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8화
지크는 자신이 모은 이들을 살폈다.
파티의 가장 앞에서 지크 자신과 함께 몰려드는 적들을 막아낼 틸.
후방에서 화살과 마법으로 적의 견제 및 저격을 할 레오나.
역시 후방에서 거대한 한 방으로 적들을 통째로 날려버릴 윌위스.
거기에 여러 가지 성법으로 아군을 지원하고 치료할 루벨라까지.
하나의 파티로서 퍽 이상적인 구성. 안정성만큼은 회귀를 한 후 지금까지 지크가 이끌던 일행보다도 한층 더 앞섰다.
지크는 은근슬쩍 에스텔레이드를 쓰다듬었다.
‘지크 브레이브의 파티라….’
절대로 지크 브레이브와 자신이 동일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지크다.
하지만 여러 조건을 대조한 바, 지크는 눈앞의 사람들이 이번 작전에서 가장 효율적인 사람들이라고 확신했다.
하나하나가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구성 또한 환상적.
거기에 라일라가 보내준 기억으로 브레이브가 이들과 어떻게 싸웠는지도 대략 알게 됐다.
단순한 정보일 뿐이었지만 지크는 충분히 그 기억들을 토대로 이 파티를 만족스럽게 다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네 사람의 눈이 지크를 향한다. 모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지크를 리더로 생각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마음의 준비는 됐습니까?”
지크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일명 수줍음 많은 거한인 틸이었다.
평소 공적인 일이 아니라면 입을 잘 열지 않는 그이지만, 지금만큼은 그의 혀가 매끄럽게 돌아갔다.
“개자식들을 죽일 준비라면 충분합니다.”
그의 눈에 불과 같은 분노와 증오가 넘실거렸다.
그들이 지크의 파티에 참가한 이유는 지크에 대한 친분과 더불어 세계의 대적인 밸리드를 토벌한다는 명분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들이 최근 겪은 끔찍한 일을 조종한 자가 바로 밸리드의 교황이라는 지크의 폭로였다.
틸은 친구였던 닉을 잃었다. 물론 그는 그의 친구가 스스로 멍청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구의 옆에서 그 멍청한 선택을 하도록 바람을 넣은 세력을 용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레오나가 평소의 명랑한 목소리와는 달리 스산한 어조로 내뱉었다.
“적어도 그놈의 미간에 화살을 박아 넣지 않는다면 분이 풀리지 않을 거야.”
아드로원 대수림을 휘감았던 엘프들의 전쟁. 그리고 그 원인인 철의 일족.
물론 그 전쟁에 울텔의 영향력은 적었다. 철의 일족은 로브들을 배신한 후 독자적으로 다른 엘프들 위에 군림하려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로브들이 철의 일족을 충동질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이 철의 일족에게 다른 엘프 일족을 지배시키려 했다는 것 또한.
지크의 폭로를 들은 엘프들은 머무르던 비올사를 떠나 다시 연합군에 합류했다. 그리고 레오나는 지크의 제안을 받고 이 파티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일족의 공주인 레오나가 따로 떨어진다는 말에 엘프들 안에서 상당한 반발이 나왔지만, 레오나는 어떻게든 허락을 받아냈다.
“흘흘! 말들을 들어보니 자네들도 그놈들에게 상당히 당한 게 많은 모양이로군. 정말로 죄 많은 놈들이지 않은가.”
윌위스는 가볍게 웃었다. 그는 울텔과 그 수하들에 대한 원한이 사그라진 것일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렇기에 불태울 가치가 있는 거겠지. 겸사겸사 최대한 끔찍한 고통을 주면서 말이야.”
깊게 쌓인 연륜에 분노를 밖으로 뿜어내지 않을 뿐이다. 그의 분노는 몸 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숙성되고 있었다.
그는 아들을 잃었다.
윌위스는 아들인 올랜드가 무척이나 어리석은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들을 어리석게 만든 건 자신의 실책 탓이며, 그것이 커다란 잘못이라고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것, 이건 이것이다.
실질적으로 아들을 부추겨 타락시킨 이를, 윌위스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남은 사람은 하나. 모두의 시선이 루벨라를 향했다.
“음, 저도 확실히 저들에 의해 마녀로 몰린 경험이 있긴 하지만요.”
루벨라는 방긋 웃었다.
“카르위먼의 성녀가 밸리드 교황을 때려죽이러 가는데 별다른 이유가 필요할까요?”
그건 그렇다. 밸리드에게 별달리 당한 게 없더라도 밸리드의 교황을 죽일 기회가 생긴다면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이가 바로 카르위먼의 성녀란 존재다.
증오를 내뿜던 세 명이 루벨라의 너무도 지당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마음의 준비는 끝난 것 같군요. 그럼 가죠. 저 빌어먹을 놈들에게 온당한 죄를 물으러 말이죠.”
지크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틸이, 레오나가, 윌위스가, 루벨라가 그 뒤를 따랐다.
밸리드의 총단을 습격하고 저들의 머리를 모조리 잘라내기 위한 파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지크 일행은 국경을 넘었다.
남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깊은 산이나 숲속을 주 경로로 이용했다.
단련된 육체와 체력을 가진 지크나 틸, 엘프인 레오나는 괜찮았지만 윌위스와 루벨라가 문제였다.
지크를 만난 이후 어느 정도 체력관리를 한 루벨라다.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극복하기에는 그들이 걷고 있는 지형이 너무 험했다. 마법사인 데다가 나이도 많이 든 윌위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이 힘든 기색을 보이면 보통 지크와 틸이 그들을 업고 나아갔다.
그들이 걷는 길이 편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여정도 길어졌다. 그들이 출발한 전장에서 총단이 있는 호수까지 일직선으로 산이나 숲이 존재하는 건 아니기에 어느 정도 길을 돌아가는 것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행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작게는 복수를 위해 크게는 이 세계의 미래를 위해 그들은 묵묵히 힘들고 불편한 것을 감수했다.
그렇게 총단을 향한 지 얼마나 됐을까.
슬슬 하늘 저편이 붉은색으로 변하고 아릿한 어둠이 태양을 쫓아내기 위해 달릴 시간.
지크 일행은 한 산의 꼭대기에서 저 너머를 보고 있었다.
저 멀리 파랗게 펼쳐진 호수가 보인다. 그들이 서 있는 지대가 무척 높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규모.
정보가 없다면 딱 바다라고 착각하기 좋은 곳이었다.
“저기가 그곳이로군요.”
루벨라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호수를 쳐다봤다.
카르위먼의 최대 숙적이자 세계에 기생하는 기생충.
생산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해악밖에 없는 쓰레기들.
밸리드의 총단이 있는 곳.
그렇게 생각하니 평화로운 파란 호수가 악취를 가득 뿜어내는 오물의 향연으로 보였다.
“우와! 저게 정말로 호수야?”
레오나는 루벨라만큼 밸리드에 대한 증오가 뿌리 깊지 않아 그런지 미로텔 호수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다.
“우리 호수도 크다고 생각했는데, 여기는 정말로 상상 이상이네!”
호수의 일족 출신의 엘프인 만큼 호수라는 지형에 익숙한 레오나였지만, 미로텔 호수의 크기는 그녀의 익숙함을 송두리째 박살 냈다.
“쯧쯧! 이러니 경험 적은 미숙한 것들이란….”
“뭐야?”
윌위스의 빈정거림에 레오나가 씩씩댔다.
“지금껏 지크나 틸에게 업혀온 허약해 빠진 마법사가 뭐라는 거야!”
“사람마다 할 수 있는 건 다른 법이지. 그것조차 생각하지 않고 편견에 빠져 사람을 제멋대로 판단하다니. 인성이 보이는구나.”
“방금 미숙 운운한 녀석이 할 말이야?”
“현실과 편견은 제법 다른 말이지.”
윌위스와 레오나는 다시 투덕거렸다. 이미 익숙해진 일행은 둘의 다툼을 그냥 놔뒀다.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제풀에 지쳐서 곧 그만둘 것이다.
“…….”
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을 보면 호수의 모습에 상당한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아이들을 데리고 나중에 여행을 올 계획을 짜고 있지 않을까.
짝!
지크는 박수를 한 번 쳐 사람들의 주목을 모았다.
“보시는 대로 목적지는 눈앞입니다. 아마 내일은 호수에 닿을 수 있겠죠.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산중턱까지 내려가 야영을 하고 아침 일찍 떠납시다.”
지크는 호수를 한번 바라보더니 곧 산과 호수 사이에 있는 평야지대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순찰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언데드와 몬스터들이 두셋씩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산과 숲을 방패 삼아 움직이는 것도 여기까지입니다. 내일부터는 전투를 해야겠죠.”
물론 왕국에서 출발해 지금껏 전투를 한 번도 치르지 않은 건 아니다.
깊은 산속에 있는 야생 몬스터들과 조우할 때도 있었고, 종종 숲과 산이 끊겨 있는 곳을 지날 때 그들을 발견한 밸리드 놈들과의 소규모 전투도 있었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총단 바로 앞에서 순찰병들이 죽어 나가는 걸 밸리드 놈들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까.
“오늘은 푹 쉽시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미친 듯 내달립시다. 그 빌어먹을 밸리드 두목의 멱을 딸 때까지 말이죠.”
일행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 *
꾸어어어어!
몬스터 한 마리가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돌격한다.
그 어떤 기술도 없는, 그저 순수한 육탄 돌격이었지만 몬스터의 높은 육체 스펙 덕분에 그 돌격은 훌륭한 공격 수단이 되어 있었다.
몬스터에게 불운한 점은, 그가 달려들고 있는 지크 일행에게 고작 그 정도의 돌격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꽈드드득!
몬스터의 몸에 틸의 검이 작렬했다. 몬스터의 몸이 순식간에 두 동강 났다.
베인 게 아니다. 무식한 힘에 찢기고 뒤틀리고 부서진 것이었다.
쿵!
한 발 내딛은 틸의 발걸음이 묵직한 소리를 냈다. 걸리는 건 언데드고 몬스터고 걸리는 족족 찢어 가르며 그는 앞으로 전진했다.
“한동안 마법은 필요 없겠군.”
피와 내장을 쏟아낸 채 옆에 널브러져 있는 몬스터의 상체를 흘끗 보며 윌위스가 중얼거렸다.
지크도 동의했다.
“고작 저 정도 수준의 언데드나 몬스터 따위가 틸 씨를 이길 수는 없지요.”
“그래도 도와주는 게 낫지 않을까?”
레오나가 화살 하나를 시위에 메긴 채 물었다.
“괜찮습니다. 저 정도로 틸 씨의 체력이 떨어진다거나 할 일은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틸 씨?”
“음!”
짤막하게 대답한 틸은 다시 한번 칼을 휘둘렀다. 다가오던 언데드가 와자작 부서져 내렸다.
“이동하는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는 틸 씨에게 맡기죠.”
만약 그들이 걷는 속도가 조금만 느려졌더라도 지크 또한 틸과 함께 적들을 도륙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아무런 적도 없는 평지를 걷는 것처럼 걷고 있었다.
리더인 지크가 그렇게 결정하자 다른 이들은 별 불만 없이 동의했다.
그렇게 틸이 진로를 방해하는 언데드와 몬스터들을 모조리 박살 내며 걸은 지 얼마나 됐을까.
철썩! 철썩!
그들은 호숫가로 몰려왔다 사라지는 호수의 잔물결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다.
지크는 망설임 없이 호수로 들어갔다. 허리에 반쯤 물이 찰 때까지 걸어 들어간 후 품에서 마법 상자를 꺼내들었다.
허공에서 배가 나타났다.
촤아아아!
배가 호수에 떨어지며 생긴 포말이 부드럽게 호숫가까지 밀려들었다. 지크는 일행을 보며 손가락으로 배를 가리켰다.
“타죠.”
잠시 후, 지크 일행을 태운 배가 호수 표면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