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1화
탑의 내부는 꽤 넓었다. 격벽 하나 없이 1층은 하나의 커다란 방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맞은편 외벽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기둥 하나 없군.”
윌위스가 중얼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시야가 탁 트여서 보기만 좋은데.”
“이러니까 나이만 먹은 무식한 놈은. 이런 넓은 공간에 기둥 하나 없이 천장을 만들면 붕괴의 가능성이 생기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윌위스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가벼운 물체로 천장을 만든 것도 아니고. 딱 봐도 돌이군. 하긴, 나무를 얇게 깔았다 해도 이 정도 넓이면 단숨에 무너져 내릴 테지. 이 탑, 구조물의 힘만으로 서 있는 건 아니야.”
윌위스는 탑 외벽에 손을 대봤다.
“역시. 마력이 흐르고 있어.”
다른 이들도 윌위스처럼 탑의 외벽에 손을 댔다. 그리고 딱딱하게 안색을 굳혔다.
“어, 어이! 이거….”
레오나가 말을 더듬었다.
탑 외벽에 마력이 흐르는 정도야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애초에 호수에 인공적으로 거센 물결을 만들고 공간을 왜곡해 거대한 섬의 모습을 숨기는 것부터가 경악할 일 아니던가.
문제는 탑의 외벽에 흐르는 마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부수는 건 무리 같습니다.”
외벽을 주먹으로 쿵쿵 치며 틸이 말했다. 그의 주먹엔 은은한 마력이 감돌고 있었지만 탑의 벽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잘도 문을 강제로 열었네요, 지크 님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성녀님. 문엔 마력이 흐르고 있지 않았으니까요.”
“문에만요? 그럼 탑에 이런 막대한 마력이 흐르고 있는 의미가 있나요?”
“마력이 탑의 방어를 위해 흐르는 건 아니란 뜻이겠지.”
“그럼 드웨인 님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네. 하지만 일단 탑의 강도가 강해진 건 사실일세. 탑을 붕괴시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겠군.”
그렇게 말하며 윌위스는 지크를 쳐다봤다.
“어쩐지 저 지크 군이 순순히 탑 안으로 진입을 한다 했네. 생각해보면 탑을 통째로 붕괴시켜 적들을 쓸어버리자 할 작자가 아닌가.”
“그건 그러네요.”
루벨라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하지만 탑을 강화하는 것만은 아닐 걸세. 마력이 굉장히 규칙적으로 흐르고 있어.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분명해.”
“바깥의 급류와 공간 왜곡이 이 탑의 마력 때문일까요?”
“그럴 가능성도 높지. 하지만 그것만도 아닌 것 같으이.”
윌위스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자세한 건 알 수 없네. 아마도 탑 꼭대기에 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아니면….”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크를 쳐다봤다.
“저 음흉한 녀석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알고 계신가요, 지크 님?”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지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위로 올라가면 알게 될 겁니다.”
“저 보라지! 아주 음흉한 놈이야! 저 녀석이 지금껏 해 온 행보가 아니었다면 저 녀석이야말로 세계를 파괴할 마왕이라고 생각했을 게다!”
다른 일행들에게서 긍정의 말이 돌아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정의 말이 나온 것도 아니다. 아니, 그들의 표정을 보면 누가 봐도 후자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크는 낄낄 웃으며 위를 가리켰다.
“그럼 올라가도록 할까요. 세계를 파괴할 마왕이 이끄는 악의 화신님들.”
“우라질!”
그의 뻔뻔한 대답에 윌위스가 투덜거렸다.
* * *
계단은 1층의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상태로 나 있었다. 지크 일행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은 2층에서 끊겼다. 아무래도 모든 층의 계단이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층을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이 각자 따로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 그들이 올라온 계단 맞은편에 새로운 계단이 보였다.
“불편하게도 설계해 놨네.”
레오나가 투덜거렸다.
지크 일행은 다음 계단을 향해 탑의 2층을 가로질렀다. 2층 또한 격벽 같은 것 없이 층 하나가 커다란 방으로 되어 있었다.
“공간 낭비로군.”
마탑을 운영하던 윌위스에게 이 탑의 내부 상태는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2층을 통과한 일행이 3층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쾅!
앞장서 올라가던 틸이 검을 휘둘렀다. 손에 둔중한 충격이 일며 무언가 검에 튕겨 나갔다.
‘뭐지?’
틸은 자신을 공격한 상대를 자세히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상대의 무기질적인 붉은 눈이었다.
매끄러운 금속제 피부와 덩치 큰 틸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그리고 자신의 몸통만큼이나 커다란 대검.
“골렘이로군.”
3층에 올라선 윌위스가 말했다.
“호오! 이것 참, 상당히 완성도 높은 골렘이 아닌가.”
그의 눈에 호기심이 반짝였다.
“보는 것만으로 아는 거야?”
레오나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흘겼다.
“당연하지. 스누위크 마탑의 탑주 자리를 괜히 맡고 있던 게 아니다. 겉모습만 봐도 일정 수준 이상이란 걸 아는 건 어렵지 않지. 그나저나 밸리드가 골렘이라. 그놈들, 이런 재주도 가지고 있었나?”
“이 탑도 골렘도 녀석들의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고대 문명의 유산이죠.”
“고대 문명의 유산!”
지크의 대답에 윌위스가 손뼉을 짝 쳤다.
“그거 흥미롭군! 혹시 가능하다면 저 녀석을 손상 없이….”
“싫어.”
너무도 칼 같은 거절. 윌위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레오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토라진 듯 고개를 휙 돌리고 있었다.
“너무 단칼에 거절하는 것 아니냐.”
“그래도 싫어. 무조건 부술 거야. 특히 핵은 박살 낼 거야.”
“골렘은 핵이 있어야 제대로 연구를…!”
윌위스가 여러 논거를 대며 항의를 했지만 레오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크는 그녀를 물끄러미 봤다.
‘예전 일 때문인가?’
윕스 미다스의 일을 처리할 때, 어떤 유적에 들어간 지크 일행은 지금과 똑같이 골렘을 만났었다. 그리고 그때 레오나는 전투에 끼지 못했다.
지금 윌위스가 주장하는 바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골렘을 온전히, 특히 핵의 손상 없이 포획하기 위해서.
몸이 부서지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데다가 강력한 마법 방어력을 지니고 있는 골렘을 상대로 레오나의 전략은 당연히 핵을 노리는 것이었으니.
그렇다고 다른 부위를 노리기에 점의 공격인 화살은 아무래도 다른 이들의 공격보다 효과가 떨어졌다. 마법도 마찬가지.
차이점이라면 그때 요구한 건 라일라였고, 지금 요구하는 건 윌위스라는 것뿐이었다.
당시 전투에서 뒷전으로 밀려난 레오나는 상당히 풀이 죽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쨌든 난 무조건 핵을 쏠 거야!”
레오나가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강대한 마력이 화살에 집중됐다. 레오나의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콰지직!
단단한 몸통, 아무리 살펴도 최소 미스릴 이상의 단단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골렘의 몸에 너무도 쉽게 구멍이 났다.
“아아앗!”
윌위스가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지만 레오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퍼억! 퍼억! 퍼억! 퍼억!
순식간에 장대비 같은 화살 세례에 골렘의 몸체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화살 중 하나가 골렘의 몸통 중앙을 정통으로 꿰뚫었을 때였다.
쿠웅!
마치 끈 떨어진 인형처럼 골렘이 쓰러졌다.
“핵은 몸통 중앙에 있어!”
해맑게 말하는 레오나에 뭐라 말도 못 하고, 윌위스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 * *
골렘을 한 기 쓰러뜨렸지만 일행을 막아서는 건 그 한 기만이 아니었다.
여러 대의 골렘이 더 나타나 지크 일행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이미 약점인 핵의 위치까지 특정당한 골렘이 지크 일행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콰드드득!
틸의 육중한 검에 상체의 절반이 쪼개진 골렘이 쓰러진다. 그걸 마지막으로 3층에서 나온 골렘은 모두 사라졌다.
“으으으음!”
핵이 모두 부서진 골렘의 파편을 보고 윌위스가 신음 소리를 냈다. 못마땅함이 잔뜩 묻어나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는, 윌위스에게 안타깝게도 아무도 없었다.
“자, 올라가자!”
윌위스와는 정반대로 산뜻한 웃음을 걸친 레오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쌓였던 울분을 모조리 풀어낸 듯 그녀의 미소는 정말로 깨끗했다.
“이것들이 지크 님께서 말씀하셨던, 탑에 흐르는 마력의 쓰임새인가요?”
“그렇습니다, 성녀님.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올라갈수록 더욱 강력한 적들이 등장하고 많은 함정들이 도사릴 겁니다.”
“그것들도 탑의 마력을 이용한 것들이겠죠?”
“그렇습니다.”
루벨라가 계단을 쳐다봤다.
“위험이라면 이미 예상했던 일이죠. 어서 올라가 벌레들의 우두머리를 짓밟죠. 밸리드의 교황은 당연히 가장 위층에 있겠죠?”
“아마 그럴 겁니다.”
“땅바닥에서 기어 다니다 벌레처럼 짓밟혀야 할 놈들이 저렇게 높은 탑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본다는 게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어서 가서 주제 파악 못하는 놈의 몸을 제 수준에 걸맞은 수준까지 떨어뜨려 주죠.”
레오나는 슬쩍 윌위스의 곁에 다가갔다. 그리고 속삭였다.
“어떻게 보면 지크보다 루벨라가 더 과격한 것 같지 않아?”
“으으으으음!”
윌위스는 또 다른 신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지크 일행은 계속해서 탑을 올랐다. 그들의 앞을 막는 적들의 수준은 점점 더 높아져 갔다.
일단 골렘들이 더욱 튼튼해졌다. 핵이 몇 개씩 존재하는 놈들도 나타났고 아예 핵이 없는 놈들조차 나타났다. 전체적인 수준도 올라갔다.
“젠장!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어도!”
윌위스가 파편화된 골렘들의 잔해를 보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아무리 대마법사의 거대한 호기심이라고 해도 작게는 나라 몇 개, 크게는 세계가 위험한 이 시기에 호기심을 앞세우진 못했다. 마음속으로 거친 피눈물을 흘려대며 윌위스는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지크 일행은 탑에 입장한 후 처음으로 골렘이 아닌 다른 적들과 조우했다.
“지크, 이 녀석들!”
“그래. 예전에 만난 그림자들이다.”
비올루윈의 유적에서 만났던 그림자들이 한 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본 적 있는 것들인가?”
“예전에요. 팔을 여러 형태로 변형시켜 공격하는 놈들입니다.”
“공략법은?”
“그냥 때려눕히면 됩니다.”
“알기 쉽군.”
윌위스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탑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엄연한 실내다. 게다가 윌위스의 마법은 화력이 무척 강한 편이기도 하다. 순식간에 그들 층의 절반이 화염에 휩쓸렸다.
그림자들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탑의 외벽에는 작은 그을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정말로 단단하기 짝이 없군.”
아무리 엄청난 마력으로 보호받고 있다지만 자신의 마법에 흠집도 나지 않았다는 것이 상당히 자존심에 손상을 준 것인지 윌위스가 투덜거렸다.
“갑시다!”
지크가 앞장서며 일행을 독촉했다.
“그렇게 급하게 움직일 필요 있는가? 내가 적어도 절반을 쓸어버렸는….”
윌위스의 말은,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에서 다시 일어서고 있는 그림자들을 보고 끊겼다.
“…지크 님의 말을 따르는 게 좋아 보이지 않나요?”
“과연 카르위먼의 성녀. 좋은 판단력일세.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야.”
“헛소리 하지 말고 뛰어!”
레오나가 화살을 쏟아내며 외쳤다.
틸이 거검을 휘두르며 다가오는 그림자들을 베어 넘기고 레오나가 화살로 멀리 있는 그림자들을 쓰러뜨린다. 윌위스와 루벨라는 그 둘을 따라 황급히 내달렸다. 지크는 후미에서 그림자들이 추격하는 걸 막았다.
계속 충원되며 물밀듯 쏟아지는 그림자들이었지만 윌위스의 공격으로 상당한 숫자가 제거된 덕에 지크 일행은 상당히 수월하게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