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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65화 (565/628)

제565화

물론 울텔이 지크를 찾는 이유는 브뤼셀 시스템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두 사람에게 굳이 모든 걸 얘기해 줄 필요는 없다. 지크는 적당히 맞장구쳤다.

“그것 참 억울한 일입니다. 아니, 제가 녀석들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요. 역시 밸리드 놈들은 상종을 못 할 녀석들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밸리드가 상종 못 할 놈들이라는 건 동감이에요. 하지만 놈들이 당한 걸 생각해보면 충분히 지크 님에게 악감정을 가지지 않을까요?”

밸리드의 옹호를 해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자기를 순전히 억울한 피해자일랑 취급하는 지크의 태도도 루벨라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와이그의 표정을 보면 그도 루벨라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럼 지크 님은 크로뇽 왕국으로 가실 겁니까?”

와이그가 화제를 틀었다. 지크는 심통 맞은 표정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그럼 저희도 어떻게 할지 정해야겠군요.”

“지크 님을 따라 크로뇽 왕국을 돕는 게 아닌가요?”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루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와이그에게 물었다.

“녀석들의 주력이 크로뇽 왕국에 집중된다면 본거지인 총단은 텅 비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때 녀석들의 본거지를 노리는 방법도 있죠.”

물론 그렇게 된다면 카르위먼의 도움을 받지 못한 크로뇽 왕국의 피해는 한층 더 커질 것이다.

하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하는 상황도 있는 법이다.

루벨라도 와이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때, 지크가 입을 열었다.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만.”

와이그와 루벨라의 시선이 바로 지크에게 쏠렸다.

“어떻게,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두 사람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지크의 머리를 믿고 손해를 본 적은 단 하나도 없다.

이미 지크의 계책을 듣기도 전에 두 사람은 지크의 계책에 찬성할 생각이 만만이었다.

* * *

밸리드 주력이 자신들을 향해 올 거라는 카르위먼의 정보에 크로뇽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이미 그들에게도 브로드스탁 제국의 멸망은 알려져 있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진 않아 제국의 힘을 직접 겪은 적은 없지만, 그 강대함만큼은 왕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 제국을 단기간에 통째로 삼켜버린 밸리드가 자신들을 향해 오다니. 당연히 왕국은 비상이 걸렸다.

“당장 징병을 해야 합니다! 귀족들에게도 병력을 내놓으라 하고요! 국경의 모든 병력도 불러 올려야 합니다!”

“주변 국가에도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놈들의 움직임을 보면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으로 끝내지 않을 터이니 그들도 지원군을 보내는 데 인색하게 굴진 못할 겁니다.”

“카르위먼에도 요청하죠. 밸리드에 대항한 싸움이니 그들도 거절할 명분은 없을 테죠.”

“굳이 우리나라에서 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브로드스탁 제국과 우리나라 사이엔 다른 나라들도 있는 바, 우리가 그들에게 지원군을 보내는 것이 낫습니다. 어차피 그 나라들도 밸리드의 침략로에 있지 않습니까. 나라가 멸망하는 게 싫다면 우리의 권유를 거절하진 못할 겁니다.”

온갖 의견이 튀어나왔다. 왕국은 그게 현실성이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일단 실행에 옮겼다.

다행히 몇 개는 왕국의 의도대로 됐다.

“요청을 보낸 이웃 왕국들이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그들도 밸리드가 우리나라를 짓밟는 것으로 끝내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군대 또한 순조롭게 모이고 있고 징병도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귀족들도 이번엔 아무 불만 없이 요청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카르위먼에서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일단 보낼 수 있는 성기사와 신관들을 먼저 보내고, 대륙에 흩어져 있는 신관들도 꾸준히 모아 보내준다 했습니다.”

평소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들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만큼 브로드스탁 제국의 멸망은 각국에 커다란 충격을 준 일이었다.

어쨌든 크로뇽 왕국에게는 다행인 상황.

하지만 모든 것이 왕국의 뜻대로 돌아간 것은 또 아니었다.

“올란 왕국이 밸리드의 침입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벌써?”

올란 왕국은 크로뇽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다. 그 나라가 밸리드의 침입을 받고 있다는 뜻은 밸리드가 벌써 크로뇽 왕국의 지척까지 다다랐다는 뜻이었다.

다른 나라에 지원군을 보내 밸리드를 막는다는 전략은 밸리드의 너무도 빠른 진군 속도에 막혀 버렸다.

올란 왕국에 파견하기 위해 올란 왕국과의 국경에 모아놨던 군 병력은 그대로 국경에서 밸리드를 막기 위한 것으로 목적을 바꿔 방어 준비를 시작했다.

벌써 네 개의 나라가 밸리드에 의해 지도에서 지워졌다. 너무도 빠른 밸리드의 진군 속도에 여러 나라들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크로뇽 왕국은 지금까지 무너진 왕국들과는 달리 방어 준비를 완성했다.

다른 왕국들과 카르위먼의 병력들도 차츰차츰 올란 왕국과의 국경에 모여 들었다.

그리고 카르위먼에서 지원 나온 무리 중 하나에, 지크가 있었다.

* * *

크로뇽 왕국은 국경 부근에 설치된 터스티 요새를 중심으로 방어 전략을 구축했다.

올란 왕국은 그렇게 강한 나라가 아니었지만, 브로드스탁 제국이 올란 왕국까지 집어삼키고 크로뇽 왕국까지 그 마수를 뻗어올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터스티 요새는 제법 튼실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꽤 많은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에 우물도 곳곳에 있어 식수가 부족할 일도 없다.

하지만 크로뇽 왕국에 파견된 지원병 수가 꽤 많아 요새 안에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때문에 요새 양옆에 존재하는 언덕으로 진채 두 개가 더 세워졌다.

가까이 있는 산에서 바위를 가져와 나무와 함께 세우니 간이 진채치고는 제법 튼튼한 것들이 완성됐다. 언덕의 높이도 상당해 진채를 함락하려면 상당한 고생과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것이었다.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그런 진채를 짓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초인이나 다를 바 없는 기사들과 성기사들이 앞장서 손수 바위와 목재를 운반하니 진채의 완성은 순식간이었다.

기사들은 물론 귀족들조차 손수 나무와 바위를 메고 진채의 완성에 손을 썼다. 그들이 밸리드의 침공에 얼마나 경각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지크와 그 일행이 도착한 건 진채의 완성이 대부분 끝났을 때 즈음이었다.

지크의 합류를 왕국군은 무척이나 반겼다.

이름 높은 드래곤 슬레이어가 그들에게 찾아 온 것이다. 지크와 같이 싸웠던 이들은 하나같이 지크의 무력을 칭송했다. 당연히 하나의 전력이 아쉬운 크로뇽 왕국으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지크는 대충 왕국군의 사령관과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요새와 진채 사이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나다니고 있다.

아직 밸리드의 모습이 나타나진 않았기에 사람들의 긴장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지크는 요새 왼쪽의 진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쪽에 반가운 얼굴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지크 님!”

요 근래 들어보지 못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지크는 자신을 향해 헐레벌떡 달려오는 이들을 쳐다봤다.

“오랜만이다.”

그들은 한스와 스녹이었다. 지크가 독립시킨 이후 스틸월 백작가에 남은 그들이 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스틸월 백작가도 와 있었군.”

“네. 아무래도 왕국의 위기니까요.”

“스틸월 백작가가 위기일 때는 외면했던 인간들이 참 뻔뻔도 하단 말이야.”

한스는 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크로뇽 왕국에 계속 적을 둬야 하는 이상 참가를 해야 한다는 게 백작님의 뜻이었습니다.”

“그건 그렇지.”

지크는 두 사람과 진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잘 지냈냐?”

“네.”

“백작가에서 만족할 만큼 편의를 봐주고 있습니다.”

쿠!

한스와 스녹은 물론 노웸까지 별 불만은 없어 보였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라라와 엘레나는?”

“진채 안에 있습니다.”

역시 그녀들도 스틸월 백작가를 떠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녀들과 한스, 스녹의 미묘한 거리감을 생각해보면 그녀들이 백작가를 떠날 리는 없었다.

“라라와 엘레나뿐만이 아닙니다. 저번 전쟁에 참여하신 분들 대부분이 진채에 계십니다.”

“그래? 그들에게도 인사를 해야겠군.”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윌위스 드웨인은 손녀인 엘레나가 스틸월 백작령에 있으니 같이 머물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다른 마법사들이야 마탑으로 복귀했겠지만, 그들도 크로뇽 왕국의 국민인 이상 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 동원되는 건 당연했다.

늑대의 송곳니는 스틸월 백작가의 병력으로 흡수된 상태였고.

“엘프들은?”

저번 전쟁이야 예전 지크에게 받은 빚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참전했지만, 이번 전쟁까지 그들이 참전할 이유야 없었다.

아무리 사악한 이교도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엘프들에겐 그저 인간들끼리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아직 돌아가진 않으셨지만 이번 전쟁에까지 끼고 싶진 않다며 백작령에 남으셨습니다.”

“그럼 그들도 끌어들여야겠군.”

“방법이 있으십니까?”

엘프들의 힘은 한스도 잘 알았다. 그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인다면 무척이나 큰 힘이 될 것이다.

“물론.”

철의 일족을 충동질해 엘프 사회에 일대 혼란을 불러일으킨 세력.

그들이 밸리드 놈들이라는 정보를 건넨다면 엘프들이 먼저 전쟁에 참가하려 할 것이었다.

셋은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 걸었다. 문득 지크는 입을 다물고 한스와 스녹을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쿠?

세 쌍의 의문 섞인 시선이 지크를 향한다.

“독립해서 잘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아서 말이다.”

두 사람, 거기에 더해 한 마리는 살짝 쑥스러워했다. 지크는 두 사람의 어깨를 밀며 진채로 올라갔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 전 보이는 훈훈한 모습에 지나가는 바람조차 그 기세를 살짝 누그러뜨렸다.

얼마 후, 밸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지크는 진채에서 요새 쪽을 바라봤다. 적을 확인한 병사들의 수많은 움직임이 보인다.

요 며칠간 크로뇽 왕국군은 굉장히 많은 지원군을 받았다. 이제 그들은 크로뇽 왕국군이라기보다는 연합군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렸다.

단순 머리수를 채울 병사들부터 기사, 마법사 같은 고급 병력. 거기에 카르위먼의 성기사와 신관까지.

가히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군세가 지금 이곳에 모였다.

질도 양도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연합군은 상대가 어느 누구라도 손쉽게 꺾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이라면 자신들이 대륙 최강이라 큰소리치던 브로드스탁 제국군마저 이길 수 있으리라.

그러나 시선을 돌려 적진을 바라보는 순간, 그 무한히 솟아오를 것 같은 자신감은 순식간에 겸손이란 감정을 되찾았다.

밸리드의 진형은 무질서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무질서함을 비웃지 못했다.

그 무질서함을 이루고 있는 존재들이 바로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 군단이었던 것이다.

브로드스탁 제국군과 맞붙을 때는 보이지 않던 고위 몬스터조차 상당한 숫자를 이루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몬스터의 뒤쪽에는 밸리드의 성기사와 신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을 목격한 카르위먼의 눈초리가 대번에 사나워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크가 관심을 두는 건 그 옆쪽에 있는 일단의 무리였다.

‘마인들이군.’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있는, 불길한 기운을 뿌리고 있는 자들을 지크는 유심히 관찰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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