부터 꺾어버리고 얌전히 항복을 하든가 도주를 하든가 할 걸세.”

“그 말은 준비만 한다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아무리 너희가 대단하다고 해도 결국 소수다. 막대한 인원을 동원한다면 밀릴 수밖에 없어. 힘의 마왕 지크 모어와 그 부하들은 세계와 맞서 싸웠지. 하지만 그 당시 세계는 정상이 아니었다. 지크 모어 말고도 마왕이 둘 더 있었고 마인들도 많았지. 거기에 온갖 혼란은 덤이었고. 안 그래도 오랜 전란으로 허약해진 데다 다른 마왕과 마인들이 전력을 분산해준 덕에 너희가 그토록 오만하게 군림할 수 있었을 뿐, 만약 정말로 너희가 세계의 모든 전력과 충돌했다면 아무리 너희라도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다.”

지크는 울텔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 말은 곧 나와 일행을 몰아붙일 전력이 보장되어 있다는 소리군.”

“물론.”

딱!

울텔이 손가락을 튕겼다. 지크는 탑에 흐르는 마력이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섬에서 자네와 싸우는 것은 최초의 시간선 때 이후로 두 번째로군.”

“말은 바로 해. 내가 아니라 브레이브. 그리고 싸운 게 아니라 네가 일방적으로 뒤통수를 친 거지.”

“부정은 않겠네.”

“그리고 인식도 바꾸고. 네가 뒤통수를 친 건 브레이브와 세르피나가 싸울 때가 아냐. 브레이브가 승리한 시점이지.”

“그것도 그렇군. 그때 세르피나는 누가 봐도 빈사 상태였으니. 하지만 그러니 내가 뒤통수를 친 거야. 둘 다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였으니, 습격을 하기엔 최적의 상태가 아닌가.”

그때를 생각하며 울텔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가장 위험한 때였어. 분명 서로 싸워 힘이 빠진 때를 노렸는데도 그들은 정말로 격렬히 저항했지. 거의 빈사 상태까지 몰려 있던 세르피나마저 말이야. 분명 부하들을 던져두고 나는 최대한 전투 지점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탑 꼭대기로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자칫 목숨이 날아갈 뻔했지 뭔가.”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지만 최후에 승리한 건 나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고.”

지크는 검을 뽑아 들었다. 울텔도 식탁 옆에 있던 지팡이를 들었다.

“아, 한 가지 더 묻는 걸 깜박했군.”

“뭐지?”

“자네, 코어와는 무슨 사이인가?”

“곧 연인이 될 거다만?”

지크는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정말로? 자네의 일방적인 망상이 아니고?”

“애초에 고백은 그 녀석이 먼저 했어. 오히려 내가 녀석에게 반한 게 최근이다.”

울텔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왜, 부럽냐?”

“부럽지. 미치도록 부럽지. 나도 남자라네. 그 정도 미인을 보고 아무 생각도 없을 리가. 그저 브뤼셀 시스템의 코어를 함부로 건들 수 없어 두고 보았을 뿐. 절차대로 깨우면 세르피나가 깨어나 난리를 칠 테고, 자아를 날리려면 외부에서 강제로 부숴야 하는데 그러다 회귀 능력까지 사라지면 어쩔 텐가.”

“라일라의 능력은 회귀 능력과 상관이 없잖냐.”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지. 일부러 위험한 일을 할 순 없었다. 그런데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겠어.”

그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생겼다.

“브뤼셀 시스템을 깊이 이해한다면 그 녀석을 마음대로 꺼내 가지고 놀 수 있겠지. 곧 연인이 될 네게는 피를 토하도록 고통스러운 일일 테지만 뭐, 걱정 말게. 그때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

지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에 무척이나 진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웃는 건 그의 입가뿐, 눈에는 시리도록 차가운 살기가 감돌았다.

“일부러 날 흥분시켜 이득을 보려는 셈인가? 뭐, 너다운 발상이로군.”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침착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 형용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무언가가 스며 있었다.

지크를 도발한 울텔의 이마에 살짝 식은땀이 맺힐 정도였다.

“일단 축하해. 네 의도는 확실히 성공했다. 지금 나는 나도 놀랄 정도로 화가 난 상태거든. 그래서 묻겠는데 말이야.”

에스텔레이드를 쥔 지크의 손에서 ‘우드득!’ 소리가 흘러 나왔다.

“뒷감당은 가능한 거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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