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5화
브레이브.
그 이름의 등장에 지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젠 많이 익숙해진 것일까. 그 외에 별다른 거부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처음 지크 브레이브라는 존재가 나타났을 때, 정말로 하늘이 날 돕는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정말로 밸르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없던 신앙심마저 생겨날 정도였지.”
울텔은 아련한 눈으로 그때를 떠올렸다. 지크는 그 눈을 콱 찌르고 싶은 충동을, 포크를 만지작거리며 억눌렀다.
“세르피나의 능력은 정말로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그것이 이끌고 다니는 몬스터 군단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 그 자신의 능력도 그랬지. 솔직히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기뻐하는 것도 잠시뿐이었고, 그 이후에 몰려든 감정은 깊은 암담함이었어. 죽이든 제압을 하든, 저걸 물리쳐야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때 나타난 너와 네 일행들은 정말로 축복 그 자체였다.”
“내가 아냐. 브레이브다. 착각하지 마.”
“예전의 본인을 싫어하나 보지?”
“예전이든 나발이든 그건 내가 아냐.”
“뭐, 그리 원한다면 그렇게 대해주지.”
어차피 어려운 일도 중요한 일도 아니다.
“어쨌든, 브레이브는 자기 일행들을 이끌고 훌륭하게 코어를 몰아붙였다. 둘 그리고 그들 세력의 싸움은 점점 격해졌지!”
울텔이 아는 정보는 지크도 다 아는 정보다. 울텔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울텔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흥을 올리는 듯 점점 더 목소리도 커지고 말도 빨라졌다.
자신의 인생 최고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흥분한 모양이었다.
“그 순간을 노리고 난 바로 모든 세력을 동원해 두 놈을 급습했다. 물론 내 부하들 따위가 그 둘을 어찌할 수는 없었어. 하지만 일순간의 틈만 만들면 충분했어!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건 둘의 목숨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브뤼셀 시스템.”
“그렇다! 회귀를 가능하게 하는 그 시스템! 그것만 있다면 브레이브와 세르피나가 얼마나 강한지 따위 상관없어! 세르피나는 잠들어 있던 때, 브레이브는 아직 성장하지 않았던 때로 시간을 돌려버리면 그만이니까!”
회귀의 힘 앞에, 개인의 무력은 땅속을 기어 다니는 지렁이의 일생만큼이나 의미가 없었다.
“당황한 둘을 뚫고 나는 브뤼셀 시스템 앞에 설 수 있었다. 물론 아무나 브뤼셀 시스템을 조작할 순 없지. 브뤼셀 시스템을 조작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으니까. 당시의 그 자격을 가지고 있던 자는 세르피나뿐이었고.”
“하지만 네겐 상황을 바꿀 물건이 있었지.”
울텔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쓰다듬었다.
“생각해보면 갑자기 세르피나가 튀어나온 이유가 아마 이것이었을 듯싶더군. 조용히 코어로서 브뤼셀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있던 그것이 갑자기 깨어날 이유가 어디 있겠나. 시스템이 고장 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세계수의 막대한 마력은 길디긴 시간 동안 브뤼셀 시스템을 완벽하게 보호했다.
당연히 외부의 간섭이 없었다면 코어인 세르피나는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코어가 스스로 깨어날 수 있다면 지크가 라일라를 구하겠답시고 나설 필요도 없지 않은가.
“제국 황제의 반지.”
“밸리드가 대대로 모아온 방대한 자료와 내 끈기가 합쳐져 발견하게 된 물건이지. 솔직히 처음 발견했을 때만 해도 확신할 순 없었어. 꽤나 귀한 물건인 건 확실했지만, 애초에 진짜 황제의 반지는커녕 고대 제국의 유물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지. 하지만 세르피나가 튀어나옴으로써 나는 이 반지가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걸 얻음으로써 나는 브뤼셀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 거다.”
울텔은 허공에 손을 펼쳐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를 황홀하게 바라봤다.
“처음으로 회귀의 힘을 사용했을 때는 마치 꿈을 꾼 듯했지. 주름진 피부가 젊은 날의 탱탱한 것으로 바뀌었고 떨어진 체력도 완전히 돌아온 느낌. 자네도 느꼈겠지?”
지크는 자신이 처음 회귀를 한 날을 기억했다.
“아니.”
“거짓말 말게. 그걸 못 느낄 리….”
“처음에는 당황과 혼란 속에 있다가 바로 기어오르는 놈들을 밟았고, 그 뒤에 밟은 놈 중 하나에 건방진 동생 놈이랑 결투를 좀 했거든. 생각해보니 되찾은 젊음에 대한 감상을 가진 적이 없네. 확실히 그건 좀 아쉬워.”
“…….”
상상을 초월하는 지크의 대답에 울텔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역시 그 지크 모어가 회귀한 자답다고 해야 하나.”
“칭찬은 그쯤 해 둬.”
“그러지.”
더 이상 그의 헛소리를 부정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역시 수없이 회귀를 반복한 그렌보다 딱 한 번 회귀를 한 지크가 훨씬 더 다루기 어려웠다.
“어쨌든 그렇게 회귀를 했다는 거 아냐.”
“그래. 그 후로 내가 할 일이야 뻔했지. 회귀 때문에 반지와 브뤼셀 시스템은 내 손 안에 없었지만, 어차피 시간이 되돌아갔으니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었어. 또한 고대 제국의 여러 유산도 얻을 수 있었지. 마인을 만들어 내는 물품들이나 제국의 단편적인 정보 등등. 그 후로 난 내 야망을 위해 움직였다.”
“그렌 제너드처럼 말이지?”
“불쾌한 말이군. 자네도 그놈과 비교되는 걸 싫어하지 않았나?”
“아, 그랬지. 방금 그건 너무 심한 말이었어. 내 겸허히 사과하지.”
저 지크가 저렇게 순순히 사과를 하다니. 정말로 그렌은 지크의 안에서 상종을 못할 쓰레기로 인식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울텔 자신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넌 그놈에게 회귀 능력을 넘겼지.”
“귀찮았거든. 아무리 회귀 능력을 구사할 수 있다고 해도 매 시간선마다 권력을 잡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 회귀를 하면 할수록 야망에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그 밑 준비를 할 때마다 고생을 해야 했지. 게다가 저번 시간대에 내 야망을 저지한 놈을 치웠다 생각하면 이번 시간대에는 또 새로운 놈이 튀어나오기도 했고, 브레이브처럼 어떤 시간선이든 내 발목을 잡는 놈들도 있었으니.”
울텔이 짜증 섞인 눈초리로 지크를 노려본다.
하지만 브레이브와 자신을 철저히 타인으로 취급하는 지크에게 그 시선은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왜 노려보냐며 역으로 눈을 부라렸다.
“정보가 필요했다. 물론 정보 또한 회귀를 할수록 충실해져 갔지만, 내가 말했지 않은가. 거기까지 이르는 길이 귀찮았다고. 게다가 회귀라는 것도 무한한 게 아니었고.”
역대 클로원 황제들이 겪었던 공포심을 일컫는 것이리라.
“그때 내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하나 지나간 거지. 정보를 얻기 위한 회귀가 귀찮고 아깝다면, 다른 놈에게 떠맡겨 버리자고.”
“그래서 선택한 게 그렌 제너드군.”
“그렇지.”
울텔은 소리 죽여 웃었다.
“불쌍하고 불쌍한 우리 태양의 용사 그렌 제너드. 가진 거라곤 반반한 얼굴과 과대망상 꿈밖에 없는 놈.”
무척이나 가여워하는 어조가 흘러나왔지만 그 내용은 지독히 모멸적이었다.
“그놈을 만난 건 내게도 참 행운이었네. 아무래도 상대를 잘 선택해야 했거든. 일단 야망이 작은 놈은 안 돼. 회귀 능력으로 돈만 벌어 떵떵거리고 사는 게 목적인 놈이나 그 비슷한 놈들에게 능력을 준다면 당연히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가 없으니까. 게다가 회귀 능력이라는 막강한 능력을 주는 만큼 심히 똑똑해도 안 됐지.”
“그 조건을 만족시킨 게 그렌 제너드였다?”
“목표는 정의로운 용사인 주제에 심성은 추악해서 일어난 혼란을 수습하는 걸로 만족 못 하고 오히려 자기가 수습할 혼란을 만들려는 심보를 가진 놈이었으니. 완벽한 인재가 아닌가.”
“뭐, 그놈은 용사가 목표가 아니라 용사라는 명칭에 딸려 올 부산물에 눈이 먼 것이었으니까.”
“그런 주제에 능력은 달려서 회귀 능력을 갖는다 해도 자신의 힘에 일절 의문조차 품지 않을 멍청이.”
“그건 맞지.”
지크는 그렌에 대한 울텔의 평가에 깊이 동의했다.
“정말로 완벽한 꼭두각시의 재능을 갖고 있었군. 그 용사 병신은.”
“그렇지?”
울텔이 지크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 지크도 그를 따라 잔을 들어 올렸다. 마치 건배를 하듯, 둘은 서로를 향해 잔을 살짝 기울였다.
“그렌 제너드를 위하여!”
“용사 병신에게 축복을!”
만약 그렌이 이 모습을 봤다면 피를 토하며 형용할 수 없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 이곳에 그렌은 없었고, 혹 있었다 해도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을 거다. 외부의 정보를 수집하는 감각 기관 대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니.
“게다가 그놈, 우습잖게도 지크 자네에게 경쟁 심리를 갖고 있지 않았나.”
“그놈과 연관 짓는 건 관두기로 합의한 거 아닌가? 이미 서로 한 방씩 먹고 먹였잖냐. 얼마나 기분이 더러운지도 공감했고.”
“이건 그냥 사실이잖나. 탓하려면 과분하게도 자네 위에 서겠다고 아득바득 고집을 피운 그놈을 탓하게.”
“내가 아냐. 브레이브지.”
“그놈에게는 자네일세. 스틸월도 브레이브도 모어도 상관없이, 그저 지크의 위에 서는 걸 원했지.”
“하여간 주제 파악도 못하고.”
“그건 동감일세. 하지만 그 주제 파악 못하는 놈이 내겐 정말로 큰 도움을 줬어. 자신의 욕망 그러니까, ‘지크 브레이브를 누르고 부와 명예를 거머쥔, 역사상 최고의 용사가 되는 완벽한 인생’을 위해 놈은 계속해서 회귀를 시작했네.”
“너는 그놈을 돕기 위해 놈의 휘하로 들어간 척을 했고.”
“그래야 정보가 빠르게 모이니까.”
울텔은 다시 한번 숨죽여 웃기 시작했다.
“정말로 웃기지 않나? 내가 한 건 별거 없어. 녀석이 회귀하기 전, ‘밸리드의 교황 울텔은 특정한 시각, 특정한 장소에 밸르의 화신이 강림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시각, 그 장소에 미리 도착해 있다면 울텔은 그를 밸르의 화신으로 생각하고 충성을 다할 것이다’라는 정보를 슬쩍 흘렸을 뿐이야.”
“그렌은 그 정보를 믿고 정말로 그 시각에 그 장소로 달려갔고 넌….”
“그렌 제너드를 밸르의 화신인 양 대하며 섬기는 척을 했지.”
지크와 울텔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뻥 터뜨렸다.
어찌나 웃겼는지 발을 구르고 식탁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으하하하하! 생각을 해 보게! 그 병신이 근엄한 표정으로 ‘내가 바로 네가 기다려 온 자이니라’라는 말을 태연스레 내뱉었다니까! 나도 회귀 덕에 꽤 오랜 시간을 살아왔지만, 맹세컨대 내 일생 중 그때 비웃음을 참는 게 가장 어려웠어!”
“하하하하하! 아, 젠장! 그걸 직접 봤어야 했는데!”
둘의 웃음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크크큭! 어쨌든 그놈은 그 잘난 완벽한 인생을 위해 계속해서 회귀를 시도했고 정보는 차곡차곡 모였지. 난 그놈이 회귀를 한 시간선의 기억을 갖고 있진 못하지만, 브뤼셀 시스템으로 본 정보들에 따르면 계획은 착착 잘 진행되고 있었어. 초반에는 변수 천지였던 놈의 계획도 차츰 규칙적으로 변해가더군. 이제 얼마 안 가 놈의 계획은 완성되고 동시에 놈의 존재 의의도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지금 시간선에 변수가 다발해버린 거지?”
“그래. 그리고 그 이유는, 또 다른 회귀를 한 바로 너 때문이고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