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6화
얼마나 달렸을까. 시간 감각도 없이 무조건 목적지로 향하던 터라 도망치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얼마나 됐는지 알 수 없었다.
밤을 몇 번 지새운 건 확실하다. 다만 그게 네 번인지 다섯 번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더 지샜을 수도 있고 덜 지샜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일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안전한 곳. 오직 그뿐이었다.
모든 힘을 되찾은 지크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연합군 최강의 전력으로 평가받던 그렌이다. 고작 며칠 정도 도주하는 것에 피로를 느낄 리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피로에 대한 것일 뿐, 그의 정신은 착실하게 밑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꼬르륵!
며칠을 굶었더니 위장이 몸부림친다. 아무리 엄청난 경지를 이룩한 자라도 인간은 인간. 평범한 이들보다 조금 더 버틸 수 있더라도 식사는 꼭 필요했다.
평소 마법 상자에 어느 정도 음식물을 가지고 다니긴 했다. 하지만 저번 드래곤의 공격을 꼴사납게 회피하던 중 마법 상자를 떨어뜨린 상태였다.
때문에 지금 그렌은 돈, 옷, 음식 등등 삶에 필요한 것들을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중에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토르니움뿐이다.
그렇다고 그렌의 능력을 생각하면 끼니를 굶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당장 수중에 돈이 없더라도 그라면 언제든 풍족한 돈을 벌 수 있다. 정 안 되면 훔치기라도 하면 되는 일.
설령 주변에 민가가 없어 훔치는 것조차 불가능하더라도 사냥을 해서 요리를 해 먹으면 된다.
하지만 지금, 그렌은 그 무엇도 불가능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공포였다.
혹여나 자신이 민가로 내려갔을 때 자신을 아는 자가 있다면, 그래서 행적이 지크에게 노출된다면.
부르르!
그렌은 몸을 떨었다. 지금 그렌에게 있어, 지크란 존재는 공포 그 자체였다.
지크가 한창 마왕의 칭호를 받고 세계를 피바다로 만들고 있을 때도 그렌은 지크에게 공포를 느끼진 않았다.
꼭두각시가 무서워야 얼마나 무섭겠는가.
하지만 자신을 꽁꽁 묶던 실을 던져버리고 완벽히 자유를 찾아 미지의 존재가 되어버린 지크는, 말 그대로 그렌의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했다.
자신의 모든 비밀을 알고 그걸 박살 내버린 존재.
오랜 시간 전능감에 취해 살아온 그렌에게 지크는 말 그대로 천적이었다.
그런 지크에게 행적을 들킬 위험성을, 그렌은 감히 감수하지 못했다.
변장을 하고 그다지 번성하지 않은 마을에 들어간다면, 혹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음식만 훔쳐온다면 들킬 가능성은 한없이 낮지만 그조차 행할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렌은 마을이나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다니고 있느냐.
그마저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생활 공간과 멀어지면 자연스레 몬스터들의 숫자도 많아지고 힘도 강해진다. 당연히 위험도도 높다.
물론 지금 그렌의 실력이라면 바실리스크 같은 최고 등급의 몬스터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다 자칫 잘못해서 하나뿐인 목숨을 잃게 되면 어찌한단 말인가.
때문에 지금 그렌이 도망치고 있는 경로는 인간의 세력권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멀어지지도 않은 애매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게 야생 동물을 잡아 요리해 먹는다는 선택마저 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아무리 목숨을 아끼게 된 그렌이라고 해도 토끼 같은 야생 동물을 잡는 건 가능했다.
하지만 고기를 익히기 위해 피울 불이 문제였다. 그가 있는 곳은 인간 세력권과 멀지 않다. 괜히 연기가 솟아 다른 인간에게 들킬 수 있다.
너무도 한심한 걱정. 하지만 분명 그렌이 느끼고 있는 공포임에도 분명했다.
그러나 배는 여전히 고팠다.
방법은 하나였다.
우드득!
방금 잡은 토끼를 털만 대충 뽑아낸 채 그대로 물어뜯었다. 질긴 살코기와 더불어 역하고 뜨거운 피가 입 안으로 확 들어왔다.
“우웁!”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에 입에 집어넣었던 고기와 피를 뱉어냈다. 그걸로도 모자라 위에 있는 내용물까지 토해내려 했다.
하지만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버린 위장을 아무리 자극해봤자 나오는 거라곤 쓰디쓴 위액뿐이었다.
“젠장!”
그렌은 소매로 입을 닦아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자신이 이런 추잡한 음식을 입에 대본 적이 언제인가.
아무리 회귀를 해 모든 실력과 업적이 초기화됐다고 해도 여러 준비를 해놓은 게 있었기에 그는 언제나 돈만큼은 풍족했다.
당연히 먹는 음식도 고급스러웠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음식을 먹었던 건 회귀 능력을 갖지 못했던 한심한 시절뿐.
그렌으로서는 생각하기도 싫은,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시절이었다.
하지만 혀끝에서 아직도 느껴지는 토끼의 생고기와 생피의 노린내는 이미 망각 저편에 거의 처박힌 첫 번째 삶의 기억과 경험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건, 그가 모든 것을 잃고 첫 번째 삶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웃기지 마!’
그동안 그가 들인 노력이 얼마던가. 그런 쓰레기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순 없다.
거의 손에 넣었던 완벽한 삶이다. 없었던 것으로 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렌은 신경질적으로 죽은 토끼를 집어 던지려 했다. 개같은 기억을 끄집어내게 만든 고깃덩이가 너무도 짜증났다.
꼬르르륵!
하지만 텅 빈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내용물을 짜내려 고생을 한 위가 다시 한번 음식을 요구했다. 소리는 아까보다도 조금 더 길었다.
토끼를 던지려던 그렌이 멈칫했다. 그의 눈이 갈등에 이리저리 움직였다.
음식을 먹고 싶다. 하지만 심장을 옥죄는 공포 때문에 불을 피울 수는 없다.
결국 아까처럼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생고기를 먹느냐. 아니면 굶느냐.
아드득!
결국 그렌은 굶주림에 굴복했다. 토끼를 생으로 물어뜯어 꼭꼭 씹은 다음 억지로 식도 너머로 흘려보냈다.
다시 한번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비루했던 첫 번째 삶의 기억도 계속 떠오른다.
문득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비참해졌다. 그가 꿈꿨던, 세계에 명성을 떨어 넘치는 영웅의 모습은 지금 어디에도 없었다.
“크흡!”
손과 입에 잔뜩 묻은 새빨간 피 사이로 방울지는 눈물이 섞였다. 그럼에도 그렌은 묵묵히 토끼 고기를 뜯었다.
얼마 후, 토끼는 피와 살점이 엉겨 붙은 뼈와 가죽만 남긴 채 땅바닥에 내던져졌다.
그렌은 제법 기운을 차렸다. 음식을 보내달라는 위의 신호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느껴지는 건 제법 든든한 포만감. 하지만 조금만 긴장을 풀면 욕지기로 인해 다시 위의 내용물을 토해낼 것 같았다.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비참했던 삶을 상기하며 먹은 끼니다. 어떻게든 소화시켜 육신의 일부로 바꿔야 했다.
그렌은 다시 움직이려 했다. 하루라도 빨리 안전한 곳에 숨어 이 비참함을 벗어나고 싶었다.
“히익!”
문득 비명이 들렸다. 그렌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봤다.
사람 한 명이 놀란 눈으로 그렌을 보고 있었다.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등에는 화살통을 메고 있으며 손에는 활을 들고 있다. 요 근처의 사냥꾼인 모양이었다.
그는 공포스러운 눈으로 그렌을 보고 있었다. 토끼를 생으로 뜯느라 피 칠갑을 한 인간이 인적 드문 숲에 덩그러니 있으니 기겁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방심했군.’
배고픔과 정신적 충격, 떠오른 과거 때문에 주변의 감지를 소홀히 한 자신을 그렌은 자책했다. 먼저 사냥꾼을 감지했다면 그를 피해서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가 없다.
자신은 사냥꾼에게 들켰고, 사냥꾼은 자신을 발견했다.
지크에게 행적을 들킬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민가에도 제대로 내려가지 못하는 그렌이니만큼 사냥꾼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스릉!
토르니움의 불길한 검신이 뽑혔다. 사냥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잠시 후, 지면에는 토끼의 피에 더해 인간의 혈액이 한 번 더 쏟아졌다.
그렇게 단 한 명의 목격자도 용납하지 않고 움직인 그렌은 얼마 후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
* * *
“그렌 제너드가 왔다고?”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부하에게 말했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부하가 대답했다.
“네, 거지꼴을 하고 왔다고 합니다.”
“거지꼴? 그놈 능력에 거지꼴을 하고 왔어?”
그렌을 싫어하고 멸시하고 무시하는 사내였지만 그렇다고 그렌의 능력을 전부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그렌의 능력은 충분히 강대했다. 재능이나 노력 없이 오직 고대 유물을 사용해 강해진 것이지만 어쨌든 능력은 능력.
한데 거지꼴로 왔다니.
“보고에 따르면 원래의 그렌 제너드의 모습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겁먹은 개새끼 같다고 하더군요.”
“정확히 말해 봐.”
부하는 보고받은 그렌의 상태를 세세히 설명했다.
‘확실히 예전의 그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상태군.’
오만하고 싸가지 없는 데다가 제 능력에 취해 있는, 누가 봐도 딱 소설 속 삼류 악역 같은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그렌 제너드란 인물이다.
하지만 지금 그렌 제너드의 태도는 원래의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사내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언젠가 그렌이 저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됐는가.’
회귀를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 부작용으로 언젠가 막대한 공포심을 느끼게 된다. 사내는 지금 그렌의 상태가 그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그렌 제너드의 효용은 끝났군.’
그렌 제너드는 더 이상 회귀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회귀 능력은 수거하면 그만이다.
“잠시 섬에 갔다 오마.”
“네!”
부하가 고개를 숙였다. 사내는 천천히 목적한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후, 사내가 도착한 곳은 세계수의 본체가 있는 유적이었다. 그는 유적의 장치 앞에 섰다.
그의 눈이 잠시 깨진 유리관을 훑었다. 라일라가 잠들어 있던 바로 그 유리관이었다.
‘코어가 없는 게 아쉽군.’
이번 시간선은 정말로 온갖 변수와 사건이 다발한 시간선이었다. 그렌에게 있어서는 최악이었지만, 최대한 많은 정보를 끌어 모으길 원하는 사내는 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정보를 다음 회귀에 넘길 수 있어야 가치가 있는 법.
그렌이 회귀를 할 때마다 사내의 기억은 당연히 소멸했다.
하지만 그는 브뤼셀 시스템의 코어를 통해 전 시간선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한데 이번엔 브뤼셀 시스템의 코어가 없다.
물론 그렌의 회귀 능력을 회수해 사내가 직접 회귀를 한다면 기억은 보존될 것이다.
하지만 에스텔레이드와 토르니움을 통해 코어에 직접적으로 정보를 저장하는 것보다는 부정확하다. 그리고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쉽게 휘발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없는 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시간선에 발생한 사건들이 다음 시간선에서 발생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때 기록하면 된다.
‘어차피 시간을 돌리면 코어도 돌아와 있을 테니.’
유리관 안에서 뛰쳐나와 마왕으로 불렸을 정도로 날뛰었을 때의 코어도 시간을 돌리자 얌전히 유리관 안에 잠들어 있는 모습으로 돌아왔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떻게 탈출을 한 건지는 모르지만, 일단 무조건 코어에 대한 감시는 강화해야겠어.’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을 하며 사내는 장치를 조작해 그렌의 회귀 능력을 도로 가져오려 했다.
“…응?”
사내의 눈이 커졌다. 그는 계속 마력을 장치 안에 집어넣어 이리저리 조작을 시도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 이게 왜 안 되지?”
사내의 이마에 식은땀이 샘솟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