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2화
그림자들의 공격은 거셌다.
일단 그 수부터 너무 많았다. 물량의 해일로 일행을 뒤덮어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그것들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위층으로 발을 내딛기도 전에 위층에 있던 녀석들의 공격이 날아온다.
뒤에 남기고 온 그림자들도 ‘자신들의 층을 벗어났으니 쫓아가지 않는다’ 같은 물렁한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은 모양인지 계단을 넘어서도 계속 일행을 쫓아왔다.
완벽히 계단에 포위된 모양새.
다만 그림자 하나하나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지크 일행의 실력은 말 그대로 압도적.
굳이 언제까지 솟아날지도 모르는 놈들에게 힘을 쓸 필요가 없어서 도망치고 있을 뿐이지, 그림자들이 위협이 되어서가 아니다.
그래도 성가신 건 확실했다.
레오나가 일행의 앞으로 달려오던 그림자에게 화살을 쏘아 보냈다. 그림자들이 소멸한 걸 확인한 후 레오나는 메고 있던 화살통을 뜯어 옆으로 내던졌다. 화살통은 비어 있었다.
품속 마법 상자에서 새로운 화살통을 꺼내 둘러 멘 후 다시 화살을 시위에 얹었다.
그리고 쐈다. 그녀의 속사에 망설임은 없었다. 화살이야 마법 상자 안에 많았다.
콰아아앙!
윌위스의 지팡이에서 튀어 나간 불꽃이 한 무더기의 그림자들을 쓸어버린다. 그림자들로 새까맣게 뒤덮였던 방에 공간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림자들은 곧바로 그 공간을 메웠다.
그러나 지크 일행이 다음 층의 계단에 발을 딛기엔 충분한 시간이 생겼다.
다음 층부터는 그림자와 함께 그림자보다 먼저 나왔던 골렘이 섞여 일행을 반겼다.
하지만 고작 그 둘이 연합 좀 했다고 막힐 지크 일행이 아니다. 일행은 여전히 골렘을 때려 부수고 그림자들을 터뜨리며 위로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몇 층이나 올라갔을까. 그들의 앞에 텅 빈 층이 나타났다.
“적이 없습니다.”
“그거 반가운 말이군. 그럼 다 올라온 겐가?”
틸의 말에 윌위스가 반색했다. 하지만 레오나가 그의 기대를 꺾었다.
“설마. 바깥에서 본 탑의 높이를 생각하면 아직 반도 못 올라왔어.”
“젠장, 노인네의 희망을 그렇게 서슴없이 꺾지 말거라.”
“덧없는 희망은 고통일 뿐이야.”
“여기 엘프 현자가 나셨군.”
“네가 철이 없을 뿐 아냐?”
하지만 일행은 계단 앞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어가는 먹이를 발견한 개미 떼처럼 몰려들던 적들이 한 층계를 올라왔다고 완전히 사라졌다?
확연한 이상 반응이다. 그리고 적지에서 나타난 이상 반응은 보통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걸 여기 있는 이들은 알고 있었다.
퍼어엉!
아래 계단에서 격렬한 폭음이 일었다. 에스텔레이드에서 뿜어진 빛에 쫓아오던 그림자들이 쓸려나갔다.
새로 등장한 적은 없지만 이미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던 적들은 아직도 끈질기게 그들에게 따라붙었다.
“여기부턴 제가 앞장서죠.”
후미에 있던 지크가 앞으로 나왔다. 자연스럽게 틸은 지크가 있던 후미로 가 올라오는 그림자들과 골렘들을 상대했다.
“여기엔 뭐가 있는가?”
“함정입니다.”
“이런 곳에 흔한 함정이 있을 것 같진 않고…. 혹 마법 함정인가?”
“네.”
윌위스의 눈에 다시 한번 호기심이 치솟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에 짙은 우울감이 그늘졌다.
“내 확신하건대, 지금 이 순간 세계에서 가장 슬픈 마법사는 나일 걸세.”
“그럼 가겠습니다!”
“이젠 노인네의 푸념에 반응도 해주질 않는군.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하는 게야.”
윌위스의 한탄을 뒤로하고 지크는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 순간, 그들이 있는 공간에서 엄청난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일행의 긴장감이 치솟았다. 특히 마법사인지라 마력의 민감도에 한해서는 지크 다음으로 우수한 윌위스는 방금 전의 곧잘 농담을 던지던 여유는 어디론가 집어던지고 굳은 안색으로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젠장! 정말 연구하고 싶은 것들뿐이군….”
하지만 치솟는 욕구만은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우우웅!
탑 외벽에 흐르는 마력이 자신이 흐르던 길을 벗어나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닥에서는 이미 마법진이 빛을 뿜으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도 화염 마법이다! 조심해라!”
윌위스가 소리를 높이며 지팡이를 흔들었다.
화르르르르륵!
순간 그들이 있는 층이 완전히 불길에 휩싸였다. 바닥에는 불꽃이 흘러 바다처럼 넘실거리고 천장에도 불꽃이 마치 먹구름처럼 뒤덮였다. 게다가 바닥과 천장의 불꽃을 이어 거칠게 회전하는 불꽃의 회오리까지.
하지만 불꽃은 일행을 덮치지 못 했다.
쩌저저적!
윌위스의 지팡이에서 나온 마력이 거대한 얼음의 벽을 만들었다.
퍼어어어엉!
불꽃이 거칠게 얼음의 벽을 들이박았다. 얼음의 표면이 녹으며 점점 균열이 갔다. 윌위스가 또 다른 마법을 사용하려 할 때였다.
빛이 번쩍였다.
콰아아아앙!
충격파가 사방을 휩쓴다. 불꽃도 열기도 윌위스의 얼음벽조차 멀찌감치 밀어낸다. 지크는 멀찌감치 도망친 불꽃을 한 번 훑어보며 에스텔레이드를 어깨에 얹었다.
“뛰죠.”
일행은 재빠르게 다음 계단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놓치지 않으려는 듯 불꽃이 그들을 뒤따라왔지만 너무 늦었다. 불꽃은 지크 일행을 쫓아오던 애꿎은 그림자와 골렘을 신경질적으로 태우더니 곧 가라앉았다.
폭발해 허공에 흩어지듯 사라진 그림자와 녹아내린 골렘의 잔해를 돌아보며 루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탑의 문을 그리 소홀히 만들었는지 알겠네요. 그림자나 골렘, 함정들을 생각하면 웬만한 인간들은 손도 못 쓰고 죽을 거예요.”
* * *
일행은 탑을 더 올라갔다. 함정은 층마다 계속 발동했다.
하지만 지크 일행은 함정들을 모조리 돌파했다. 종종 적들이 재등장하는 층도 있었다. 지크 일행은 그 층도 뚫어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적과 함정의 수준은 높아졌다. 하지만 아직 지크 일행이 고전할 정도의 것들은 나오지 않았다.
“어이구, 드디어 조금은 사람 사는 곳 같은 데가 나왔군.”
윌위스의 말처럼 그들이 도착한 곳은 더 이상 기둥이나 벽 하나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만 이루어진 곳이 아니었다.
계단 앞으로 일직선의 복도가 보인다. 그 양옆으로 여러 통로와 문들이 있었다.
“밸리드 놈들의 생활 공간일까요?”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집을 발견한 것처럼 루벨라가 혐오 가득한 시선으로 문들을 쳐다봤다.
누가 봐도 문 하나하나에 불덩이를 집어 던져 모두 불사르고 싶은 의지가 뚝뚝 떨어지는 눈이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다만 지금은 비어 있겠죠.”
지크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 하나를 발로 찼다.
문이 박살 나며 내부가 그대로 보였다. 약간의 생활감이 있어 보이는 공간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간간이 기습을 할 순 있겠군요. 조심해서 갑시다.”
“알았어요.”
새로운 형태의 층이라고는 해도 적들이 몰려오는 건 똑같았고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 것도 같았다.
게다가 지크의 말처럼 방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기습을 거는 놈들도 있었다.
새롭게 등장한 벽과 기둥도 지크 일행을 방해했다. 맞은편에 보이는 계단으로 쭉 전진하기만 하면 되었던 아래층과는 달리 종종 기둥과 벽이 위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하는 진로를 막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만 벽과 기둥에 관해서만은 지크 일행은 빠르게 해답을 찾았다.
콰아앙!
지크의 주먹에 벽이 산산이 터져 나갔다. 뚫린 벽 뒤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이 벽과 기둥은 뚫리는 모양입니다. 계단의 위치도 같고. 굳이 빙 돌 필요 없이 일직선으로 부수면서 전진하죠.”
지크가 굉장히 상쾌하게 말하며 앞장섰다. 일행들도 이젠 지크의 행동에 익숙해져 무덤덤하게 벽의 잔해를 밟으며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지크와 여행할 때 정상적인 길을 따라간 적이 없지.”
그저 레오나만이 예전에 함께했던 지크와의 여행을 아련히 되새길 뿐이었다.
* * *
쿵! 쿠우웅! 쿵!
“으으으…!”
빛 한 점 들어오지 못하는 어두운 공간.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의자에 묶여 있었다.
온몸에 말라붙은 피와 산발이 된 머리카락. 얼굴은 퉁퉁 부어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다. 하지만 굳이 눈을 뜰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의 시야를 밝혀줄 눈은 두 개 모두 그의 신체에 붙어 있지 않으니까.
귓구멍에서 흐르다 말라붙은 피가 그가 더 이상 소리도 듣지 못한다는 것 또한 나타냈다.
손톱과 발톱도 제자리에 없고 곳곳의 힘줄도 모조리 끊겼다.
누가 봐도 완벽한 폐인의 모습.
그는 그렌 제너드였다.
세계 제일의 영웅의 자리를 노리며 온갖 음모를 꾸미고 세계를 활보하던 그는, 이젠 자신의 몸을 추스르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으어어어…!”
그가 입을 달싹였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 같지만 제대로 된 발음이 나오지 않는다. 잘려 나간 혓바닥을 다시 붙이지 않는 이상, 그가 다시 한번 말을 하게 되는 일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온갖 기관이 망가진 상태였지만, 아직 그의 촉각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은은하게 울리는 진동이 그의 몇 안 남은 감각 기관을 자극했다.
쿠우웅! 쿠우우웅!
울림은 점점 커졌다. 무언가 충돌하는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으어어어어…!”
하지만 그렌의 움직임은 없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는 완전히 논외고 은은히 울리는 진동조차 더 이상 그에게 의미가 없다.
어둠 속에 잠긴 채, 그렌은 계속 짐승 같은 신음 소리만 흘릴 뿐이었다.
* * *
콰아아아앙!
에스텔레이드가 쏘아진 번개를 흩어버렸다. 앞에서 도끼를 휘두르는 골렘을 지크가 발로 걷어찼다.
콰지직!
마력을 품은 지크의 발길질에 골렘은 바로 고철더미로 변해 바닥에 널브러졌다.
앞이 뚫렸다. 다음 층으로 가는 계단이 보인다.
지크는 순식간에 계단을 뛰어올랐다.
이번 층에서 가장 먼저 그를 맞이하는 건 무엇일까. 그림자? 골렘? 그도 아니면 함정?
하지만 그 무엇도 아니었다.
계단을 오른 지크를 맞이한 건 거대한 문이었다. 정교한 음각이 새겨진 그 문은 한눈에 봐도 이곳이 탑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도착했군.’
망설일 것 없다. 지크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문을 발로 뻥 찼다.
콰아아앙!
두 짝의 거대한 문이 안쪽으로 나뒹군다. 지크는 성큼성큼 문 안으로 들어갔다.
“쯧쯧! 하여간 폭력적인 녀석 같으니. 잠그지도 않았으니 조용히 열었으면 그냥 열렸을 것을.”
못마땅해하는 감정이 듬뿍 실린 목소리가 들린다. 지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럼 탑의 문부터 잠가놓지 말든가.”
“그것도 그렇군. 그건 분명 내 잘못이야.”
“뭐, 탑의 문이 열려 있었다고 해도 이 문은 똑같이 걷어찼겠지만.”
“역시 그렇지? 그럼 내가 잘못한 게 아니군.”
“아니, 네 잘못이다.”
“이해가 안 가는군. 문을 잠가놓든 아니든 무조건 문을 부쉈을 거라며? 그럼 내 잘못이 대체 뭐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지크가 드디어 마주친 이를 보며 외쳤다.
“모조리 네 잘못이다, 울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