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7화
사내, 울텔은 계속 장치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마력은 여전히 장치 안에서 헛되이 소모될 뿐, 회귀 능력이 회수되는 낌새는 없었다.
‘왜? 왜 작동이 안 되지?’
브뤼셀 시스템은 울텔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갖고 있는 거대한 세력도 이 시스템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그런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젠장!”
쿠웅!
울텔은 신경질적으로 벽을 후려쳤다.
생각 같아서는 장치를 후려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잡아 놓은 미미한 판단력이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다 정말로 장치가 망가지면 어쩐단 말인가.
절대 고장 난 건 아니다. 울텔은 움직이지 않는 장치를 보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야 했다.
‘결국 이상 반응이 악화된 건가?’
요 근래 시스템의 반응이 이상하긴 했다. 그 때문에 불안감을 느껴 그렌을 찾아갔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지 않은가.
휙!
울텔이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 윈두르에 다가갔다.
용암 호수 중앙에 있는 섬에 뿌리 내린 거대한 나무.
브뤼셀 시스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분명한 그 나무는 어제까지만 해도 울텔이 갖고 있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지금, 울텔은 꼭 윈두르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원인이 뭐지? 저번부터 있었던 윈두르의 진동 때문인가?’
만약 그것 때문에 시스템이 중지된 것이라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려 했지만 도저히 대책이 생각나지 않는다. 마치 달도 별도 없는 밤길을 등불 하나 없이 걷는 것 같았다.
고치려고 노력을 해볼까. 하지만 무슨 지식이 있어서? 그는 시스템의 원리를 이해하긴커녕 간신히 작동 방법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길 얼마.
‘그렌 제너드, 그놈이 회귀하면 되잖아!’
그게 어떤 이상이든, 시간을 회귀시킨다면 설령 정말로 장치가 고장 난 것이라 하더라도 정상으로 돌아갈 터다.
물론 그렌은 회귀를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일단 회귀의 공포심에 빠져든 자는 회귀를 거부하게 된다 했으니.
하지만 그렌에게 회귀 능력을 없애는 힘은 없는 만큼, 그렌이 죽게 되면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연히 지정된 시점으로 회귀가 작동할 것이다.
자연사를 기다려도 되고 직접 죽여도 된다.
‘어차피 놈의 효용가치는 떨어졌어. 이제 와 놈이 내 본모습을 알아봤자야.’
물론 회귀 주체가 그렌인 만큼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렌을 죽인다면 회귀 후 울텔 자신이 위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 시간선은 코어가 없어 기억을 갖고 갈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타인에게 회귀라는 위험한 능력을 준 만큼 울텔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를 해놓았다.
일단 울텔은 회귀 시점에 감시자들을 그렌의 주변에 깔아놓은 상태였다.
제대로 된 힘을 쌓기 전이라 그렇게 많은 회귀를 하고도 그렌은 주변 감시자들을 알아채지 못했다.
만약 그렌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면 감시자들은 바로 울텔에게 보고를 할 것이었다.
게다가 그 외에도 몇 가지 대비를 더 해놨으니, 그렌의 습격에 울텔이 당할 리는 없었다.
물론 막상 회귀를 한 후 어떤 변수가 터질지 모르는 터라 지금까지 한껏 조심해오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사태.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렌은 공포심에 휩싸여 있지 않던가. 오히려 울텔에게 회귀 능력을 없애달라고 애원할 가능성도 높았다.
암흑 속에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희망에 울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연이어 떠오른 생각은 그의 희망에 찬물을 들이부었다.
‘회귀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보장은?’
브뤼셀 시스템을 제어하는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 윈두르도 이상 반응을 보인다.
그렇다면 회귀 능력에도 뭔가 이상이 생기지 않았을까.
‘이 상태에서 회귀 능력만은 정상적으로 작동할 거라 확신할 순 없어.’
그건 멍청한 짓이다.
물론 회귀 능력이 멀쩡히 작동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래도 확신할 수 없는 이상, 이건 최후의 방도로 남겨둬야 해.’
일단 그렌의 회귀 능력을 발동시킨다는 계획은 뇌리 한구석으로 미뤄뒀다.
‘가능하다면 브뤼셀 시스템을 수리하는 게 가장 낫지만….’
하지만 그게 불가능해서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아예 실마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코어, 코어 안에 정보가 있을 수도 있어.’
물론 그가 뒤진 라일라의 기억 속에서 그런 건 찾지 못했지만, 혹 놓친 게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지금은 아주 낮은 가능성이라도 시도해봐야 했다.
‘코어 옆에 있던 지크 모어도 이 시간선의 커다란 변수였지.’
어쩌면 녀석도 시스템의 이상에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어차피 코어를 되찾아 오려면 녀석과도 붙어야 해.’
그러나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 괴물 같은 놈과 직접적으로 대적해야 하다니.
코어를 회수하지 못한 이유는 지크 일행이 제대로 된 길로 다니지 않아 행방을 쉽게 쫓을 수 없었다는 것과 더불어, 지크 모어에 집착하는 그렌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크의 그 막강한 무력이 꺼려진다는 이유 또한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세력을 총동원해서라도 지크 모어와 코어를 잡아 온다.’
그렇다면 지금 지크의 실력이 어떤지 알아야 했다.
어려울 건 없다. 그들의 손아귀에는 얼마 전까지 지크와 싸워 온 인물이 있었으니까.
‘그렌 제너드. 네 마지막 할 일이 정해졌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미 그렌의 효용은 없었다.
* * *
그렌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두꺼운 커튼이 쳐진 방 안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하지만 커튼이 없었더라도 방 안이 밝진 않았을 것이다. 한창 달이 허공에서 열심히 달려가는 시간이었으니까.
이곳에 도착한 이후, 그렌은 죽은 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배는 대충 야생 동물들을 잡아 산 채로 뜯어먹으며 왔기에 그다지 고프지 않았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 한숨도 자지 않고 움직인 터라 진득이 달라붙어 있는 수마를 해치우고 싶을 뿐이었다.
하루를 꼬박 잔 그렌은 기운을 회복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후유증이 남아 있었겠지만 그렌의 드높은 실력은 단 하루의 잠으로 모든 육체적 상태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몸이 온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렌은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않았다. 그저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방의 천장을 흐릿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그렌은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이 세운 원대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왔다.
하지만 지금, 그 목표가 모조리 박살 났다.
전 세계에 완전히 악당으로 낙인찍히는 건 시간문제고, 몸에도 힘을 과하게 키운 부작용이 곧 들이닥칠 것이다.
물론 얼마 전까지 그런 것들은 그렌에게 있어 별 위협거리가 되지 못했다.
수틀리면 그대로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지금, 그렌은 그의 가장 큰 자산이었던 회귀 능력을 잃어 버렸다. 아니, 잃어 버렸다고 들었다.
‘정말일까?’
그에 대한 근거는 지크의 말뿐.
하지만 자신감 넘치던 지크를 생각하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지크 모어라는 존재 자체가 굉장히 거짓말을 능숙하게 하는 인물인 만큼 이번에도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그렌은 차마 확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회귀 능력을 확인하려면 일단 목숨을 끊어야 했다.
능력이 살아 있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로 그 날이 그렌이라는 인간의 종말의 날이 되어버린다.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잊힌 분풀이를 하겠다는 듯 원래보다 더 거대한 공포가 되어 그렌을 일방적으로 휩쓸고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다시 한번 아까와 똑같은 고민을 떠올렸다. 하지만 역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렌이 고개를 돌렸다. 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꽤 많은 인물들이 자신의 방으로 오는 것이 느껴졌다.
‘오지 말라니까!’
오직 식사를 가져올 때나 방문을 하라 일렀거늘, 이런 야심한 시각에 저렇게 떼거리로 몰려오다니.
그렌은 짜증을 내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슬며시 겁도 들기 시작했다. 저런 인원수가 그에게 찾아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그렌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던 조직의 인원들이다. 원래라면 그렌이 방에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강력하게 내린 상황에서 저렇게 무리를 지어 방에 다가올 리가 없었다.
얼마 전 같았으면 그냥 짜증만 내며,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렌은 슬며시 침대 옆에 세워둔 토르니움을 들어 이불 밑에 집어넣었다.
“무슨 일이야!”
인기척이 방문 앞에 도착하자 그렌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큰 소리가 제법 당당했다. 그래도 아직 기세가 죽지 않은 것일까.
그러나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면, 그건 그저 약한 개가 겁먹은 것을 숨기기 위해 요란하게 짖는 것과 별 차이 없는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렌은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문 앞에 있는 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덜컥!
상대가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잠금장치가 걸린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포기하지 않았다.
덜컥! 덜컥!
문이 덜컹거린다. 굉장히 난폭한 행위.
안 그래도 겁을 집어먹은 그렌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누, 누구야!”
아까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그렌이 외쳤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덜컥!
마지막으로 한 번 크게 흔들린 후, 문의 흔들림이 멎었다.
그러나 그건 잠시뿐이었다.
콰지직!
문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손잡이 주변으로 비틀린 잠금장치가 애처롭게 흔들리다 바닥에 떨어졌다.
쿵!
문은 그대로 방 안으로 던져져 침대 옆에 나뒹굴었다.
그렌은 당황한 눈으로 문을 뜯어 던진 자를 쳐다봤다.
“…울텔?”
그는 그의 충직한 종인 울텔이었다.
하지만 그렌은 눈앞에 등장한 사내가 정말 울텔인지 의심이 들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극도의 공경을 표하며 그렌의 수족처럼 움직여주던 그다.
하지만 지금의 울텔은 달랐다. 언제나 공손히 내리 깔렸던 눈은 그렌을 똑바로 직시했고, 그를 만날 때마다 꿇던 무릎은 밀랍이라도 발랐는지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도 오만불손한 태도가 행동 전체에서 보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그렌은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왜 이곳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가. 바로 울텔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에 그랬다.
그 정도로 그렌은 울텔을 믿고 있었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울텔의 태도가 변했다.
그러나 그렌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울텔이 어째서 변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아니었다.
만약 울텔마저 자신을 적대한다면 대체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였다.
‘여기서마저 쫓겨나게 된다면 더 이상 내게 안전한 곳은 없어!’
믿었던 뒷배마저 잃을 위기에 빠졌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나중에 판단해도 된다. 일단 울텔을 다시 복종시켜야 했다.
그렌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감히 밸르의 화신인 내게 이딴 무례한 짓을 벌인단 말이냐!”
그가 지금껏 울텔과 그의 조직을 마음껏 부릴 수 있었던 명분을, 그렌은 큰 소리로 말했다.
원래라면 그렌이 그 말을 한 즉시 울텔을 포함해 그의 부하들 전부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엎드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으흐흐흐흐흐!
크흐흐흐흐흐!
그저 뒤틀린 비웃음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