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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54화 (554/628)

제554화

하지만 첼시가 풀죽어 있는 시간은 짧았다.

“어쩔 수 없죠. 살 사람은 살아야지.”

조금 전까지 전 동료의 복귀를 청한 사람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근심 없어 보이는 표정과 행동이다. 뒤에서 보는 피나가 얼이 빠져 입을 조금 벌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서 첼시의 행동에 기막혀 하는 건 불행히도 그녀뿐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살 사람은 살아야지.”

“역시 그렇죠?”

지크의 동의를 받은 첼시가 활짝 웃었다.

“그렌 그 개자식… 음, 개자식이라고 해도 되죠?”

“그놈에게 하는 욕은 일일이 허락받을 필요 없어. 아니, 욕도 아니지. 개자식을 개자식으로 부르는 게 욕이 되나?”

“정말로 그래요.”

허락도 받았겠다, 그렌을 욕하고 싶은 마음도 차고 넘치겠다, 첼시는 마음껏 그렌의 부모와 종족을 자기 멋대로 바꿔댔다.

“그 쓰레기한테 태어난, 구더기보다 못한 구역질나는 개자식보다는 지크 님과 더 마음이 통하는 것 같네요.”

유명한 악단의 음악을 감상하는 것처럼 그렌에 대한 첼시의 매도를 기쁜 마음으로 감상한 지크는 첼시의 말에 동의했다.

의외로 둘은 죽이 맞았다. 둘 다 성격이 더러운 게 통하는 면이 된 모양이다.

“지크 님도 재미없는 루벨라보다는 제가 성녀가 되는 편이 더 좋지 않으시겠어요?”

첼시가 은근슬쩍 운을 뗐다. 의도가 빤히 보였지만 의외로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것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만….”

“그럼…!”

“하지만 네 능력이 딸리잖냐. 아까도 말했지만 네 능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루벨라한테 상대가 안 돼.”

“그걸 지크 님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귀찮아, 인마.”

첼시가 아쉬워했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루벨라보다는 너와 성격이 비슷하다고 해도 네 편을 들겠냐?”

루벨라와는 적지 않은 인연을 쌓아 왔다.

회귀 전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에게 나름 동료 의식까지 생겨난 지크가 이제와 첼시의 편을 들어줄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죠.”

첼시는 물러섰다. 하지만 지크는 그녀가 성녀 자리를 포기한 것이 결코 아니라고 확신했다.

지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재미있는 녀석이지만, 끈질기기도 하군.’

그러나 지크는 그 이상 첼시에게 뭐라고 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둘은 그다지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성녀 자리를 노리지 말라는 조언 한 마디 한 정도면 차고 넘친다.

그녀가 걸을 가시밭길이 훤히 보였지만 이제 그걸 오롯이 감당할 이는 첼시 본인이었다.

지크의 시선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피나에게로 옮겨갔다.

“너는 학파의 부흥이 목적이었던가?”

“그래요.”

이번 전쟁에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던 플루 학파와는 달리 연합군 측으로 참전한 콘로드 학파는 꽤 피해를 입었다.

마법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연합군 측에서도 최선을 다했지만, 전쟁 내내 스틸월 백작군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며 막대한 피해를 입은 연합군이었던 만큼 마법사들도 피해를 입지 않았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마탑의 반란에 이어 밸리드의 주구 밑에서 전쟁에 참가했다는 낙인.

거기에 이번 전쟁에서 받은 인적 피해까지. 콘로드 학파의 미래는 결코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피나가 드래곤 슬레이어의 명칭을 얻고 드래곤 사체의 일부까지 얻게 된 것이 희망이었다.

하지만 예전과 같이 플루 학파에 비견될 일은, 적어도 가까운 미래엔 없을 게 분명했다.

“그래, 수고해라.”

지크는 몸을 돌리려 했다.

“잠깐만요.”

그런 지크를 피나가 붙잡았다.

“혹시 명성을 높일 수 있는 일이 생긴다면 우리 학파도 끼워주실 수 있나요?”

지크가 피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살짝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말을 꺼내긴 했지만 그녀에게 첼시만큼의 뻔뻔함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이 지크의 대답을 기다렸다.

“용병처럼?”

“……!”

피나의 몸이 한순간 떨렸다. 그녀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법사는 어딜 가든 대우를 받는 존재다. 귀족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만큼 자신들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하다.

한데 용병 취급을 받았다. 당연히 그 높은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가 났다.

하지만 피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네.”

오히려 힘겹긴 해도 지크의 말을 인정했다.

“용병이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그러니 앞으로 명성을 높일 만한 일이 있다면 저희 학파도 생각해 주세요.”

“아, 저도 부탁드려요!”

첼시도 피나의 제안에 동참했다.

‘이 사람과 같이 행동한다면 공을 세울 수 있을 거야.’

지크와 만난 후부터 눈부시게 날아오른 루벨라의 위업을 보라.

전 성녀 후보였던 만큼 교단 내의 정보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던 첼시였다.

루벨라가 지크와 함께 행동했을 때 얼마나 막대한 공적을 얻어왔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루벨라에게 더 공적으로 밀리면 안 돼.’

안 그래도 심하게 차이가 나는데 여기서 더 차이가 벌어지면 정말로 희망이 없어진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미 끝난 경쟁이라고 여기고 있고 사실도 그랬지만, 그녀는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루벨라의 공적이 대부분 지크에게서 기원했으니, 그와 함께하기만 한다면 적어도 이 이상 밀리지는 않으리라.

지크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일단 둘 다 능력은 나쁘지 않지?’

원하던 파티원을 지크에게 모두 빼앗긴 그렌 제너드가 데리고 다니던 녀석들이다. 실력 하나는 확실하다.

물론 나이가 나이니만큼 아직 완성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출중한 실력을 자랑했다.

‘쓸 만하긴 해.’

머리 한편에 놓아두는 정도는 어려울 것 없다.

“필요하다면 부르마.”

그 정도의 언질은 줘도 될 것이었다.

* * *

지크는 루벨라, 와이그와 같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꽤 오랜만에 본 느낌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몇 번 얼굴을 본 다른 지인들과는 달리 그들은 전쟁 이후 처음으로 만난 상황이었다.

루벨라와 와이그는 별말 없이 차를 홀짝였다. 한 모금 한 모금 따뜻한 찻물이 목 너머로 넘어갈 때마다 두 사람의 안색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요새 많이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지크의 질문에 루벨라가 멈칫했다. 크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반쯤 빈 찻잔을 컵받침 위에 올려놨다.

“그래 보이나요?”

“네.”

하는 행동은 둘째 치고, 퀭한 눈두덩이만 보더라도 그녀의 상태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옆에 앉아 있는 와이그는 겉모습은 멀쩡했지만, 눈빛이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고된 수련과 막대한 성력으로 웬만하면 피로를 느끼지 않을 와이그조차 저런 꼴을 하고 있는 걸 보면 현재 카르위먼 고위층의 업무 강도가 상당히 고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크 님의 말씀대로예요. 요새 정말로 바빠 죽겠어요.”

루벨라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성녀라는 입장상 웬만하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루벨라가 이럴 정도면 확실히 요새 피곤하긴 한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한마디 할 와이그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도 지금은 루벨라가 풀어져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지크는 피로의 원인을 쉬이 짐작했다.

“배신자들 때문이죠?”

“네.”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그렌 제너드와 전 카르위먼의 신관 우르원 루스가 밸리드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카르위먼은 당연히 발칵 뒤집혔다.

명예 성기사는, 그 대상이 카르위먼의 신앙을 갖기만 한다면 바로 정식 성기사로 임명이 될 수 있을 만큼 카르위먼에서도 중요한 직책이다.

한데 그런 직책을 수여한 그렌 제너드가 밸리드의 주구로 판명이 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심각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 건은 차라리 나았다.

아무리 명예 성기사라고 해도 카르위먼의 정식 구성원은 아니다. 정식으로 성기사로서 임명을 받으려면 신앙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만약 명예 성기사가 삿된 마음을 가지고 카르위먼의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으려 한대도 검증 과정에서 걸러내면 된다.

때문에 그렌에 대한 일은 최소한 면피성 핑계는 내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르원 루스는 다르다.

그는 카르위먼의 정식 구성원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구성원 정도가 아닌, 다음 대 대신관으로 확실시된 데다 교황이 될 가능성도 상당히 높았던, 카르위먼의 핵심 인사였던 것이다.

한데 그런 인간이 밸리드의 주구로 밝혀졌다.

맹세코 그건, 카르위먼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었다.

당연히 카르위먼은 내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밸리드의 뿌리가 자신들의 몸속까지 뻗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어떻게든 그걸 뽑아버려야 했다.

때문에 현재 카르위먼은 대대적인 내부 검증이 이뤄지고 있었다. 루벨라와 와이그의 피로 원인도 바로 그것이었다.

“힘드시겠습니다. 내부에 있는 기생충들을 제거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에요.”

초췌한 겉모습과는 달리 루벨라의 눈빛은 화르르 불타고 있었다.

“밸리드의 더러운 무리들이 감히 신성한 카르위먼 내부를 거닐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려요.”

그건 끔찍한 벌레가 피부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혐오감을 주는 일이었다.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몸을 좀먹는 기생충을 가만히 둘 순 없죠.”

와이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루벨라의 말에 열렬히 동의했다.

“쉬는 건 나중에 해도 돼요. 일단 그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게 먼저예요.”

“역시 루벨라 님은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저도 이걸 기쁘게 건네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크는 옆에 두었던 봉투를 루벨라 앞에 내려놨다.

“이건 뭔가요?”

“제가 루벨라 님을 뵈러 온 이유 중 하나입니다.”

루벨라는 바로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서류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지크를 한 번 쳐다본 그녀가 서류를 꺼내 들여다봤다. 와이그도 살짝 상체를 움직여 서류의 내용을 확인했다.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이, 이건….”

“지금 카르위먼에 꼭 필요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지크는 찻잔을 들어 느긋하게 다향을 맡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지크처럼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이, 이게 정말인가요?”

“물론입니다.”

그건 카르위먼 내에 있는 밸리드 첩자들의 명단이었다. 지크의 말대로 지금 카르위먼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

“물론 내부 확인을 거치시겠지만, 적중률은 100%라고 자부합니다.”

출처가 라일라의 지식이니 망설임 없이 확언할 수 있었다.

“당장 확인해 볼게요!”

루벨라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지크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게 더 있습니다. 그것까지만 듣고 가시죠.”

루벨라는 바로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눈에 피로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대신 부담스러울 정도의 반짝임만이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지크가 다음에 줄 선물을 확연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지크는 루벨라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혹 밸리드 총단의 공격에 대해 관심 없으십니까?”

“…지크 님에게 키스해도 될까요?”

자신을 카르나에게 바친 루벨라였지만 지금만큼은 지크에게 찐하게 키스를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크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관심을 보이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제 입술은 임자가 생긴 후라서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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