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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52화 (552/628)

제552화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지크는 둘과 대화를 나눴다.

그들과의 대화가 지속될수록 지크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 없어도 이 녀석들은 잘 살겠군.’

물론 위기에 빠진다면 직접 나서서 드래곤 슬레이어의 힘으로 감히 녀석들을 위협하는 놈들을 사정없이 때려눕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얼마 안 되어 둘은 스틸월 영지를 떠났다.

둘 다 고위 귀족. 게다가 요하임은 드라큘 백작가의 주인이다. 자기 가문을 오래 비워둘 수는 없었다.

“저희 결혼식 때는 꼭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일라 씨도 꼭 같이 데려와 주세요.”

이별을 아쉬워하면서도 재회를 기대하며 그들은 떠나갔다.

‘결혼식이라. 꼭 가야겠는걸.’

그러니 그 전까지는 모든 걸 끝내야 했다.

스틸월 영지에 들른 왕세자도 만나봤다. 한 번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왕세자는 꽤 친근하게 지크를 대했다.

다만 예전과는 달리 그는 지크를 향해 존대를 사용했다. 달라진 지크의 위상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는 새로운 작위를 약속하며 지크를 끌어들이려 했다. 일단 백작부터 시작해서, 최후에는 공작의 자리까지 올려준다는 파격적인 약속을 했었지만 지크는 관심 없었다.

꽤 끈질기게 설득을 하던 왕세자였지만 지크가 진심으로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은 후에는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그래도 다행이로군요. 진심으로 귀족 자리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대가 다른 왕국의 귀족으로 간다면 우리 왕국으로서도 굉장히 곤란하니 말입니다.”

크로뇽 왕국 출신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타국의 귀족이 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크로뇽 왕국의 위신에 엄청난 타격을 준다.

게다가 만약 그 왕국이 크로뇽 왕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곳이라면 안보에도 엄청난 부담이 걸릴 터.

크로뇽 왕국의 전력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스틸월 백작가가 타격을 받는다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스틸월 백작의 차별에 드래곤 슬레이어가 다른 왕국으로 갔다는 스캔들은 엄청난 정치적 압박이 될 테니.

그나마 지크가 다른 왕국으로 가지 않는다면 드래곤 슬레이어는 정치적 직위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라는 면피성 발언이라도 할 수 있다.

“걱정 마십시오. 귀족은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 말 지켜주길 꼭 좀 부탁드립니다. 다른 왕국에서 그대에게 좀 관심을 보여야 말이죠. 특히 세스틸 왕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세스틸 왕국. 플로드 백작가가 속해 있던 나라로, 당연히 크로뇽 왕국과의 사이는 극도로 나쁘다.

“세스틸 왕국이 말입니까?”

“피네 자작가를 제외하면 이번 전쟁 때 스틸월 백작가를 쳐들어온 병력들은 죄다 세스틸 왕국 소속이었잖습니까. 당연히 드래곤 슬레이어와의 관계가 최악이 됐으니 왕국이 뒤집힐 만도 하죠.”

왕세자가 실실 웃는 게 적국의 곤란이 무척이나 기꺼운 모양이었다. 실로 모범적인 왕족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전 세스틸 왕국에 그다지 악감정은 없습니다만.”

“아쉽게도 정말 그런 것 같군요. 하지만 저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고작해야 주먹으로 치고받기만 해도 상대에 대한 호감이 밑바닥까지 떨어지기에는 충분하다.

한데 그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였지 않은가. 오해할 여지는 충분했다. 게다가 이번 전쟁의 명분을 철저하게 스틸월 백작가가 쥐고 있음에야.

“슬쩍 들어온 정본데 저들은 당신에게 플로드 백작가를 잇는 걸 제안할 모양이더군요.”

“과연. 머리를 썼군요.”

플로드 백작이 자살함으로써 플로드 백작가는 멸망이 확정된 상태다. 플로드 백작의 자식은 죽은 지크의 어머니뿐이었고 가까운 친척도 없다.

물론 찾아보면 멀고 먼 친척은 있을 것이다. 원래 같았으면 그들이 백작가를 잇겠다고 득달같이 달려왔겠지만.

그러나 이번 사태 때문에 플로드 백작가의 이미지는 땅으로 떨어진 걸 넘어 지저까지 뚫고 들어갔다.

플로드 백작가의 작위와 영지가 욕심이 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선뜻 이어받는다고 하기에는 밸리드의 주구였다는 인상이 너무 뿌리 깊다.

그러나 지크가 플로드 백작가를 잇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플로드 백작의 음모를 깨부순 것이 바로 지크다. 게다가 그는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이며 카르위먼과 긴밀한 인연을 맺은 것으로도 알려졌다.

그런 그가 플로드 백작으로 임명된다면 밸리드의 주구라는 이미지가 완전히 씻겨 내려간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대표를 세스틸 왕국의 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이익은 두말할 것도 없다.

더욱이 지크는 플로드 백작의 외손자가 아니던가. 그에게 플로드 백작 자리를 제안하는 명분은 차고 넘친다.

“받아주기만 한다면 주변 영지를 합쳐서 최대 공작가까지 올려줄 용의도 있는 모양이더군요. 어차피 플로드 백작가 주변 영주들은 대부분 플로드 백작가와 함께 스틸월 영지를 쳐들어왔다는 약점이 있으니 거절할 수 없죠. 오히려 그걸로 자신들의 죄를 씻을 수 있다면 앞다퉈 영지를 떼어줄 겁니다.”

“그것참, 전부 공작이라는 직위를 너무 값싸게 넘기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 정도로 드래곤 슬레이어의 대표라는 실력과 명성은 미치도록 매력적이라는 겁니다.”

“흥미 없습니다.”

원한다면 스틸월 백작가를 빼앗을 수도 있는 지크다. 이제 와 플로드 백작가라니. 콧방귀도 나오지 않는다.

“그 얼굴을 보니 정말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군요. 정말로 다행입니다.”

다른 왕국에 지크를 빼앗기는 것 자체도 크로뇽 왕국으로서는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세스틸 왕국에 빼앗기는 건 그중에서도 최악의 상황이다.

그 막대한 무력이 적으로서 자신들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지크가 세스틸 왕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적다는 내부적 판단이 있긴 했지만, 그 작은 가능성만으로도 왕국이 경기를 일으킬 만큼 최악의 미래였다.

‘진작에 스틸월 백작가 쪽으로 참전을 해 인연을 맺어둬야 했거늘.’

왕세자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 누가 전쟁이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리라고 생각을 했는가.

특히 드래곤의 등장이라니. 그리고 그 드래곤을 때려잡고 드래곤 슬레이어가 탄생하다니.

만약 이 상황을 예측한 자가 있다면 왕궁의 기둥뿌리를 모조리 뽑아내는 한이 있더라도 왕국에 모셔야 할 것이다.

“그래도 혹시 나중에 귀족의 자리에 관심이 생기면 꼭 우리 왕국에 오길 부탁합니다. 대우는 최고로 해드리죠. 당신의 입장상 스틸월 백작가와 어색할 수도 있으니 영지도 최대한 먼 곳에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쓸모없는 땅을 주는 일 따위도 절대 없을 거고 말이죠.”

“그럴 일은 없을 거라 봅니다만, 그럴 기분이 들면 긍정적으로 검토하죠.”

“고맙습니다.”

원하던 답변은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지크가 다른 왕국으로 간다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는 걸 위안 삼은 왕세자는 다른 용건을 꺼냈다.

“그리고 하나 더 요청할 게 있습니다만. 드래곤의 사체는 어떻게 할 겁니까?”

전설 속 존재인 드래곤의 사체다. 학구열에 불타는 마법사든 가문의 상징으로 두고 싶은 귀족이든 수집욕에 빠진 상인이든 그 존재를 얻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전설에서도 드래곤의 살과 뼈, 이빨, 비늘 등은 아주 귀중한 재료로서 취급하지 않던가.

드래곤의 사체는 백작가의 군이 가져와 저택에 보관 중이었다.

“스틸월 백작은 그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이 없다 하더군요. 드래곤을 직접 잡은 사람들에게 권리가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날 만도 하건만 스틸월 백작은 딱 잘라 그렇게 정했다.

일단 스틸월 백작가의 기사 몇 명도 드래곤 토벌에 참가했으나 백작은 그것마저 소유권의 주장을 거부했다. 철저하게 기사들 개인의 몫이라고 정한 것이다.

당연히 드래곤의 사체를 원하는 이들은 드래곤 슬레이어 개인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접촉을 원하는 상대는 당연히 지크였다.

아직 드래곤 사체의 지분이 명확히 정해지진 않았지만, 그의 지분이 가장 크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왕세자가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지크는 이번에도 왕세자가 원하는 걸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전 팔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돈에 그렇게 욕심이 많은 것도 아닌 데다 풍족하게 쓸 만큼은 충분히 있다.

게다가 이번 전쟁의 공으로 스틸월 백작이 주는 포상금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다른 이권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죽어도 드래곤의 사체를 놓지 않겠다는 욕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팔아야 하는 이유도 없었다.

“당신의 공이라면 드래곤의 사체 중에서도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겁니다만, 그걸 다 갖고 다니기엔 힘들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뚜렷한 근거지도 없으니 말입니다. 마법 상자에도 저 큰 덩치는 들어가지 않을 텐데요.”

“보관할 곳이라면 있습니다.”

클로원의 유적에 넣어둔다면 누가 훔쳐갈 수 있을까. 윈두르가 없으면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곳이다.

왕세자는 지크에게 설득을 시도했다. 하지만 지크는 계속 시큰둥했다. 그에게는 별 이득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요.”

결국 왕세자는 한숨을 쉬며 포기했다. 평범한 이라면 왕국의 무력을 언급해서 반쯤 강탈하는 것까지 생각했겠지만, 드래곤 슬레이어의 대표인 지크에게 그럴 순 없었다.

말마따나 화가 난 지크가 왕궁으로 쳐들어온다면 과연 막을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럼 혹 나중에 드래곤의 사체를 처분할 일이 있으면 꼭 우리 쪽에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에게 판매 의사를 타진해 봐야겠군.’

하지만 다른 이들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마탑의 전 탑주나 엘프의 공주, 카르위먼의 성녀와 성기사 등, 지분이 큰 자들은 감히 왕세자라도 함부로 대우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한스나 스녹, 엘레나 등은 아예 자신들의 몫을 지크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나마 왕세자에게 다행인 것은 드래곤 사체의 구입을 희망하는 다른 이들도 똑같은 상태라는 것이다. 이득을 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이들에게 밀린 것도 아니다. 그 정도로 타협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렇게 왕세자는 별 소득 없이 지크와의 만남을 끝냈다.

* * *

지크는 드래곤의 사체를 올려다봤다. 죽은 지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났지만 드래곤의 사체는 부패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택에 보관 중이라고 하지만, 드래곤의 사체는 백작 저택의 마당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나마 주위를 지키는 병사들의 존재만이 이 사체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었다.

드래곤의 사체가 마당에 노출되어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체를 집어넣을 공간이 없는 것.

애초에 이곳까지 사체를 가지고 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노력이 든 것으로 알고 있었다.

지크는 주먹으로 드래곤의 비늘을 두드려봤다.

강한 반발력이 돌아왔다.

‘전설에서는 드래곤의 비늘로 무구를 만든다고 했지.’

이 비늘이 얼마나 무식하게 단단한지는 드래곤을 상대할 때 충분히 겪어봤다. 가공한다면 상당히 대단한 무구가 탄생할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왕세자가 직접 이걸 구입하고 싶다 했겠지.’

지크는 이것으로 당장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남에게 양보할 생각도 없었다.

‘살다보면 뭔가 쓸 일이 있겠지.’

없어도 상관없다. 없으면 없는 대로 끼고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지크가 드래곤의 사체를 가만히 감상하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병사들이 제지하지 않는 것을 보니 수상한 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이걸 몰래 가져가는 것도 힘들지.’

하지만 병사들이 감시의 눈길을 완전히 거두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지크가 찾아온 이들을 쳐다봤다.

“어머, 지크 님이 먼저 와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한 명은 한껏 미소를 띠며, 한 명은 머뭇거리며 지크에게 인사를 한다.

첼시 윈드네와 피나 어쿠스. 그렌의 옛 동료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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