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5화
“어머, 정말요?”
루벨라의 눈에 호기심이 반짝였다. 옆에 있던 와이그도 관심을 기울였다.
“상대는 역시 라일라 님인가요?”
“그렇습니다.”
“축하드려요!”
루벨라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축하를 받기에는 조금 이릅니다. 라일라가 깨어난 후에 대답을 해줘야 하거든요.”
그리고 그녀에게 대답을 들려주려면 반드시 브뤼셀 시스템의 본체를 확보해 그녀를 깨워야 했다.
“루벨라 님은 밸리드 총단에 대한 공격에 긍정적이라고 받아들여도 되겠지요?”
“이를 말인가요! 그리고 긍정적인 건 저만이 아니에요. 카르위먼 소속의 모든 이들, 아니 이 세상 모든 이들이 염원하고 바라는 일이 분명하니까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크 님. 만약 성녀님께서 키스 얘기를 꺼내지 않으셨다면 제가 먼저 키스해도 되는지 물었을 겁니다.”
“감사히 마음만 받겠습니다.”
라일라라는 임자가 없었다고 해도 그것만은 사양이었다.
“음, 아쉽군요.”
와이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농담은 거기까지. 와이그가 지크를 직시했다.
“어딥니까. 그 빌어먹을 생선 대가리 바퀴벌레 놈들의 본거지는.”
와이그에게서 서늘한 살기가 비집어 나왔다. 알지 못하는 정보라도 일단 무엇이든 내뱉고 싶어지게 만들 정도로 와이그의 살기는 소름이 끼쳤다.
“미로텔 호수입니다.”
“미로텔 호수 말입니까.”
미로텔 호수. 대륙 동북부에 위치한 호수다.
맞은편 호숫가에 닿으려면 배를 끌고 좋은 바람을 탄 채 며칠을 내달려야만 간신히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곳.
그곳이 호수라는 정보를 얻지 못한 채 닿은 사람이라면 영락없이 바다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신전을 지으려면 무조건 근처에 물이 있어야 하는 밸리드인 만큼 미로텔 호수에 밸리드의 총단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호수의 그 막대한 규모를 생각하면, 신전의 규모가 클수록 끼고 있어야 하는 물의 양이 많아야 하는 밸리드의 특성상 총단이 있다는 것도 자연스레 납득이 갔다.
문제는 그 생각을 카르위먼도 이미 했다는 것이다.
“미로텔 호수라면 저희도 샅샅이 뒤졌습니다. 누가 봐도 그 생선 대가리 놈들이 저들 신전을 짓기 위해 탐욕을 뚝뚝 흘릴 만한 곳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거기서 밸리드의 흔적을 찾을 순 없었습니다. 물론 규모가 규모인 만큼 조금의 빈틈도 없을 정도로까지 조사를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밸리드의 총단이 있다면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명색이 밸리드의 ‘총단’이다. 그 규모가 결코 작을 리 없다.
그 정도로 커다란 건물이라면 호수를 수색하던 카르위먼의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다.
“설령 저희가 찾지 못했다 하더라도 근처 주민은 알고 있어야 할 텐데, 비슷한 목격 정보도 없었습니다.”
“당연하죠. 숨겨져 있으니까요.”
“숨겨져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카르위먼과 전 세계가 이를 갈며 찾는 것이 밸리드의 총단이다.
지부 정도야 지크의 정보로 파괴한 북부 지부를 비롯해 과거 몇 번 찾아내 없애버린 적이 있다.
하지만 총단만큼은 공격을 하기는커녕 어디 있다는 단서조차 제대로 찾은 적이 없다.
“미로텔 호수 중앙에는 커다란 섬 하나가 있습니다. 밸리드의 총단은 거기에 있죠. 하지만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아니, 들어가긴커녕 특수한 마법에 의해 숨겨져 있어 주변 거주민들조차 그 존재를 모르죠.”
“그 바퀴벌레 새끼들. 그런 식으로 숨어 있었나.”
설마 호수 중앙에 있는 섬의 존재조차 숨기고서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니. 정말로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다. 바퀴벌레의 본거지를 파악했으니 이제 남은 건 본거지째 불태워서 깔끔하게 퇴치하는 것뿐이다.
“정확한 위치는 어디죠?”
루벨라가 물었다.
미로텔 호수의 규모를 생각하면, 섬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면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마법에 의해 그 존재조차 숨겨져 있다고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준비부터 하시죠. 어차피 카르위먼도 당장 병력을 움직일 여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 인간들부터 처리해야 하니까요.”
지크는 루벨라가 꼭 쥐고 있는, 그가 준 배신자들의 명단을 가리켰다.
“그리고 밸리드의 동태도 좀 살펴보고 싶고요. 이번 음모는 밸리드에서도 상당히 심혈을 기울인 것이었던 터라 녀석들도 뭔가 움직임이 있을 겁니다.”
정확히는 그렌의 귀환으로 촉발될 움직임을 토르니움을 통해 수집한 후 앞으로의 계획을 짤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 섬의 마법을 깰 수 있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나중에 제가 가장 앞에 서서 섬까지 안내를 해드릴 테니, 지금은 당장 해야 할 일부터 해주시기 바랍니다.”
밸리드 총단의 공격을 제안하긴 했지만, 지크의 목적은 밸리드의 소멸이 아니다.
흑막을 짓밟고 세계수를 해방하며, 무엇보다 라일라를 깨워야 한다. 그러기 위한 계획을 짜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그렌이 흑막과 접촉해 어느 정도의 정보를 보내올 때까지의 시간 정도는 있어야 했다.
“음, 아쉽긴 하지만 지크 님께서 그러시다면….”
당장이라도 밸리드 놈들의 모가지를 꺾어놓고 싶었던 와이그는 못내 입맛을 다셨다. 루벨라도 마찬가지.
하지만 둘은 지크의 말에 수긍했다. 납득 가는 말이기도 했거니와 그들이 지크에게 가진 신뢰가 그렇게 만들었다.
“알겠어요. 지크 님이 말씀을 주실 때까지 준비를 완벽히 끝내 놓을게요.”
배신자의 명단을 힘껏 쥐며 루벨라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용건을 모두 끝낸 지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아, 그러고 보니 첼시 윈드네에 관한 처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윈드네요?”
지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루벨라가 눈을 끔벅였다.
“글쎄요. 녀석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역시 그런가.’
루벨라에 대해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첼시와는 달리 루벨라는 이미 첼시에 대해 관심 자체가 없었다. 완벽하게 무심한 루벨라의 목소리가 그 증거였다.
‘이미 자리를 잡은 루벨라에게 녀석은 예전에 귀찮게 했던 녀석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을 테니까.’
경쟁자라고 보기엔 실력도 실적도 인성도 첼시가 너무도 떨어진다. 홀로 불태우는 경쟁심만큼 허무한 것이 또 있을까.
“어쨌든 그 애도 드래곤 슬레이어란 칭호를 받았으니 뭐, 잘 살지 않을까요? 능력도 나름 나쁘지 않고요.”
“제게 카르위먼의 복귀를 요청해주길 부탁했습니다.”
“그건 또 대범하게 나왔네요.”
“하여간 뻔뻔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야.”
첼시에 대한 별 감정이 없는 루벨라에 비해 와이그는 아직 감정이 잔뜩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지크 님은 저희가 그 녀석을 복귀시키길 바라시나요?”
“어느 쪽이건 상관없습니다. 저와 직접적으로 악연을 맺은 것도 아니고, 일단 드래곤을 상대로 함께 싸운 인연도 있으니 요청 정도는 말해줘도 된다고 생각을 한 것뿐이죠.”
“음….”
“고민할 게 뭐 있습니까. 카르위먼의 신관으로서 기본적인 인성조차 돼먹지 않은 녀석입니다. 차라리 잘 나갔죠. 언젠가 카르위먼의 명예를 분명히 떨어뜨렸을 테니까요.”
와이그는 첼시의 복귀에 무척이나 부정적이었다.
만약 지크가 진심으로 첼시의 복귀를 요청한 것이라면 와이그도 자신의 감정을 집어넣고 찬성을 했을 테지만, 지크는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들이 보아 온 지크의 성격을 생각하면 저건 정말로 어찌 되든 좋다는 뜻이다.
그러나 루벨라의 결론은 조금 달랐다.
“좋아요. 한 번 말해볼게요.”
“성녀님!”
와이그가 놀라 외쳤다. 그저 한 번 말해 본다지만, 성녀가 한 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루벨라가 말을 하는 즉시 첼시의 복귀는 통과될 것이다.
“윈드네가 성격은 확실히 최악이지만 그 능력은 상당해요. 게다가 이번에 드래곤 슬레이어란 호칭까지 얻었죠. 그녀를 카르위먼에 복귀시키면 얻는 게 분명 있어요.”
“하지만 그 녀석의 성격은 익히 아시잖습니까.”
“걱정 마세요. 제 부탁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으니 그녀는 감히 절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예요.”
성녀라는 직위에 더해 교단으로의 복귀를 도와준 사람이 됐으니 그 성질 더러운 첼시라도 한동안 루벨라에게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녀가 영원히 그럴 리는 없겠지요. 성격도 확실히 문제고요. 그러니 제 영향력이 확실하게 남아 있을 때 고생스러운 자리로 보낼 거예요. 그런 자리라면 오히려 그녀의 성격이 장점이 될 수도 있겠죠.”
예상치 못한 발언에 와이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혹 그 녀석이 은혜도 모르고 거절을 할 수도 있습니다.”
첼시라면 그러고도 남으리라. 그에 루벨라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상관없어요. 결국 스스로 가겠다고 하게 하면 되니까요. 자원할 때까지 고생시킬 방법은 많아요.”
와이그는 조금 충격받은 표정으로 루벨라를 보다가 지크를 쳐다봤다. 그의 눈에 조금 원망이 맺혀 있었다.
‘왜 날 보는 거야?’
설마 루벨라가 저렇게 변한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일까.
당장 자신에게 책임은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슴어림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죄책감에 지크는 슬쩍 와이그의 눈을 피했다.
‘강단이 생긴 건 좋지만, 회귀 전에 내가 죽을 때도 눈물을 흘려줬던 사람인데 너무 바꿨나?’
있지도 않은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 같았다.
“자, 그럼 윈드네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다른 할 말이 있나요, 지크 님?”
“윈드네와 같이 카르위먼을 탈퇴했던 다른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첼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순수하게 든 의문에 지크는 물었다.
“기본적으로 우리 쪽에서 접근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들이 밸리드의 편을 들었다지만 어디까지나 속은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밸리드와 협력을 했다는 낙인이 찍히는 것도 분명하니 우리 쪽에 돌아오기는 좀 힘들지 않을까요. 돌아온다고 해도 상당히 안 좋은 눈으로 보게 될 거고요.”
대부분 지크가 예상한 대로였다. 첼시도 그걸 알기에 지크에게 부탁한 것이기도 했고.
“단, 밸리드와 전적으로 협력한 자들은 다르죠.”
루벨라의 목소리에 싸늘한 한기가 서렸다.
“그러고 보니 우르원 루스는 어찌 됐습니까?”
밸리드의 끄나풀로, 이번 전쟁 때 첼시를 포함한 카르위먼의 신도들을 꼬드겨 카르위먼을 탈퇴, 연합군의 편을 들게 만든 녀석이다.
“드래곤 소동이 끝나고 도망을 갔다고 들었는데요.”
“그 녀석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와이그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손수 녀석을 카르나 님의 심판대 앞으로 보내 줬으니까요.”
“그렇군요.”
결국 와이그의 손에 걸려 죽은 모양이었다.
“여기 적혀 있는 놈들도 곧 그놈들을 따르겠지요.”
루벨라가 쥐고 있는 배신자 명단을 손가락으로 한 번 훑으며 말했다.
곧 카르위먼 내부에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라고 지크는 예측할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