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3화
울텔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어린애가 쓰는 떼도 지금의 너보단 논리적이겠군.”
“역시 생선 대가리를 신이랍시고 모시는 놈답게 이해력이 달리는군. 이 완벽한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다니.”
지크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울텔의 입이 더 벌어졌다.
자신의 완벽한 논리에 논파당한 게 분명하다. 지크는 의기양양하게 턱을 들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지크뿐인 모양이었다.
“…누가 봐도 지크가 억지를 쓰는 것 같지 않아?”
“관두거라. 지금 지크 군에게 옳고 그름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으니.”
뒤따라온 일행에게서도 지크에게 호의적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아니, 한 명만은 예외였다.
“그럴 리가요. 저 생선 대가리를 신이랍시고 모시는 놈들의 저열한 말 따위가 지크 님의 말보다 논리적일 리가 없잖아요. 지크 님의 말처럼 저 생선 대가리를 모시는 놈들이 이해하지 못한 게 분명해요.”
“…그렇다는구나.”
“…그렇네.”
“…음.”
다른 일행들이 루벨라의 말을 애매하게 긍정했다. 여기서 반박을 해봤자 제대로 된 대화가 될 리 없었으니까.
윌위스가 지크의 옆으로 걸어 나갔다.
“저 녀석이 밸리드의 교황이로군.”
“네. 울텔이라고 합니다.”
“생각 외로 젊군.”
거친 수염을 덕지덕지 기른 채 온몸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새긴, 교활하고 음습한 노인을 상상하고 있던 그에게 직접 본 밸리드 교황 울텔의 모습은 상당히 예상 외의 것이었다.
나이는 대충 중년 정도 된 것 같다.
하지만 주름도 그다지 심하지 않고 수염도 깔끔하게 민 상태. 외모도 꽤 반듯해, 악랄한 사이비 종교의 수장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레오나와 틸도 윌위스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루벨라는 이번에도 다른 이들과 생각이 달랐다.
“누가 봐도 뺀질뺀질하게 생긴 게 딱 생선 대가리에 빠질 만한 면상 아닌가요? 생각대로 생겼는걸요. 메이스 같은 걸로 짓이겨 버리기 좋은 생김새예요.”
“으, 응. 그렇구나.”
이번에도 레오나는 루벨라의 의견을 긍정했다. 그녀의 시선이 최대한 루벨라와 먼 쪽으로 움직였지만, 절대 그녀가 루벨라에게 질려서 그런 건 아니리라.
“…카르위먼의 성녀 아이네 프리멜 루벨라. 내가 아는 인물상과 참 거리가 멀어졌군.”
울텔이 지크를 쳐다봤다.
“아마 내 앞에 있는 누구 때문인 것 같은데. 좀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뭘. 좋기만 한데.”
“말을 할 때는 사람의 눈을 보고 하는 게 어떻겠나. 자네 성격에 쑥스러움을 탄다는 헛소리는 하지 말고.”
“흠! 흠!”
천하의 지크도 루벨라의 성격 변화에 더 이상 변명을 할 순 없던 것일까. 그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어쨌든 만나서 반갑네. 탑의 방어 장치를 모조리 발동시켰지만 결국은 뚫고 올라왔군.”
“고작 그런 걸로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아니, 전혀. 하지만 그 왜, 있지 않은가.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해봤자 손해는 되지 않고 잘됐을 땐 엄청난 이득이 된다면 일단 찔러 보는 것 말이야. 그래서 한번 해 본 거지. 그래, 자네 이름이 그냥 지크라지?”
“그래.”
울텔은 말없이 지크를 쳐다봤다. 마치 지크란 자가 어떤 이인지 파악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가 남자조차 빠질 만큼 잘생긴 건 알지만, 그렇다고 그런 낯 뜨거운 시선을 보내면 많이 곤란한데.”
“뻔뻔하고 낯짝이 두껍다. 역시 넌 그 녀석이 확실해.”
그 녀석. 분명 힘의 마왕 지크 모어를 일컬음이라. 지크도 쉽게 눈치챘다.
“하지만 그 녀석이라면 절대로 저런 무리와 다니진 않지.”
울텔의 시선이 지크의 일행을 훑었다.
“어라? 내 동료들을 모욕해?”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그딴 거 몰라.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지는데. 뭘 하든 일단 대가리부터 깨고 시작할까.”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루벨라가 화색이 만연한 채로 지크의 옆으로 달려왔다. 그녀가 살벌한 눈초리로 눈앞의 적들을 노려봤다.
방에는 울텔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로브를 둘러쓴 무리들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그 수는 대략 스물.
“로브 놈들이로군.”
지금껏 보여 온 가벼운 모습은 사라지고 윌위스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틸도 마찬가지. 그들의 가족을 악의 구렁텅이로 처박은 이들이 저기 있었다.
“아, 윌위스 드웨인. 아들에 대한 원한이 깊은가 보지?”
“물론이지. 너는 물론 네가 이끌고 있는 조직을 말단의 말단까지 전부 불태워 버릴 정도로는 말이야.”
“확실히 네 분노는 정당하다. 그건 인정해 주지. 하지만 우리가 네 아들을 꾀지 않았다고 해도 그리 좋은 미래가 펼쳐지진 않았을 거다.”
“…무슨 소리냐.”
“애초에 네 가족이 겪고 있던 갈등의 원인은 전부 너 때문이 아니었던가. 내 장담하지. 우리가 네 아들을 꾀지 않았다면 네 아들은 결국 아무런 말도 없이 네 곁에서 사라졌을 거다. 모든 걸 버리고 말이야. 네가 그 이후 얼마나 참회를 하고 후회를 한들, 아들이 너, 아니 너희 가족 곁에 돌아오는 일은 절대 없었을 거다.”
“마치 미래라도 보고 온 것처럼 말하는군.”
“비슷하지.”
울텔의 확신에 찬 어조에 윌위스의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나? 뭘 어떻게 하면 믿어줄까. 위대한 밸르의 이름이라도 걸까?”
“흥! 그깟 악신의 이름 따위에 얼마나 가치가 있다고. 설령 네 말이 맞는다고 해도 결국 오지 않은 미래야. 남은 진실은 너희가 올랜드를 꾀어서 녀석이 나와 마탑 전체에 반기를 들도록 했다는 것뿐이지.”
“과연 윌위스 드웨인. 냉철하기 이를 데 없군.”
“그 정도로 날 흔들 수 있을 성싶었더냐.”
“별로 그럴 생각은 없었어.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 그 증거로 틸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지 않는가. 그는 우리의 간섭으로 동료를 잃은 게 확실하니까.”
“정말로 뻔뻔하군.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밸리드의 교황 노릇을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렇지. 너도 마탑주로서 긴 시간을 보내왔으니 알 것 아닌가. 위에 선다는 건 그런 것이라는 걸.”
“그것도 이제 곧 끝날 테지만.”
윌위스가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당장이라도 울텔의 얼굴에 불덩이를 집어 던질 것 같다.
하지만 울텔이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당장이라도 날 불사르고 싶은 건 알겠지만 잠시만 기다려주게. 지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
울텔의 시선이 지크에게 향했다.
“어떤가, 지크.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잠시 담소라도 나누지 않겠나? 자네에게 궁금한 점이 참 많아. 내 그를 위해 만찬도 차려놨네.”
울텔이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또 다른 계단이 존재했다. 아무래도 이곳이 꼭대기가 아닌 모양이었다.
“아, 참고로 내가 용건이 있는 건 지크뿐이야. 다른 이들은 잠시 여기서 대기를 해줬으면 싶군.”
“지크 혼자 데리고 가겠다고? 우리랑 떼어 놓으려는 속셈 아니야?”
“호수의 일족의 공주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 자네의 의견은 지극히 당연하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어. 진실로 난 자네들을 손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한데 인질을 잡다니. 그런 쓸데없는 일을 왜 하겠나. 참고로 그림자와 골렘들이 더 이상 자네들을 쫓지 않는 이유도 내가 막고 있기 때문일세. 그 정도면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한다만. 원한다면 밸르의 이름으로 지크의 안전을 보장할 수도 있네.”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그토록 가볍게 걸어대다니. 역시 벌레들은 어쩔 수 없네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은데 어쩌겠나, 카르위먼의 성녀여. 그리고 자네의 의견은 어디까지나 카르위먼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 아니겠나. 우리 서로의 교리에 관해서는 존중하는 게 어떻겠나.”
“뚫린 입이라고 잘도…!”
서로의 교리를 존중하자니. 최악의 사교로 이름 높은 밸리드의 교황이 할 소리던가.
그러나 울텔은 루벨라의 분노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의 시선은 계속 지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쩔 텐가, 지크 군.”
윌위스가 지크의 의향을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지크에게 쏠렸다.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한번 이야기를 해보죠.”
“위험할 수 있습니다.”
틸이 지크를 만류했다.
“저들 신의 이름까지 걸었으니 적어도 지키는 시늉은 하겠죠. 게다가 고작 혼자 떨어졌다고 맥없이 당할 제가 아닙니다.”
그건 그랬다. 지크의 힘을 가까이서 보아온 그들 일행은 지크가 당하는 모습을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모두의 시선이 방금 말을 한 자에게 쏠렸다. 울텔과의 대화를 끝끝내 반대할 것 같은 이가 가장 먼저 찬성표를 던진 것이었다.
루벨라였다.
“응? 왜 그렇게 보시나요?”
“저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레오나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루벨라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지크 님이 결정을 하신 거잖아요? 제가 반대를 할 리 없죠.”
지크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무척 긍정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오히려 지크의 판단을 우회해 비판하는 것일까.
하지만 루벨라의 담담한 표정을 보면 적어도 후자는 절대 아닌 것 같았다.
가장 반대할 것 같던 루벨라가 찬성을 하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따라오게나. 무장 같은 걸 해제할 필요는 없네.”
“당연한 소리를.”
지크는 울텔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루벨라가 지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세요! 전 소일거리나 하고 있을게요!”
소일거리라는 말에 거의 울텔의 근처에 도착해 있던 지크가 고개를 돌렸다. 울텔의 시선도 루벨라를 향했다.
루벨라가 마법 상자에서 커다란 자루 하나를 꺼내는 게 보였다. 그 안엔 하얀 가루가 잔뜩 들어 있었다.
“…소금인가?”
울텔이 중얼거렸다.
루벨라는 소금을 잔뜩 움켜쥔 채 사방으로 뿌려댔다. 한 번 뿌릴 때마다 짧게 하는 기도는 덤이었다.
그리고 작게 들리는 ‘벌레 놈들의 소굴에 구원을…’이라든가 ‘섬 자체를 통째로 물속에 처박아 주시길…’ 같은 과격한 말들.
울텔이 곁으로 다가온 지크에게 말했다.
“정말로 양심에 걸리는 게 없나?”
“……전혀.”
“그래도 침묵의 시간이 조금은 길어졌군. 다행이네. 자네에게도 양심이란 게 손톱만큼은 남아 있던 모양이야.”
지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루벨라의 모습을 외면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빨리 안내나 해.”
“그러지. 나도 저 꼴을 계속 보고 싶진 않으니.”
그렇게 지크는 울텔의 안내를 받아 위층으로 올라갔다. 울텔의 곁에 있던 로브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지크가 계단을 완전히 올라갈 때까지, 루벨라가 흘리는 저주의 말은 계속 지크의 귓가를 간질였다.
* * *
지크는 위층으로 올라왔다. 울텔의 말처럼 그곳에는 훌륭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앉게. 자네를 위해 차려놓은 것이니 마음껏 먹어도 좋아. 아, 포도주 좋아하나?”
울텔은 식탁에 놓인 포도주 한 병을 잡아 들었다.
지크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질문과 전혀 관계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밸르의 이름으로 내 안전을 보장한다고 했나?”
“그랬지. 원한다면 다시 한번 해 줄 수도 있네만.”
“웃기는군.”
지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밸르의 이름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는 녀석이.”
포도주의 마개를 따던 울텔이 멈칫했다.
그러나 곧, 그는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