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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53화 (553/628)

제553화

지크의 숙적이자, 지크가 그렇게 싫어마지 않는 그렌의 동료들이었던 첼시와 피나.

그걸 알기 때문일까. 피나는 물론이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첼시의 얼굴에마저 긴장감이 엿보였다.

번뜩이는 판단으로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칭에 끼어들 수 있었지만, 그녀들이 그렌의 동료이자 스틸월 백작가의 적이었던 것도 분명했다.

백작가에 머무르며 일신상의 부자유 같은 건 없어도 자신들에게 향하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다는 건 그녀들도 잘 알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 불편한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꾹 참고 백작가에 머물렀다. 그녀들이 원하는 바를 위해서.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다잡았다 해도 지크와 상대할 때는 절로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들이 따라다니던 그렌을 지크가 싫어한다는 건 그녀들도 잘 알고 있다.

사람이 싫으면 그가 갖고 있는 물건마저 혐오스러워지는 법이다. 지크가 그렌의 동료들이었던 자신들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렌을 제외하더라도 그녀들과 지크는 결코 좋은 인연을 갖고 있지 않다.

첼시는 루벨라와 사이가 굉장히 나빴고, 피나는 윌위스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주범의 손녀이자 소속 학파의 사람이기도 했다.

직접적으로 지크와 악연이 있는 건 아니지만 꺼려질 이유로는 충분했다.

“너희들이군.”

그러나 지크의 반응은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여긴 무슨 일이냐?”

성격답지 않게 웬만한 이에게는 꼬박꼬박 존대를 해주는 지크였지만 그녀들에게는 반말을 사용했다.

얼마 전까지 적이었던 영향이었다. 둘 또한 별다른 불만을 갖지 않았다. 불만을 가졌더라도 감히 항의하지 못했겠지만.

“드래곤의 사체를 보러 왔어요.”

지크가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내심 안도하며 첼시는 조금 더 친근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너희들 몫이 얼마나 될까 추측하러 온 건가?”

“사실 그래요.”

말하면서도 첼시는 지크의 눈치를 봤다. 피나 또한 마찬가지.

아무리 드래곤을 잡는 데 도움을 줬다고 해도 얼마 전까지 적이었던 자신들이 드래곤 사체의 소유권을 주장하면 지크가 불쾌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도 필사적이었다.

희귀하다 못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바로 드래곤의 사체다. 소량이라도 얻는다면 분명 어느 쪽으로든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어 간신히 반등의 계기를 잡았을 뿐, 아직도 그녀들의 미래는 뿌연 안개 속에서 걷는 것과 다름없었다.

어떻게든 도움이 될 만한 게 필요했다.

“그러냐.”

지크는 그렇게만 말하고 다시 드래곤의 사체에 눈을 돌렸다.

“…불쾌하지 않으신가요?”

“내가 왜?”

오히려 질문한 첼시가 당황할 만큼 지크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그… 우리는 적이었잖아요?”

“그게 너희들이 드래곤을 토벌할 때 준 도움과 관련이 있나?”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부랴부랴 끼어든 두 사람이지만, 그녀들은 확실히 제몫을 다했다.

피나는 윌위스, 엘레나와 함께 드래곤의 마법을 극렬히 견제했다. 한 번에 다섯 개의 마법이 한 번에 몰아치는 드래곤의 공격은 그 자체만으로도 재앙에 가까웠다.

그걸 대폭 깎아내는 데 협력한 피나의 공적은 확실히 인정할 만했다.

첼시의 공은 더 컸다. 마지막 특수 브레스를 견딜 때, 루벨라는 파티 전원의 회복을 맡았지만 첼시는 오로지 지크의 회복만을 전담했다.

성녀 후보로까지 선정된 그녀의 수준 높은 회복을 혼자서 받은 지크는 그 덕에 브레스가 끝나자마자 공세를 가해 드래곤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때문에 지크는 둘이 드래곤 사체의 권리 주장을 한다고 해서 흰 눈으로 볼 생각은 없었다.

“사체는 드래곤을 토벌한 자들이 공적에 따라 나누기로 했고, 너희들은 확실한 공적이 있다. 자기 몫을 받아 가겠다는데 뭐라 하겠어?”

첼시는 무척이나 기뻤다.

“그럼 어쨌든 저희도 사체를 가질 수 있다는 거죠?”

드래곤 슬레이어 대표인 지크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녀들이 드래곤의 사체에 기웃거리는 걸 좋지 않게 보는 사람이 있는 게 사실인지라 내심 불안감을 갖고 있던 첼시였다.

하지만 지크의 말에 그 불안감이 사르르 사라졌다. 그 누가 지크의 말에 토를 달겠는가. 하물며 지크의 말은 분명 사리에도 맞았다.

“공적 이상을 욕심내지 않는다면 그렇지.”

“절대 욕심내지 않아요!”

솔직한 마음이야 자신들에게 떨어질 몫은 물론이고 가능하면 조금 더 갖고 싶긴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상 괜히 그런 욕심을 부렸다가는 자신들의 몫마저 빼앗기기 십상이라는 걸 첼시와 피나는 잘 알았다.

지크가 그녀들의 편을 들어주는 호기를 지나친 욕심으로 내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었다.

“뭐, 그것도 일단 정확한 지분이 정해진 후에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지크는 드래곤의 비늘을 주먹으로 통통 쳤다.

“…뭔가 의외네요.”

지크와 첼시의 대화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던 피나가 말했다.

“뭐가 말이지?”

“그래도 얼마 전까지 적이었는데 이렇게 시원하게 인정해줄 줄은 몰랐어요.”

“자, 잠깐, 어쿠스 씨!”

첼시가 피나의 옷자락을 당겼다.

지크가 그녀들의 공적을 인정해 준 상태에서 괜한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괜히 지크가 불쾌해하며 방금 전의 말을 철회할 수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그녀들이 드래곤 토벌에 도움이 됐다고 해도 지크의 말 한 마디면, 그녀들의 처지상 바로 공적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이 고개를 들기라도 한 것인가.

‘하여간 이래서 마법사들이란…!’

첼시는 온갖 욕설을 한껏 높은 목소리로 째져라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피나를 말렸다.

그 모습을 보고 지크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 나와 뭔가 직접적으로 원수를 진 게 있냐?”

“아뇨, 그럴 리가요! 애초에 우리 얼굴 몇 번 본 적도 없지 않나요?”

첼시가 급히 대답했다.

“그럼 아직 그렌 제너드 그놈이 좋냐?”

“아뇨.”

피나는 정색했다. 그놈과 손을 잡은 대가로 하마터면 진창보다 더 아래인 지하 어딘가에 처박힐 뻔하지 않았던가.

피나와는 다르게 첼시는 웃는 낯을 유지했다.

“콱 어디 가서 객사나 해버렸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렇다고 좋은 말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밸리드와 손을 잡고 있었다니. 카르위먼의 성녀를 꿈꾸던 그녀에게는 웬만한 재앙보다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가 부득부득 갈릴 지경이었다.

“그거면 됐어. 어차피 라라 브라우닝도 일행으로 받았는데 너희들이라고 다를까. 개인적으로 너희들에게 직접적인 악감정은 없으니 심하게 걱정할 필요 없다.”

물론 그녀들이 주제도 모르고 지크를 분노하게 만들었다면, 지금껏 상대해온 적들과 마찬가지로 온갖 조롱과 멸시와 핍박으로 정신을 곱게 빻은 후 죽음이라는 해방을 약으로 줬을 테지만.

어쨌든 첼시와 피나는 마음을 놓았다. 적어도 지크가 자신들을 적대하는 건 아닌 게 확실해진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인정해주는 건 어디까지나 드래곤의 사체 지분뿐이야. 너희들이 해결할 문제는 드래곤의 사체뿐이 아니지 않냐?”

드래곤의 사체를 인정받았다는 기쁨에 환하던 그녀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크의 말대로 그녀들의 앞길은 험난한 바다 그 자체였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칭과 드래곤 사체의 일부를 얻은 것은 말 그대로 바다에서 그나마 안정적으로 항해할 수 있는 배 한 척을 얻은 것 정도와 같다.

그녀들이 건너야 하는 험난한 바다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흠흠, 지크 님?”

첼시가 다시 얼굴에 미소를 물들이고 입을 열었다.

“저기, 제가 카르위먼을 나왔다는 사실은 아시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가증스러운 그렌 제너….”

이때 첼시는 이를 한 번 갈았다. 그녀의 그렌에 대한 인상이 어떤지 확실히 알려주는 광경이었다.

“…드에게 속아서 그런 거라서요. 그래서 카르위먼에 복귀하고 싶은데, 어떻게 지크 님께서 조금 힘을 써주실 수 있지 않나요? 그 왜, 우리는 전우잖아요?”

피나의 시선이 첼시의 뒤통수에 박혀들었다.

지크가 자신들에게 별다른 악감정이 없다는 걸 알자마자 저렇게 바로 태도가 변하다니.

‘원래 저 사람 싫어하지 않았나?’

루벨라를 도와준 인간이라며 지크에 대해 투덜거리던 소리를 들었던 것이 몇 번이던가.

한데 지금 그 대상에게 아양을 떨며 부탁을 하고 있다.

뻔뻔하다. 그 단어만큼 지금 장면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뻔뻔하군.”

지크의 생각도 같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크의 얼굴에 불쾌감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뭐, 너 같은 녀석 싫어하진 않아. 보고 있으면 재미있어서 말이야.”

“그럼?”

“얘기는 해두마.”

첼시는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얘기를 꺼내 본다고는 했지만 지금 지크의 위세를 생각하면 그의 한 마디는 천금과도 같은 가치를 지녔다. 카르위먼은 지크의 얘기를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지크와의 인연을 강하게 만들어 조금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장밋빛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지크의 다음 말은 첼시의 기분을 사정없이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성녀는 슬슬 포기해라.”

“…그건 명령이신가요?”

“아니, 조언. 생각을 좀 해봐. 네가 루벨라를 이길 수 있겠냐?”

“…예전에는 저한테 아무 소리도 못 하던 애였거든요?”

루벨라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도 살짝 약이 오른 모양인지 제법 반항적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지크의 코웃음이었다.

“이제는 아니잖냐. 오히려 저래도 성녀를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살짝 과격해지기까지 한 것 같은데.”

“…….”

첼시는 예전에 루벨라에게 얻어맞았던 때를 기억했다. 그때를 기점으로 루벨라는 확실하게 변했다.

“예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 네가 카르위먼으로 복귀해서 루벨라에게 기어오르는 즉시 작살나게 밟힐걸? 내기해도 좋아.”

“…젠장.”

차마 반박을 하지 못한 첼시는 나직이 욕설만 내뱉었다.

“그래도 하려면 해. 내가 뭐 네 가족도 아니고 이래라저래라 할 사이는 아니니까. 다만 나중에 루벨라에게 얘기나 들려 달래야겠군. 널 어떻게 밟아댔는지. 분명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거든.”

“저… 혹시 한 명 더 카르위먼에 복귀 부탁을 해주셔도 될까요?”

“누군데?”

“윈스틴 다이너 경이라고 하는데요.”

“네가 성녀 후보였을 적 호위기사로 있던 사람이로군.”

첼시와 함께 카르위먼을 그만둔 모양인데 용케 이번 전쟁 때 죽지 않은 모양이다.

카르위먼에 복귀한다고 해도 그녀의 기반은 죄다 날아가 있을 확률이 높으니 그나마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함께 복귀시켜 힘으로 삼을 꿍꿍이인 것이 훤히 보였다.

“너는 그나마 드래곤 퇴치를 같이 했다는 인연이라도 있지. 그 인간이 나랑 뭔 인연이 있냐?”

예전 스틸월 영지의 밸리드 은신처를 찾아다닐 때 함께 행동을 한 적은 있지만 그건 인연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만남이다.

“안 돼.”

지크의 단호한 말에 첼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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