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0화
지크는 떠나는 제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직 당혹감을 떨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발걸음엔 앞으로 미래를 개척할 힘이 분명히 실려 있었다.
‘잘할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지크 자신, 그리고 라일라의 제자들이지 않던가.
한스와 스녹은 지크가 오랫동안 데리고 다니며 말 그대로 밑바닥부터 만든 녀석들이다.
본신의 재능에 지크의 혹독한 훈련이 합쳐져 둘은 그 나이대는 물론이고 웬만한 강자들과 붙어도 밀리지 않을 만큼 성장한 상태였다.
엘레나, 라라는 같이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녀들도 걱정할 건 없었다.
라라는 이미 합류했을 때부터 반 쯤 완성된 녀석이었다. 그렌의 강요에도 한스의 충고 덕에 끝끝내 자신의 재능을 살릴 검을 놓지 않은 데다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쌓아오기도 했다.
거기에 재능도 출중하다. 그 짧은 시간 지크가 살짝 손을 대준 것만으로도 그녀는 무섭게 성장했다.
엘레나도 마찬가지다. 처음 만났을 때 전혀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지만 그녀 역시 기초는 충분히 다져져 있었다.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할아버지인 윌위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마법 공부는 라일라의 교육과 그녀 본인의 재능이 합쳐져 엄청난 성과를 불러왔다.
‘지금부터는 교육보다는 스스로의 연구와 사색이 더 중요하다고 했지.’
지크의 생각이 아니다. 얼마 전 라일라와의 대화에서 엘레나가 화제에 올랐을 때, 라일라가 한 말이었다.
말투로 보면 그녀도 엘레나의 독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니면 엘레나만 취소하면 되지.’
라일라에게 욕을 좀 먹고 제자들의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이 꽂히겠지만 지크가 어디 그런 것에 주눅 들 사람이던가.
게다가 지크도 엘레나의 스승이라고 주장할 정도는 되었다. 그녀의 실전 교육을 담당한 사람이지 않던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지크는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라일라가 보내준 정보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앞으로를 위해 계속 정리를 해야 했다.
‘이 녀석도 슬슬 움직이려는 모양이고.’
울텔의 찡그려진 얼굴이 떠올라 지크는 큭큭거렸다.
* * *
울텔은 그의 최측근들과 앞으로의 계획을 짜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모든 일을 뒤로 미룬 채 최대한 머리를 짜낸 결과, 울텔은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모든 세력을 이용해 대단위 침공을 개시한다.”
부하들이 일제히 울텔을 쳐다봤다.
“지크 모어를 노리시는 겁니까?”
“아니. 정확히 말해서 지크 모어‘도’ 노린다.”
“상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지크 모어가 회귀를 했다는 건 확실해. 놈이 어떤 식으로든 회귀 능력의 무력화에 관여가 되어 있는 것도 확실하고. 시스템을 고치려면 녀석을 잡는 게 최선이겠지. 그런데 녀석을 잡는다고 시스템을 고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나?”
부하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울텔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회귀 능력과 그를 가능케 하는 시스템이다. 당연히 울텔의 부하들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만약 시스템을 고칠 수 없어 회귀 능력을 되찾을 수 없다면 지금 시간선 내에서 목표를 이루어야 해.”
“하지만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보도 많지 않고요.”
부하가 정보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울텔은 침음을 삼켰다.
코어가 도망친 것이 너무도 뼈아팠다. 어차피 시간이 되돌아가면 코어도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낙관적인 판단이 사태가 악화되는 데 일조를 했다.
준비도 마찬가지.
대략 정보를 만족할 만큼 모으게 된다면 울텔이 직접 회귀를 해서 자신의 세력을 목적을 이루기 쉬운 형태로 새로 짜 맞췄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세력은 모두 그 병신 같은 그렌 제너드의 ‘완벽한 인생’을 지원하기 위해 기형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목표를 축소시키더라도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야.”
울텔은 앞에 있는 테이블에 시선을 줬다. 거기엔 총단과 그 근처 나라들이 세밀하게 그려진 지도가 놓여 있었다.
“우리의 모든 세력을 모아 일단 크로뇽 왕국으로 진격한다.”
울텔이 총단이 있는 호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크로뇽 왕국을 손으로 짚었다.
“만약 그곳에 지크 모어가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병신의 얘기를 들어보면 스틸월 백작가에 귀환을 한 건 최근일 뿐, 원래는 세계를 떠돌아다녔다고 했지 않습니까. 녀석이 다시 움직일지도 모릅니다.”
“최대한 쫓아 봐야지. 단, 그렇다고 미련하게 계속 녀석이 발견된 곳으로만 병력을 밀어 넣지도 않을 거다.”
울텔은 펜을 들어 총단과 크로뇽 왕국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 몇 개를 포함해 총단 주변에 있는 왕국들을 하나로 묶는 선을 그렸다.
“지크 모어를 놓친다면 녀석의 정보를 수집하며 일단 이 영역을 확보한다.”
그리고 울텔은 방금 전 그린 선보다 조금 더 넓은 영역을 포함한 선을 그렸다.
“점령한 영역을 안정화시키면 바로 이 영역까지 군대를 진군시킨다. 지금의 전력을 생각하면 이 정도까지는 충분히 점령이 가능할 거다.”
라일라가 탈출해 정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조직이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회귀 전 정보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렌이 본격적으로 회귀를 하기 전이긴 하지만, 울텔이 회귀를 진행하며 얻은 정보는 고스란히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고, 회귀 초반 연구를 위해 라일라에게서 빼낸 정보도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회귀를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줄 안 그렌이 건넨 정보도 있었다.
부하들은 울텔이 묶은 영역을 보고 침음을 삼켰다.
“말 그대로 주인님의 모든 세력을 동원해야 점령 가능할 만한 영역이군요.”
“내가 그렇게 말했잖나.”
“하지만 이 정도로 병력을 동원한다면 섬에 관한 방어가 허술해질 겁니다. 그에 관해서는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리가. 말하진 않았지만 울텔이 가장 걱정하는 게 그것이었다.
‘지크 모어가 섬에 관해서 알고 있진 않겠지?’
회귀가 막히고 시스템의 코어를 잃어버린 것 다음으로 울텔을 압박하고 있는 건 지크가 도대체 몇 번이나 회귀를 했고 어떤 정보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섬에 관한 정보는 정말로 철저하게 숨기고 있는 그였지만 지크가 알고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이 오만하게 세계를 굽어 볼 수 있던 최대의 강점이 이제는 연약한 약점이 되어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섬과 총단에는 따로 방어 수단이 있으니 그걸 믿겠다. 설혹 그것들이 없더라도 겁만 집어먹고 총단 안에서 덜덜 떨며 보내는 것보다는 뭐든지 하는 게 훨씬 나아. 웅크리고 썩어가는 것보다는 나아가 화살을 맞고 죽겠다.”
“알겠습니다.”
그들의 주인이 저렇게 각오를 굳혔다. 더 이상의 걱정은 괜한 참견일 뿐이다.
“지크 모어가 착하게 살고 있다고 본인 입으로 이야기했다지? 그게 정말이라면 이 정도 대대적인 침공이 일어났을 때 녀석이 전장으로 직접 나올 가능성도 충분히 커.”
방향성이 정해진 이후로 울텔과 부하들은 앞으로의 침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적은 피해로 빠른 시간 내에 성공적으로 침략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울텔과 부하들의 음모는 깊어갔다.
* * *
‘이 녀석들, 상당히 과감한 방법을 사용하는군.’
회귀가 끊기고 자신들의 정보가 읽혔다는 걸 안 즉시, 모든 세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침략을 계획하다니.
과연 울텔. 역시 진짜 흑막은 가짜 흑막인 용사 병신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디 보자. 그놈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뭐가 있지?’
지크는 하나하나 손꼽기 시작했다.
‘일단 울텔이 밸리드의 교황이니 밸리드가 있을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전력의 동원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크가 아는 것과 라일라가 보내준 정보를 합하면 그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로브 놈들.’
그렌 제너드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오로지 음모와 공작을 위한 조직으로 변해버린 녀석들이지만 그렇다고 녀석들을 만만하게 볼 수도 없다.
‘마인들도 동원할 수 있으려나?’
아직 녀석들이 본격적으로 마인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는 마인 시대에 접어들 시기는 아니다.
즉, 그게 완성이든 미완성이든 마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극히 적다는 뜻이다.
게다가 마인이란 것 자체가 세계에 혼란을 줌과 동시에 그렌의 업적을 위한 제물에 불과했기에 애초에 녀석들은 마인을 제어할 생각조차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때문에 녀석들이 침략에 마인들을 대동할 가능성은 극히 미미했다.
그렇다고 마인들이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도 아니었다.
‘녀석들이 마인들을 더 빨리 만들어 내보낼 수도 있어.’
그 마인들을 이용해 침략을 할 나라에 내부적인 혼란을 일으킨다면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마인들을 만드는 특수한 물건들은 전부 클로원 제국의 유산이다. 자기 부하들에게 그 유산을 줘서 침략군에 앞세울 수도 있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하겠지.’
실제로 울텔과 그 부하들의 회의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거기에 몬스터도 있고.’
사각뿔의 원혼은 물론이고 세르피나나 실험체가 몬스터들을 부린 힘 또한 클로원 제국의 것.
지금부터 놈들은 막대한 몬스터들의 군대를 모으기 시작할 것이다.
‘무엇보다 세계수의 마력.’
앞의 것들은 세계수의 마력에 비하면 그다지 걱정거리도 되지 않는다.
물론 울텔은 당장 세계수의 마력을 끌어다 쓰고 있지는 않다. 아직 회귀 능력을 복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기에 그런 것.
하지만 최후까지 밀린다면 녀석이 세계수의 마력에 손을 대지 않을 리 없다.
‘이렇게 보니 정말 어마어마한 세력이군.’
나라 한두 개 짓밟는 것 따윈 일도 아닌 세력이다.
‘하지만 그것도 아무런 사고 없이 모든 세력을 모은다면의 얘기지.’
지크는 정말로 최선을 다해 울텔을 방해할 생각이었다.
‘당장 총단에 공격을 가할 순 없고, 일단 바깥에 퍼진 팔다리들부터 잘라 내보자고.’
해야 할 행동이 정해졌다. 이제 다시 움직일 때였다.
* * *
얼마 후, 지크는 비올사의 정문을 지났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맑게 갠 하늘이 보인다.
마치 지크의 앞길을 축복해주는 것 같았다.
이미 다른 이들과의 작별은 마쳤다. 한 명 한 명이 지크와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특히 스스로 길을 개척하기 시작한 제자들이 더욱 그러했다.
도로를 걷던 지크는 문득 옆을 바라봤다.
보이는 건 넓게 펼쳐진 밭뿐. 언제나 보이던 익숙한 얼굴들은 없다.
‘혼자서 여행을 하는 게 얼마 만이지?’
회귀를 한 후, 전술상 단독 행동을 한 적은 있더라도 혼자서 여행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확실히 아쉽군. 나도 꽤 많이 풀어진 모양이야.’
그러나 그 감정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회귀 전의 내가 봤다면 재수 없다며 침이나 뱉어댔겠지. 아니면 칼을 휘두르거나.’
지크는 킬킬댔다.
하지만 이렇게 여유롭게 걸을 시간은 없었다. 지크의 칼을 기다리는 멍청한 놈들이 한가득이었으니까.
‘필요한 정보는 모두 넘겼고. 이제 얼마나 놈들을 쳐내는지에 따라 나중에 할 고생이 변할 거야.’
그걸 생각해서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지크는 다리에 마력을 모았다. 운명을 비트는 열쇠에 의해 완전히 해방된 지크의 마력이 다리에 빠른 속도로 모여들었다.
콰앙!
커다란 소음이 나며 흙먼지가 날린다.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지크의 모습은 더 이상 길 위에 보이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