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7화
전투는 정말로 치열했다.
지크가 가장 앞에 서서 밸리드의 주의를 상당 부분 끌어주고 있었지만 결코 연합군이 유리한 건 아니었다.
밸리드의 성기사와 신관, 고위 몬스터 그리고 마인들이 우수한 질로써 연합군의 고위 병력을 상대했고, 일반 몬스터와 언데드들은 그 숫자로 연합군을 찍어 누르려 했다.
물론 연합군도 잘 버텨냈다. 기사, 마법사, 성기사들과 신관들이 엄청난 공격을 퍼부으며 달려드는 밸리드의 군세를 압박했다.
병사들도 진채를 방패 삼아 몬스터와 언데드들을 막아냈다.
두 세력 모두 최선을 다해 상대를 짓누르려 노력했다.
상황은 백중세. 당장 어느 쪽이 밀고 어느 쪽이 밀려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콰아앙!
“크아아아악!”
또 다른 마인 하나가 지크의 공격을 받고 부상을 입은 채 허겁지겁 물러났다.
지크는 바로 그를 쫓았다. 옆에서 다른 마인들이 지크의 발목을 잡으려 들었다. 그리고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고위 몬스터가 상처 입은 마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드드득!
고위 몬스터라고 해도 지크에겐 그다지 위협이 되는 놈이 아니다. 감히 자신의 목적을 방해한 몬스터를 지크는 깔끔하게 도륙했다.
하지만 그 틈을 타 마인 놈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콰아앙!
마인 한 놈이 지크의 등을 공격했다. 손쉽게 공격을 막은 지크가 검을 들지 않은 손을 뒤쪽으로 뻗었다.
“커헉!”
마인의 목줄기가 지크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마인은 다급한 몸놀림으로 지크를 공격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지크가 한발 빨랐다.
뚜둑!
섬뜩한 소리와 함께 마인의 목이 그대로 부러졌다. 방금 전까지 민첩하게 움직이던 마인의 몸이 축 늘어졌다.
또 하나의 마인이 지크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적은 아직도 많았다.
-꾸아아아악!
위에서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린다. 거대한 비행형 몬스터가 지크를 향해 내리 꽂히고 있었다.
후웅! 후웅!
양옆에서는 다른 마인과 몬스터가 지크를 공격했다. 지크에게 치명상을 입히겠다는 의도보다는 움직임을 제약해 몬스터의 공격에 노출시키려는 모양새였다.
우우우웅!
지크의 검이 거세게 울었다.
콰아아앙!
거대한 검기가 지크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쏘아졌다. 주변에 있던 마인들이 급히 움직여 몬스터들의 뒤로 숨었다.
끄아아악!
쿠에에엑!
몬스터들이 지크의 검기에 난도질당하며 크게 울부짖었다.
대부분의 몬스터가 즉사했고, 살아남은 놈들도 땅에 널브러진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오래 사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쿠우웅!
하늘에서 지크를 공격하던 몬스터도 지면에 처박혔다. 혀를 길게 빼문 그 몬스터는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하지만 마인들은 모두 살아남았다.
마인들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죽어 나자빠진 몬스터들의 빈자리도 새로운 몬스터들이 몰려들어 채웠다.
마인들의 전술은 간단했다. 자신들은 오로지 공격만 하고, 지크의 공격은 모조리 주변에 있는 고위 몬스터들에게 떠넘기는 것.
방어를 생각하지 않는 마인들의 파상 공세는 분명 위협적이었다. 거기에 간간이 날아드는 고위 몬스터들의 공격도 그랬다.
하지만 지크는 정말로 안정적으로 그들의 공격을 받아냈다. 주변에 고위 몬스터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지만 지크에게는 이렇다 할 상처조차 없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뿌우우우우우!
밸리드의 진형 쪽에서 커다란 신호가 울려 퍼졌다.
지금껏 연합군에게 미친 듯 달려들던 밸리드의 공격이 주춤했다.
그들이 차례로 물러가기 시작했다. 지크와 싸우던 마인들도 마찬가지. 그들도 지크와의 싸움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당연히 지크는 그들을 고이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연합군도 마찬가지. 후퇴하는 밸리드군에게 피해를 주려 들었다.
그러나 밸리드군은 연합군에게 몬스터를 돌진시켰다. 지크에게도 고위 몬스터 수십 마리가 달라붙었다.
그것들에게 목숨을 아낀다는 개념은 없었다. 사지가 날아가고 몸통이 갈라지며 심장이 박살 나도 몸을 던져 지크의 발목을 붙들었다.
쿠웅!
마지막 몬스터가 쓰러졌다.
하지만 지크를 공격하던 마인은 이미 몸을 뺀 상태였다. 연합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돌진한 몬스터를 모조리 격살했을 때는 밸리드의 군이 자신들의 진영으로 모두 귀환해 있는 상태였다.
결국 연합군도 일단 물러나 전력을 추스를 수밖에 없었다. 경계를 철저히 하고, 부상당한 자들을 후방으로 후송하며 요새와 진채의 무너진 부분을 손본다.
그렇게 연합군과 밸리드의 첫 전투는 막을 내렸다.
* * *
두 세력의 충돌은 몇 번을 거듭해 일어났다.
공격해 들어오는 건 언제나 밸리드 쪽이었다. 연합군은 요새와 진채를 끼고 밸리드를 격퇴하는 데 주력했다.
워낙에 많은 인원과 능력자들이 충돌하다 보니 사상자가 넘쳐 났다.
연합군은 신관들을 최대한 활용해 병력의 소모를 줄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전쟁의 격렬함 때문에 매 전투마다 사망자는 적지 않게 발생했다.
병력의 소모는 밸리드 쪽에서도 발생했다.
하지만 성기사나 신관, 마인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언데드와 몬스터들을 적극 활용한 탓이다. 대신 언데드와 몬스터의 피해가 어마어마하게 발생했다.
하지만 그것들의 피해는 별 상관없다는 듯 밸리드는 계속 언데드와 몬스터를 꾸역꾸역 투입했다.
그들이 그런 전략을 짠 이유는 얼마 안 가 밝혀졌다.
“또 오는군요.”
진채 위에서 밸리드의 진영을 관찰하던 한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밸리드의 진영에 새로운 언데드와 몬스터가 유입되고 있었다.
“녀석들이 점령한 지역만 제국 하나에 왕국 세 개다. 언데드의 재료야 썩어 넘치겠지.”
밸리드는 후방에서 사람들을 죽여 언데드로 충원하고 있는 중이었다.
말 그대로 점령지에 인간들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놈들의 언데드 충원은 계속될 것이었다.
말이야 쉽게 했지만 무척이나 잔혹한 이야기다. 한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몬스터들도 깊은 산속에 수없이 존재할 테니 그놈들을 계속 찾아 끌어다 쓰면 되는 거고.”
현재 밸리드의 전략은 성기사와 신관, 마인들은 아끼면서 계속 충원할 수 있는 언데드와 몬스터들을 사용해 연합군의 소모를 계속 강요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신관들을 통해 사상자의 숫자를 억제한다고 해도 말 그대로 소모품처럼 병력을 계속 갈아버리는 밸리드에 비할 수는 없었다.
“지크 님도 놈들을 쓸어버리는 건 힘드십니까.”
“마인 놈들이 철저하게 내 발목을 붙들고 있으니까. 뭐, 시간만 있다면 차츰차츰 전력을 깎아낼 자신이 없는 건 아니다만, 그러기 전에 연합군이 먼저 전멸할 것 같거든.”
그리고 아군이 없어진 지크를 말 그대로 물량으로 압살해 잡는다. 그게 밸리드의 계획이었다.
분명 제법 괜찮은 계획이다.
실제로 연합군의 상층부도 계속 사상자를 강요하는 밸리드의 전력을 알아채고는 있었지만 뚜렷한 타개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방법이 없는 걸까요?”
“그런 말은 안 했어.”
역시! 한스는 반짝이는 눈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그의 스승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힘과 지혜로 활로를 능숙하게 찾아내 왔다. 지금의 위기라고 다르랴.
한스의 지크에 대한 믿음과 존경과 신뢰가 한층 더 굳어졌다.
“어떤 방법입니까? 아, 혹시 비밀일까요?”
“비밀이라고 할 것까지야. 그저 누구나 생각할 방법이다.”
지크는 모든 일의 흑막인 울텔을 떠올렸다. 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
“저들의 교황이 뒤진다 해도 저 녀석들이 계속 싸울지 어디 한번 보자고.”
* * *
지금은 멸망한 브로드스탁 내부에 위치해 있는 밸리드의 총단.
대부분의 전력이 크로뇽 왕국에 나와 있는 지금, 밸리드 총단의 전력은 줄어 있을 수밖에 없다. 지크는 그렇게 주장하며 밸리드 총단의 기습을 주장했다.
연합군의 지휘부는 처음엔 지크의 제안에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지금도 겨우 밸리드와 백중세를 이루고 있는 형편에 총단의 기습을 위해 전력을 빼게 된다면 당장 이 전장이 밀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무리 밸리드의 주력이 이곳에 모여 있다 하더라도 총단에 어느 정도의 병력이 남아 있는지 알지 못한다.
기습이 실패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지크의 강력한 주장과 전투를 거듭하면 할수록 연합군이 밀리게 될 거라는 현실에 결국 지휘부는 지크의 손을 들어줬다.
그리고 며칠 후.
아직 동도 트지 않은 꼭두새벽에 지크는 연합군 진지 후방에 있는 한 공터에 서 있었다.
지크는 가만히 자신이 차고 있는 검을 매만졌다. 지크의 마력이 검을 살짝 훑자 미미한 빛이 검을 따라 흐른다.
에스텔레이드였다.
『지금은 저보다 지크 님에게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말과 함께 에스텔레이드를 건넨 한스의 권유를 지크는 거절하지 않았다.
지크는 피식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싫어하던 성검을 이젠 손수 허리에 차고 있다니.
세상사 살아 봐야 알게 된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지크가 그렇게 자신의 현 상황에 실소를 흘리고 있을 때였다.
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지크는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지크와 같이 총단을 습격하게 될 동료가 온 모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틸 씨.”
그, 틸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지크의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분들은?”
“아직입니다. 틸 씨가 가장 먼저 오셨어요.”
틸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지크의 곁에 우두커니 섰다.
그의 입은 딱 다물려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 그렇다고 둘이서 한 마디도 않고 어색하게 서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지크가 먼저 틸에게 말을 걸었다. 틸도 짧긴 하지만 대답을 했다.
그렇게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투덕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는 늙은 남성의 목소리. 하나는 앳된 여성의 목소리다.
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여성이 상당히 버릇없는 사람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체는 전혀 달랐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온다. 지크는 다가오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마법사 노인과 활과 화살을 메고 가벼운 경장을 입고 있는 엘프 소녀.
윌위스와 레오나였다.
“오셨습니까.”
지크의 인사에 윌위스가 지크를 쳐다봤다.
“아, 지크 군. 반갑네. 갑작스러운 부탁이지만 이 맹랑한 녀석에게 한 소리 해줄 수 없겠나? 노인을 공경하는 법을 전혀 모르는 녀석이야!”
“그러니까 내가 너보다 훨씬 연상이라고 했지? 아, 지크 안녕!”
레오나가 지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쪼끄만 게 까불고 있어!”
“쪼끄만 건 네 키가 아니더냐!”
두 사람의 입씨름이 길어진다. 지크와 틸은 서로를 바라봤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윌위스와 레오나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둘 사이의 다툼에 끼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몸짓이었다.
둘의 다툼은 한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끝이 있긴 했는지 서로의 얼굴을 외면한 채 몇 걸음 떨어졌다.
지크와 틸은 안도했다. 일단 귀가 따가운 소음은 사라졌다.
“흠흠, 추태를 보였군.”
둘의 모습을 보고 윌위스가 살짝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레오나를 째려보는 걸 보니 그다지 반성을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건 레오나도 마찬가지였다.
“저 영감과 여행이라니. 한숨밖에 안 나오네.”
“누가 할 소리를….”
그렇게 두 사람이 2차전을 할 낌새를 보일 때였다.
“어머, 혹시 제가 제일 늦은 건가요?”
살짝 미소를 지은 채 지크가 모은 마지막 동료인 루벨라가 도착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