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6화
울텔의 세력에 의해 만들어져 세계 곳곳에서 혼란을 불러일으킨 존재들. 강하기도 강하거니와 그 수도 만만치 않다.
아무리 그 힘이 강하다고 해도 일정 숫자 이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국가의 막대한 인원과 물자에 쓸려 나갔을 테니.
솔직히 마인 전원이 적으로 등장했다면 아무리 전성기의 힘을 되찾은 지크라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 정도로 최악은 아니었다. 밸리드 진영에 있는 마인들은 마인 시대에 등장한 마인들에 비해 한참 적었다.
적 마인들은 요하임이나 이블린처럼 클로원 제국의 유산을 통해 강화된 인간들이었다. 울텔이 전력을 늘리기 위해 유산을 부하들에게 제공한 것이다.
하지만 마인 시대에 존재한 마인들 중 제국의 유산으로 탄생한 마인들만 있던 건 아니다.
그 대표 격이 지크가 아니던가.
로브들을 이용해 강자가 될 자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것으로 만들어진 마인들. 당연히 그들은 지금 울텔의 밑에 있지 않았다.
게다가 최상급 마인이었던 뱀파이어나 웨어울프, 위치 등등이 빠졌고 지크가 처리한 마인들도 꽤 많다.
무엇보다 최강, 최악의 마인이었던 3마왕이 빠지지 않았던가.
‘이제 막 마인이 된 놈들도 아직 힘을 전부 다룰 순 없어.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짧지.’
즉, 지금 밸리드 진영에 있는 마인들은 마인 시대의 놈들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놈들이란 뜻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방심할 수는 없다. 아무리 밸리드를 얕봐 각개 격파를 당했다고 해도 브로드스탁 제국군을 무너뜨린 가장 큰 요소는 바로 저 마인들이었다.
‘마지막 문제는 저것들인가.’
지크의 시선이 밸리드 군세의 후방에서 최전방으로 향했다.
몬스터들보다 앞에 서 가장 먼저 연합군을 향해 돌격할 태세를 하고 있는 녀석들이 있었다.
스켈레톤, 좀비, 구울 등등.
이른바 언데드라고 불리는 것들이 어마어마한 숫자를 자랑하며 밸리드 진형 맨 앞쪽에 포진해 있었다.
라일라에게서 전해진 정보에 따르면, 울텔은 점령지 주민들의 생명력을 모조리 빨아내고 그 시체를 언데드로 만들었다. 때문에 정복을 하면 할수록 밸리드의 군세는 계속 늘어났다.
‘다행히 그냥 숫자만 채우는 놈들이긴 한데.’
그 힘은 몬스터보다 약하다. 하지만 숫자라는 폭력은 그 자체로 위험한 법이다. 적어도 칼질을 해 사람의 몸을 벨 수는 있는 녀석들이니까.
녀석들을 본 병사들의 사기도 썩 좋지 않았다.
언데드들이 입고 있는 옷은 적어도 그것들이 얼마 전까지는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란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즉, 병사들도 이번 전쟁에서 죽는다면 그것들과 똑같은 몰골이 되어 부활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저건 부활이 아니다. 지독하리만치 끔찍한 저주였다.
다행히 여러 왕국의 지원과 이름 높은 실력자들의 존재, 무엇보다 명성이 자자한 드래곤 슬레이어 대부분이 연합군에 있다는 사실이 병사들의 사기가 완전히 곤두박질치는 것을 막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연합군의 세력이 밸리드에게 밀리는 순간, 병사들의 사기는 끝 간 데 없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그런 아슬아슬한 상황 속에서, 연합군과 밸리드의 충돌이 일어났다.
역시 먼저 공격을 가한 건 역시 밸리드 쪽이었다.
언데드들이 기괴한 몸짓으로 연합군 쪽으로 몰려든다.
우렁찬 함성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고 노도와 같이 달려오는 것도 아니다.
들리는 소리라곤 턱 뼈끼리 딱, 딱 부딪치는 소리와 지면을 밟는 소리뿐. 진군 속도도 무척이나 느렸다.
그러나 막대한 언데드의 군세가 천천히 다가오는 그 그림만으로도 연합군은 강한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게다가 아무리 상대적으로 느리고 약하다고 하더라도 언데드에게 장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쏴라!”
명령에 따라 연합군 진영에서 화살이 발사됐다. 막대한 화살은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이며 언데드에게 쏟아져 내렸다.
퍼억! 퍽! 퍼어억!
변변한 방어구조차 없는 언데드들은 온몸에 고스란히 화살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데드들에게 그다지 효과가 있진 않았다. 머리가 꿰뚫린 일부를 제외한 언데드들은 몸에 화살을 매단 채 계속 전진했다.
연합군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화살 공격은 몇 번 더 쏟아진 후 사라졌다. 화살도 무한한 건 아닌 것이다.
그 후에 나선 건 카르위먼의 신관들이었다. 그들은 언데드들을 향해 성법을 발동했다.
퍼엉! 퍼엉! 퍼엉!
전장 곳곳에서 빛이 번쩍였다.
과연 언데드에게 신관들의 성법이 특효약이라는 건 확실했다.
화살 따위 방해가 아니라는 듯 전진하던 언데드들은 신관들의 성법에 닿자마자 마른 진흙에 물이 뿌려진 것처럼 잔해가 되어 힘없이 허물어졌다.
하지만 언데드들의 행렬은 정말 끝이 없었다. 신관들이 쏘아낸 빛에 언데드 한 무리가 잔해로 변한다. 하지만 그 잔해를 짓밟고 또 다른 언데드들이 구멍을 채웠다.
밸리드 측의 의도는 너무도 명확했다.
‘언데드들을 던져 신관들의 힘을 빼겠다는 거군.’
어차피 언데드들은 인간들만 있다면 금방 충원할 수 있는 소모품들이다. 소모품을 사용해 신관들의 힘을 뺄 수 있다면 나쁜 이야기가 아니다.
연합군으로서도 신관의 성력을 계속 소모하는 것은 부담이 갔다.
언데드들을 손쉽게 제거할 수 있는 자들이 신관이었지만, 아무래도 신관들의 가장 큰 장점은 치유력에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신관들의 여력을 남길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신관들은 계속 성법을 퍼부었다.
‘언데드들을 상대하는 데 성법이 최고니 어쩔 수 없긴 하지.’
지크는 검을 빼 들었다.
‘슬슬 움직일까.’
다른 이들은 밸리드의 본대가 움직일 때까지 최대한 힘을 아끼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크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드래곤과 동등한 마력량을 가진 그다. 고작해야 조금 빨리 전장에 투입된다고 해서 힘이 모자랄 가능성은, 딱 잘라 없었다.
이미 지휘부에도 말해놓았다. 총사령관은 지크에게 작전상 무제한적인 자유를 부여했다.
툭!
지크는 진채에서 뛰어내렸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지크에게 쏠렸다.
지크는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밸리드 쪽을 향해 걸었다. 그의 발걸음은 퍽 여유로워 보였지만 의외로 빨랐다.
지크와 언데드들 간의 거리가 짧아졌다. 이제 전장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크를 주시했다. 아군도 적군도 모두.
지크가 검을 휘둘렀다. 그의 마력이 검을 따라 허공으로 뿌려졌다.
‘일단 초반엔 크게.’
혼자서 싸운다면 이런 쇼 따위 필요 없지만, 지금은 혼자서 싸우는 게 아니다. 거대한 마력의 파도가 언데드들을 향했다.
콰아아아아앙!
마력이 넓게 퍼지며 주변 모든 것들을 거칠게 들이받았다. 바람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커다란 흙먼지가 인다. 공중에 날린 돌덩이와 흙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크의 앞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그 안에 있던 언데드들은 산산이 박살 나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고작 검을 한 번 휘둘러 만들어낸 흔적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위력.
우아아아아아!
연합군 병사들이 커다랗게 함성을 내질렀다.
아무리 기사나 마법사들이 일반적인 병사들은 범접할 수 없는 초인이라지만, 방금 본 위력이 다른 이들과 궤를 달리한다는 것쯤은 병사들도 쉬이 깨달을 수 있었다.
막대한 언데드들의 진군에 어느 정도 기가 질려 있던 병사들이 바로 사기를 되찾았다.
그렇다. 자신들에게는 그 위대한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함께하고 있다.
아무리 상대가 제국과 왕국들을 연달아 무너뜨린 광신도들이라지만 자신들이 꿀릴 게 무언가.
연합군의 병사들은 무기를 부여잡고 전의를 불태웠다.
몇 번 더 공격을 쏟아부어 언데드들을 날린 지크. 커다란 구덩이가 몇 개 더 생겼다. 그와 함께 언데드의 진영이 뭉텅이로 박살 났다.
‘이 정도면 되려나.’
사기를 올린다는 목적은 달성했다. 지크의 마력의 움직임이 변했다. 더 이상 쓸데없이 커다란 공격을 가할 필요는 없다.
퍼퍼퍼퍼퍼퍼퍼퍽!
둔탁한 소음이 연속으로 들린다. 그 간격이 어찌나 짧던지 얼핏 들으면 하나의 커다란 소리로 들리는 것도 같았다.
털썩! 털썩! 털썩!
지크와 가까이 있던 언데드들이 무릎을 꿇는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날아가 있었다. 지크가 가늘게 쏘아 보낸 마력들이 언데드들의 얼굴만 정확히 가격한 것이다.
마력이 넘쳐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낭비할 필요도 없다.
지크는 전장을 헤집으며 언데드들의 숫자를 줄여갔다. 그에게 평범한 시체를 그저 움직이게 만들었을 뿐인 언데드 따위 발밑을 기어가는 개미만큼이나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계속 언데드 뒤에 위치해 있는 밸리드 본대에 가 있었다.
‘뭐 하냐. 움직여야지.’
지크가 혼자 튀어나간 건 사기를 올리려는 목적과 더불어 밸리드의 본대를 끌어내려는 것도 있었다.
그들이 언데드들을 소모해서 신관들의 여력을 빼려는 짓을 중단시키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신관들의 여력이 충분할 때 대대적으로 붙는 편이 연합군 측으로서는 좋았다.
울텔의 최우선 목표는 지크 자신이다. 자신이 자진해서 나왔으니 밸리드 쪽에선 당연히 반응을 해야 한다.
지크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웃기지도 않은 일도 당연히 없을 터.
‘나한테 시간을 끌어 힘을 뺀다는 전략은 안 통한다는 걸 알 텐데?’
지크 혼자라면 정말로 몇십 일을 괴롭혀 힘을 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지크한테도 아군이 잔뜩 붙어 있다.
‘잡으려면 실력으로 붙어!’
지크의 속마음이 들린 것일까. 밸리드 후방에서 움직임이 생겼다. 고위 몬스터들이 발을 뗐고, 밸리드의 성기사와 신관들이 앞으로 발을 뻗었다.
그리고 마인들.
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걸, 지크는 확실히 느꼈다.
* * *
밸리드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됐다.
가용한 전력을 전부 동원한 그들의 파상 공세는 어마어마했다. 고위 몬스터들이 앞장서고 언데드와 여타 몬스터들이 수로 밀어붙인다. 밸리드의 성기사와 신관들도 연합군에게 강한 압박을 가했다.
당장이라도 연합군을 절멸시키려는 것 같은 밸리드의 공격. 하지만 연합군의 절멸은 밸리드에게 있어 두 번째 목적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이 연합군에 파상 공세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지크를 지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콰아아앙!
지크는 여전히 전장 한복판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에게 마인들이 달라붙었다.
콰아앙!
-끄아아아악!
지크의 검에 거인이 울부짖었다. 단단한 그의 피부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거인은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그의 발에 언데드와 몬스터가 차이고 짓밟혔다.
거인을 물러서게 한 지크의 팔에, 잘 보이지조차 않는 가는 실이 휘감겼다. 마력을 잔뜩 머금은 실은 그 자체로 날카로운 칼날과 같았다.
서걱!
하지만 실은 지크의 피부에 닿지도 못하고 지크의 검에 의해 잘려나갔다.
그 모습을 본 인형사가 눈을 찌푸리며 다시 실을 뻗으려 할 때였다
“읏!”
필사적으로 꺾은 목의 옆으로 날카로운 검기가 지나간다.
인형사는 등허리가 흠뻑 젖는 것을 느꼈다. 급히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 외에 다른 마인들도 지크를 향해 엄청난 공세를 펼쳤다. 웬만큼 고수라고 이름 높은 사람이라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 정도로 마인들의 공격은 살벌했다.
하지만 지크는, 그들의 공격을 모조리 격퇴해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