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1화
깊은 숲속.
인적이 보이긴커녕 사람의 발길조차 닿지 못할 만큼 울창한 수림에서 소란이 일었다.
콰아아앙!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며 주변 숲속이 화광으로 뒤덮였다.
벌벌 떨며 아래의 소란을 내려다보고 있던 달과 별의 존재감이 일순간 지워질 정도로 그 폭발의 빛은 거대했다.
화르르르륵!
주변 나무에 불이 붙었다. 원래 습기를 잔뜩 머금은 울창한 숲속은 불이 나기 힘든 환경이다.
작은 불똥 따위 나무들에게 감히 옮겨 붙지 못하고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줄 만한 태울 것을 찾으며 비명을 지르다가 얼마 못 가 사그라들기 일쑤다.
그러나 방금 일어난 폭발의 화염에는 물기 가득한 나무들도 버티지 못 했다.
사방이 불바다다. 뜨거운 온도와 매캐한 연기, 불길한 화광이 서로 미쳐 날뛰며 재앙을 노래한다.
밤중에 곤히 잠을 자다 맞닥뜨린 재난에 야생 동물마저 살길을 찾아 미쳐 날뛰기 시작하며 숲을 휘감은 광기는 더더욱 치솟았다.
콰아아아앙!
다시 한번 폭발이 일었다. 폭발의 충격에 숲 한쪽이 공터로 변했다. 화염이 나무들을 쓰러뜨리고 풀을 불사르며 화재를 더욱 확장시켰다.
폭발은 몇 번이나 더 이어졌다.
휘익!
불의 장막을 뚫고 사람 한 명이 튀어나왔다.
봉두난발을 한 채 온몸에 피 칠갑을 한 그는 정신없이 화광을 뒤로하고는 숲을 내달렸다.
“헉! 헉!”
지쳐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극도의 공포에 짓눌린 것일까.
그의 숨은 무척 가빴다. 매캐한 연기와 뜨거운 열기가 숨 쉬는 걸 방해했지만 의외로 그는 그런 것에는 별 지장을 받지 않는 듯했다.
그는 뒤를 돌아봤다. 눈빛에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보고 싶진 않지만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무언가가 있는 듯,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없다. 보이는 것은 미친 듯이 불타는 화염과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동물들뿐. 그를 두려움에 몰아넣은 그자는 보이지 않았다.
‘주, 죽었나?’
사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여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사내의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급히 상체를 숙여 땅바닥을 뒹굴었다.
후우웅!
그가 있던 자리로 화광을 반사해 붉은색으로 빛나는 검이 지나갔다. 사내의 등허리가 서늘해졌다.
“어쭈? 계속 그딴 식으로 도망 다닐래? 붙기 전의 자신감 넘치던 행동은 어디 갔어! 오랜만에 태울 인간을 발견해서 좋다고 했잖아!”
퍼엉!
검이 사내를 추적하며 마력을 내쏘았다.
피할 수 없다.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사내는 이를 악물고 화염을 발사했다.
콰아아아앙!
또 한 번의 폭발. 사내가 마음먹고 날린 최대의 화력이 다시 한번 숲을 불사른다.
그러나 화염이 위세를 떨치는 것도 어디까지나 만만하기 짝이 없는 말 못 하는 초목들에게나 가능한 것.
파앙!
미미한 폭음이 사내의 귀로 들려 왔다. 뭔가 불길하다고 느낀 사내가 몸을 움직이려 할 때였다.
서걱!
깔끔한 절삭음과 함께 사내의 시야가 이상하게 기울었다. 그것도 잠깐.
쿠웅!
가슴을 깊게 베인 사내의 몸이 허무하게 넘어갔다.
화르르륵!
사내 근처의 불이 바닥의 풀들을 태우며 사내에게 슬금슬금 접근했다.
얼마 안 가 불은 사내의 옷깃에 옮겨붙었다. 그리고 점점 면적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주인마저 불태우려는 것 같은 탐욕스러운 모습.
물론 고작 옷가지에 불이 옮겨붙은 걸로 사람의 신체가 모두 타진 않는다.
사내를 죽인 지크가 옆에 서서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그러다 뭔가가 떠올랐는지 주변에 있는 나무들을 베어냈다. 불이 붙었든 붙지 않았든 상관없었다.
나무들은 모양 좋게 쪼개져 장작으로 변했다. 지크는 장작들을 사내의 위에 가지런히 쌓기 시작했다. 불붙은 장작들의 불꽃이 주변 장작들에 천천히 옮겨붙었다.
사내를 장작으로 뒤덮은 지크는 근처에 있는, 아직 불이 붙지 않은 나뭇가지를 주웠다. 넓은 잎이 풍성하게 달린 가지였다.
그는 장작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풍성한 잎이 달린 가지를 마치 부채처럼 흔들었다. 마력까지 은은히 실어 불꽃을 키웠다. 장작에 불이 빠르게 옮겨붙었다.
곧 불꽃이 장작을 완전히 뒤덮었다.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듯 턱에 손을 대고 장작더미를 내려다보던 지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에 대한 뒤처리를 끝낸 그는 이번엔 주변을 둘러봤다. 사내가 죽었음에도 숲에는 거센 불길이 한창 타오르고 있었다.
‘이 뒤처리도 해야지.’
지크가 검을 들어 올렸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소리와 함께 마력이 숲을 휩쓸었다.
주변 모든 것을 불태우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열렬히 드러내고 있던 화염이 거센 마력의 폭풍에 온몸을 뒤틀었다.
훅!
숲 전체를 불태울 것처럼 기세를 올리던 화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은 건 아직도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내는, 타다 남은 숲의 잔해뿐. 그토록 거칠던 화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아니, 하나 있었다. 한창 사내의 몸을 불태우고 있는 장작의 불꽃.
주변 숲을 휘감던 화재를 통째로 날려버릴 폭풍을 일으켜놓고 딱 장작에 붙은 불꽃만은 남겨 놓은 지크의 실력에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인성에 탄식해야 할지 참 헷갈리는 광경이었다.
지크는 검을 집어넣었다.
‘일단 또 하나.’
그는 마법 상자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다. 쪽지에는 여러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그중 위쪽 몇 개에는 선이 찍찍 그어져 있었다.
지크는 펜을 꺼내 선이 그어져 있는 이름들 바로 아래 있는 이름에 가져다 댔다.
마인 재투성이.
그가 한 번 휩쓸고 간 지역은 모두 재밖에 남지 않는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마인. 능력은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하는 불꽃이다.
하지만 인간을 불태우는 걸 좋아해 미래의 사람들에게 한없이 공포를 가져다 줄 그가 세상에 나타날 일은 사라졌다.
이 이름 모를 깊은 산속에서 지크에게 목숨을 잃고 자신이 일으킨 불꽃에 의해 몸이 불살라져, 미래에 붙을 그의 별명처럼 재투성이로 변해 숲의 일부로 변할 예정이니.
찌익!
지크는 재투성이의 이름을 펜으로 선을 몇 번 그어 지웠다.
‘얼마 안 남았군.’
그 쪽지는 이 시대에 완성되어 있는 몇 안 되는 마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었다.
아직 마인 시대가 오기 전, 아니 만들어지기 전이라 대부분 사회에 대놓고 등장하진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위험성이 떨어지진 않는다.
울텔이 대단위 침공을 일으키기 전 이 마인들을 세상에 풀어 놓아 마인 시대만큼은 아니더라도 혼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는 만큼, 그의 계획을 모조리 방해할 생각 만만인 지크가 마인들을 처단하기 위해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지크 혼자 세계 모든 곳을 뒤지고 다닐 수는 없기에 아직 위험하지 않거나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 놈들은 다른 이들에게 맡겼다.
‘슬슬 이동할까.’
다음 마인을 처리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지크의 신형이 순식간에 숲 저편으로 사라졌다.
지크가 사라진 후, 한참을 불에 타던 재투성이의 몸이 붕괴됐다.
그의 몸에 올려진 장작들 또한 같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불꽃은 그 후로도 한동안 계속 타, 재투성이의 몸은 그의 별명대로 한 줌 재로 변했다.
* * *
지크의 계획에 마인들의 처리만 있는 건 아니었다. 마인들이야 제멋대로 날뛸 뿐이지만, 울텔의 명령하에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놈들도 있었다.
바로 세계 곳곳에 뿌리 내린 밸리드가 바로 그것.
하지만 라일라의 정보로 밸리드의 은신처들을 파악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은 더 이상 위협이 될 수 없었다.
마치 바퀴벌레처럼 솟는 것이 밸리드지만, 그 은거지들을 일제히 급습해 모조리 철거해 버린다면 아무리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라도 박멸이 불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먼저 지크는 자잘한 밸리드 신전들의 위치를 각국에 뿌려댔다.
그것엔 카르위먼의 이름을 빌렸다. 아무리 드래곤 슬레이어의 명성이 세계를 떨어 울리고 있다지만, 아무래도 밸리드에 대한 각국의 신뢰는 카르위먼이 위였기 때문이다.
지금껏 밸리드에 대한 온갖 정보를 제공했고, 그것이 전부 맞아떨어진 터라 지크에 대한 신뢰는 카르위먼 내에서는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당연히 카르위먼은 흔쾌히 자신들의 이름을 빌리는 걸 허락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이름값과 카르위먼의 보장.
그 두 개가 합쳐지니 각국은 바로 움직였다.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숨어 있던 밸리드의 신전들이 각국의 무력에 철저하게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카르위먼도 당연히 밸리드의 신전들을 공격하는 데 한 손 보태려 했다.
하지만 지크가 내민 또 다른 정보에, 카르위먼은 자잘한 신전들을 공략하는 걸 포기했다. 그보다 더 군침 도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지크는 산을 올라가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는커녕 키 작은 관목조차 보이지 않는, 그저 발끝을 스치는 수풀이 군데군데 돋아난 것이 전부인 돌과 바위로 이루어진 황량한 산.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깎아지를 듯한 다른 산들뿐. 근처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지크는 다시 다리를 재촉했다. 그의 신형이 쭉쭉 앞으로 이동했다.
얼마쯤 이동했을까.
-와아아아아!
저 멀리서 아련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지크는 속도를 올렸다. 산등성이 하나를 건너자 함성 소리가 확 커졌다.
[와아아아아아!]
“저 더러운 밸리드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이 세상에서 호흡하는 것조차 부정한 것들이다! 죽여라! 그러면 카르나께서 녀석들에게 알맞은 벌을 내리실 것이다!”
상당한 수의 성기사들이 성력을 줄기줄기 내뿜으며 돌격한다. 그 뒤를 신관들이 온갖 성법으로 보조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거대한 절벽 안쪽을 깎아 만든 건축물이었다. 카르위먼이 자잘한 밸리드 신전의 토벌을 철회하게 만든 이유.
바로 밸리드의 남부 총지부였다.
절벽 옆으로 파인 거대한 계곡 아래로 도도하고 커다란 계곡물이 이곳이 밸리드의 신전이 분명하다며 알리는 것 같다.
오랜 시간 동안 주변 밸리드 신도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남부 총지부는 당장 함락될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오로지 험한 산맥 안에 숨어 있었기에 외부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던 남부 총지부다.
카르위먼이 작정하고 정예들을 이끌고 와 기습한 지금, 남부 총지부의 몰락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밸리드도 상당히 끈질겼다. 그들은 악다구니를 쓰며 저항했고, 카르위먼의 피해도 누적되어 갔다.
루벨라나 벨리 와이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지크가 알려준 다른 총지부를 공격하러 갔다.
지크는 바로 카르위먼의 지휘부로 향했다.
“지크 님 아니십니까!”
목에 핏대가 서라 소리를 치며 지휘를 내리고 있던 성기사가 지크를 보며 반색했다. 처음 본 성기사였지만 그는 지크를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 밸리드 북부 총지부 공략에 참가했었습니다. 그때 지크 님을 뵀죠. 하델 드니르입니다.”
“반갑습니다, 드니르 경. 전황은 어떻습니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둘의 인사는 담백했다.
“밸리드 놈들의 저항이 거셉니다만, 그것도 얼마 안 갈 겁니다. 곧 카르나 님의 앞으로 끌려가 적절한 벌을 받게 되겠죠.”
“그래도 피해는 상당하군요.”
“카르나 님의 권세를 증명하기 위함이니 어쩔 수 없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하델도 썩 기분이 좋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지크가 검을 뽑아 들었다.
“굳이 피해를 늘릴 필요는 없겠죠. 저도 참가하겠습니다.”
“드래곤 슬레이어인 지크 님의 참전이라면 얼마든 환영입니다!”
하델이 반색하며 말했다.
지크는 바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역으로 달려갔다. 그의 거대한 마력이 적진 한가운데 떨어졌다.
콰아아아앙!
적들의 몸이 마치 폭풍에 휘말린 나뭇잎처럼 휘날렸다.
아무리 남부 총지부가 중요한 곳이라 기본적으로 상당한 전력이 갖춰져 있다고 해도 전성기 시절 힘을 되찾은 지크에게는 별달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카르위먼을 상대로 악착같이 버티고 있던 보람도 없이 밸리드 신도들은 지크가 돌격하는 족족 길을 내줘야 했다.
그날, 밸리드 남부 총지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