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3화
브로드스탁 제국군은 보무도 당당하게 진군을 했다.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국이라는 평가가 거짓이 아닌 듯 병사들의 사기는 드높았고 움직임에는 절도가 있었다.
그건 병사들의 앞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는 기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갑옷은 그 어떤 공격도 튕겨낼 것처럼 보였고 들고 있는 무기들은 그 어떤 적이라도 도륙할 수 있어 보였다.
군세의 맨 앞. 이 강대한 군세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받은 클라시 후작은 황제에게 받은 총사령관의 증표인 원수봉을 만지작거렸다.
옆에 있던 그의 부관인 라타테 남작이 후작에게 말을 걸었다.
“곧 미로텔 호수에 도착합니다, 총사령관님. 저 언덕 하나만 넘으면 호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음!”
클라시 후작은 원수봉을 휘둘러 자신의 손바닥과 맞부딪쳤다.
“이제 곧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소굴에 멋대로 숨어 살던 벌레들을 처리할 수 있겠군.”
“과연 그렇습니다. 저 벌레들의 악명이 세상에 상당히 떨쳐져 울리고 있으니, 저것들을 처리하면 우리 브로드스탁 제국의 위엄은 더더욱 올라가게 되겠죠. 그리고 세상에 제국의 위엄을 떨치게 만든 후작님을 황제 폐하께선 분명 중히 쓰실 것입니다. 제국에서도 당해낼 사람이 없는 최고의 기사이자 사령관이 후작님 아니십니까.”
강직한 사람이라면 면박을 줄 만큼 노골적인 아부였지만 클라시 후작은 딱히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부가 마음에 든 듯 옅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황제 폐하의 자랑스러운 군대와 자네 같은 능력도 인품도 훌륭한 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물론 제 보잘것없는 능력을 모두 활용해 후작님을 도울 생각입니다만, 후작님의 뛰어난 능력이 없다면 저 같은 놈들이 어찌 능력을 펼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이번 전쟁에서 저와 다른 이들을 훌륭하게 지휘하여 저 가증스러운 밸리드 놈들을 쳐부숴 주십시오.”
“그건 걱정 말게. 황제 폐하의 지엄한 명이 있었으니 저놈들을 모조리 카르나 님 앞으로 보내버릴 걸세.”
클라시 후작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후작님이십니다. 후작님의 뛰어난 능력과 우리 제국의 강대한 병력이 합쳐지면 그 어떤 적이라도 견디지 못할 게 분명합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한데 그런 우리 보고 방어나 하라니!”
라타네 남작의 아부에 여태껏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 있던 클라시 후작이 갑자기 눈을 찌푸렸다.
브로드스탁 제국의 귀족으로서 기분이 나쁘다 못해 모욕적인 요구를 들었던 순간을 떠올린 것이다.
라타네 남작은 후작이 어떤 일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는지 바로 알아챘다.
얼른 후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렵진 않았다. 그도 그 요구를 듣고 기분이 나빠진 건 같았으니까.
“정말로 그렇습니다. 이단 놈들만 처리하다 보니 자신들이 정말로 강한 줄 아는가 봅니다, 카르위먼 놈들은.”
카르위먼이 밸리드의 총단이 미로텔 호수에 있다고 했을 때, 브로드스탁 제국은 경악했다.
그들에게도 밸리드란 존재는 보이는 족족 잡아 죽여야 할 해충들이었다.
한데, 그 해충들의 가장 큰 둥지가 제국의 강역 안에 있다니.
황제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나라 안에 있는 벌레의 둥지를 치우려 들었다.
동시에 카르위먼에게 감사를 표했다.
집 안에 있는 벌레들을 모조리 치워버릴 수 있게 도와준 자들이니 감사는 당연했다.
하지만 다음 이어진 카르위먼의 말은 제국을 격분시켰다.
곧 밸리드의 총공세가 있을 예정이니, 군사적 요충지를 중심으로 방어를 준비하라.
다른 왕국의 도움도 받아야 하며, 자신들도 힘을 써서 돕겠다.
물론 카르위먼의 태도에 무례는 없었다.
그 말을 한 것도 어디까지나 지금 밸리드의 세력은 제국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는 정보에 의한 순수한 조언에 불과했다.
하지만 강군으로서 이름 높은 제국은 그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불쾌한 티를 팍팍 내며 카르위먼의 신관을 쫓아낸 제국은 바로 동원할 수 있는 최정예 병력을 미로텔 호수로 파견했다.
“제 놈들이 밸리드 지부 하나를 박살 낼 때도 온갖 용을 써야 하니 우리 제국도 그럴 줄 안 모양이야. 신전에 처박혀 기도나 하는 것들이 어디 전투를 알고 전쟁을 안다고.”
후작은 소리 높여 카르위먼을 비판했다.
“밸리드의 세력이 미로텔 호수로 모일 거라고? 그렇다면 당연히 그 전에 먼저 쳐야지! 전력이 모이기 전에 들이치는 건 병법의 기본이 아닌가. 한데 적이 세력을 모으는 꼴을 가만히 두고만 보자고?”
“기도하는 것밖에 능력이 없는 것들이니 그 기본적인 것들도 모르는 모양입니다.”
실제로는 모든 병력이 모이지 않았더라도 현재 밸리드 총단의 능력만으로 브로드스탁 제국쯤은 멸망시킬 수 있기 때문에 방어를 위주로 전략을 짜라 조언한 것이었지만, 제국은 그런 가능성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정보를 가져다준 이가 지크 스틸월이라고 했던가?”
“네. 크로뇽 왕국의 변경백인 보르도 스틸월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의절 상태로 성은 쓰지 않고 있다더군요.”
“스틸월 백작가가 왕국의 강철벽이라 불린다지?”
“그렇습니다.”
“촌구석에 붙어 있는 백작가가 갖기에는 오만한 별명이로군.”
“혹시 모르죠. 크로뇽 왕국 같은 얼뜨기 나라에서 만들어진 강철은 우리 제국의 농민이 사용하는 녹슨 쟁기보다 강도가 낮을지도요.”
“아주 설득력 있는 추측이야.”
후작은 껄껄 웃었다.
“그딴 촌구석 왕국의 백작 자제, 그것도 의절당한 인간의 정보를 무슨 예언처럼 떠받드는 걸 보면 카르위먼도 많이 한심해진 것 같아.”
“그자는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고 합니다.”
“그러니 더더욱 그런 게 아닌가. 게다가 드래곤 슬레이어가 됐다지?”
후작은 혀를 찼다.
“무슨 덩치 큰 옛날 도마뱀 하나 잡았다고 그 난리라니. 신화나 전설 속에서야 나라 하나쯤 우습게 잡아먹는 괴물이라지만, 그거야 신화나 전설 속 이야기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만큼 변질되기 쉬운 것도 없어.”
“아무렴요.”
“내가 보기엔 그 드래곤이란 건 커다란 도마뱀에 불과해. 물론 날 수도 있고 불도 뿜을 수 있겠지. 강력한 몬스터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전설에 나오는 드래곤일 순 없어. 정말로 그런 존재라면 말 그대로 나라 하나의 전력을 동원해야 할 테니까. 그 대단한 드래곤을 잡는 데 열댓 명 정도가 동원됐다고 했었나?”
“들어온 정보론 그렇습니다.”
“거 보게. 그게 말이 되나? 나라 하나를 뒤집을 수 있는 몬스터를? 그 열댓 명 중에 혼자서 세계와 싸울 수 있는 놈이라도 있나? 아니면 후일 세계를 뒤집어 버리게 될 인간들이라도? 세계에서도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우연찮게 그곳에 존재하기라도 했나? 아예 그 조건들이 전부 실현됐다고 하지 그래.”
“후작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 드래곤 슬레이어란 이명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 수 있겠습니다.”
“만약 내가 거기에 있었다면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을 것도 없이 나 혼자서 그 드래곤이란 걸 퇴치할 수 있었을 걸세.”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국에서도 최강의 기사인 후작님이 아니십니까.”
단순한 아부가 아니라 남작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제국의 넓은 영토에서 솟아나는 무수한 인재들.
거기에 군을 중시하는 풍조가 더해져 제국에 우수한 기사는 굉장히 많다.
그리고 지금 남작의 곁에 있는 자는 그 많은 제국의 기사 중에서 최강이라 꼽히는 실력자였다.
“후작님이 거기에 계셨다면 드래곤 슬레이어‘들’이란 우스꽝스러운 호칭이 생기진 않았겠죠. 오롯이 유일한 드래곤 슬레이어가 탄생했을 게 분명합니다.”
“내가 보기엔 그 지크 스틸월이란 인간이 수상해. 어쩌면 사기꾼일지도 모르겠어. 헛소문으로 자신의 명성을 드높인 다음 뭔가 이득을 취하려는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니 그 드래곤 슬레이어란 작자들 중 카르위먼의 인물들도 몇 명 끼어 있다 하지 않았나? 설마 카르위먼이 사기꾼과 손을 잡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 있겠습니까.”
지금껏 클라시 후작의 말에 무조건 동의만을 표하던 라타네 남작이 슬쩍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아무리 브로드스탁 제국이 강하고 위대하다 하더라도 카르위먼을 대놓고 적대할 수는 없다.
방금처럼 적당히 씹어대는 거야 허용 가능한 범위지만, 대놓고 카르위먼을 범죄자 취급하는 건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하긴, 그래도 명색이 카르나 님의 신도들인데, 그럴 리가 없겠지.”
후작도 남작의 반응을 이해한 듯 자신의 의견을 철회했다.
“그래도 카르위먼의 행보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사실이네.”
“그건 저도 그렇습니다.”
“밸리드 따위 우리 제국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도록 하지.”
둘은 언덕을 넘었다.
저 멀리 호수가 보인다. 바다로 착각할 것 같은 거대한 호수.
하지만 지금 눈에 띄는 건 그들의 앞에 존재하는 일단의 군세였다.
군대를 이동할 때 정찰병을 활용하여 주변의 정보를 수집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클라시 후작은 기본을 철저히 지켰고 호수 근처, 자신들의 진군로에 일단의 세력이 있다는 정보를 일찌감치 받을 수 있었다.
“저게 밸리드의 군대인가.”
“틀림없습니다.”
곳곳에 휘날리고 있는, 생선 머리를 가진 밸르의 모습이 수놓아진 깃발들이 그 증거였다.
후작은 천천히 밸리드의 군세를 살폈다.
밸리드의 성기사들과 신관들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밸리드의 군세를 대부분 이루고 있는 건 몬스터들이었다.
“정보대로 놈들이 몬스터들을 부리는 모양입니다.”
몬스터를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위험도는 확실히 뛴다.
그러나 후작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그다지 위험한 놈들은 보이지 않는군.”
“부릴 몬스터들을 모으러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정보도 사실인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위험한 몬스터까지 모으기엔 시간이 촉박했던 것 같군요.”
“그것 보게! 역시 적이 세력을 모두 모으기 전에 과감히 움직여 머리를 짓눌러야지. 만약 시간을 끌었다면 훨씬 더 위험한 몬스터들을 맞닥뜨려야 했을 거야!”
후작은 자신의 선택이 매우 옳았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자, 그럼 우리도 전투 준비를 하지.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저놈들을 전부 쓸어버려야 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남작이 커다랗게 소리치며 부대를 정렬시키기 시작했다.
후작은 오연하게 저 멀리 있는 밸리드의 부대를 내려다봤다.
“벌레 새끼들. 오늘로 완전히 박멸을 해주마!”
후작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 * *
카르위먼의 경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단독 공세를 결정한 브로드스탁 제국군이었지만, 그렇다고 카르위먼이 제공한 모든 정보를 거부한 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미로텔 호수로의 진군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르위먼이 제공한 정보는 몇 가지가 있었고, 그중 하나가 바로 마인에 대한 정보였다.
브로드스탁 제국은 이 마인이란 존재를 각각 특수한 능력을 가진 적쯤으로 취급했다.
틀린 인식은 아니었다.
그저 이들에 대한 위험도를 지독히도 오판했을 뿐.
‘대, 대체 저게 뭐냐!’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클라시 후작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