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1화
그로부터 며칠 동안, 지크는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한스나 스녹, 라라의 훈련을 봐주기도 했고 레오나의 도시 관광에 동행하기도 했으며 그저 할 일 없이 저택의 정원을 거닐기도 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한량 짓. 전쟁의 뒤처리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상황이라 지크의 태평하고 한가로운 생활은 더욱 눈에 띄었다.
물론 지크를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설혹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도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상대는 전설의 드래곤과 정면으로 치고받은 인간. 그것으로 존경도 듬뿍 받는 인간이다.
만약 섣불리 그에 대한 불만을 꺼낼 시 지크보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맞아 죽을지 몰랐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과는 다르게 지크는 편하게 놀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지크가 침대 위에 앉아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기억들이 돌아다닌다. 그의 기억은 아니다. 본 적도 들은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낯선 기억들. 그런 것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또렷이 정리된 기억이 아니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형상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은 것.
차라리 어떤 모호한 감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그건 라일라가 보낸 기억이었다.
지크는 머릿속에 떠오른 정보들을 인식하고 구체화하여 정리했다.
라일라가 주로 보내주는 기억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하나는 모든 일의 흑막에 대한 정보.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렌에 대한 정보였다.
‘아주 쥐새끼처럼 도망가고 있군.’
그렌은 정신없이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추레한 행색이 거지꼴과 다름없었지만 그 난리 통에서 운 좋게 챙긴 토르니움만은 꾹 움켜쥐고 있었다.
모든 걸 잃어버린 지금, 유일하게 그에게 남은 물건이라서 애지중지하는 것일까. 어쩌면 토르니움이 그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얄궂게도, 그 마지막 희망은 그가 가장 증오하는 적에게 자신의 모든 행적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역시 그 흑막에게 가는 거겠지.’
지금 그에게 비빌 곳이라곤 그곳밖에 없다. 지크는 어서 그렌이 그곳에 도착하길 빌었다.
흑막의 본거지가 궁금한 것은 아니다. 그건 라일라가 보내준 정보에 있었다.
흑막의 정체도.
문제는 흑막의 세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녀석은 세계수의 본체를 끼고 있다.
지금까지는 브뤼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수의 마력을 다른 곳으로 유용하지 못했지만, 브뤼셀 시스템이 무너진 지금도 그렇진 않을 것이다.
세계수의 마력을 이용하는 상대라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군.’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만 해도 가공하기 짝이 없었다. 하물며 그 본체는 대체 얼마나 대단할까.
다른 걸 다 떠나서 시간을 되돌려 버린다는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일으키는 브뤼셀 시스템이 오롯이 세계수의 마력에 기대 작동했음을 생각하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드래곤은 나랑 마력이라도 비슷했지.’
세계에서도 최고라 할 수 있는 마력 보유자인 지크도 세계수의 마력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조차 되지 못한다.
물론 흑막도 세계수의 마력을 모두 이용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녀석도 그렌 제너드를 이용한다는 귀찮고 굴욕적인 데다가 위험 부담도 있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일부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때문에 그렌이 흑막에게 합류해 흑막의 행동을 속속들이 알려주는 걸 지크는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
다만, 그렌은 아직까지 흑막과 접촉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굼벵이 같은 새끼.’
그렌에게 욕을 한 번 하고 지크는 눈을 떴다.
당장 그렌이 흑막과 접촉을 하지는 못할 듯 보였다. 아무래도 며칠 더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어차피 녀석이 흑막과 접촉하는 순간을 꼭 봐야 하는 것도 아니다. 라일라가 정보로 잘 전달해줄 터.
지금은 다른 일을 먼저 해도 늦지 않았다.
* * *
“오랜만입니다, 지크 님!”
“오랜만이에요!”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한 쌍의 연인이 지크를 향해 인사를 건넨다. 회귀 전 그의 측근이었던 뱀파이어 요하임 드라큘과 서큐버스 이블린 루즈.
하지만 지금 그들은 드라큘 백작과 그의 약혼녀 루즈 후작가의 영애로서 지크를 만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지크도 미소를 지으며 둘을 맞았다. 비틀린 조소도 음흉한 냉소도 아닌, 훈훈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먼저 대단하신 위업을 이루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제 일찍이 지크 님이 대단하신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전설의 드래곤을 쓰러뜨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그들이 인사 후 가장 먼저 한 말은 역시 드래곤 토벌이란 위업의 찬양이었다.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한 일은 당당하게 자기가 했다고 인정하며 자랑질을 부끄러워하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아닌 걸 사실이라고 왜곡하는 이도 아닌 것이 지크다.
때문에 그는 남들이 들으면 겸양이라 칭할 말을 담담하게 했다.
“하지만 들은 바에 따르면 드래곤과 정면으로 치고받으며 승리의 길을 여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분은 지크 님이라고 하시던데요.”
“그건 맞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크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충분히 본인의 위업을 자랑하셔도 됩니다.”
요하임은 껄껄 웃었다.
요하임은 상당히 살이 붙어 있었다. 예전과 같이 비쩍 곯은 미라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원래의 큰 키에 살이 정상인처럼 붙자 오히려 풍채가 제법 커져 심약한 사람에게는 무형의 압박마저 들게 할 정도였다.
그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이블린은 여전히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귀족 영애의 모습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붙어 행복해하는 모습.
요하임의 움직임도 그녀를 하나하나 배려해주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연인의 모습.
거기엔 피에 취한 뱀파이어나 비뚤어진 욕정을 품은 서큐버스의 모습은 없었다.
“드라큘 백작님과 루즈 후작 영애도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지크는 두 사람과 소파에 앉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백작님이 직접 여기까지 오셔도 됩니까?”
전대 드라큘 백작이 해놓은 짓거리 때문에 드라큘 백작가의 입지는 무척이나 불안정했다.
예전 잔말피에서도 백작이라는 직위에 있는 그가 고작 도시의 괴사건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행차하지 않았던가.
그런 상황에 친우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사소한 이유로 직접 몸을 움직이다니.
그러나 요하임은 여유로웠다.
“제가 직접 이 자리에 온 건 지크님을 만나 뵈려는 목적이 가장 크지만, 정치적인 목적도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제 입지의 강화 때문이죠. 지금 드라큘 백작가는 놀랍게도 제가 백작가를 물려받은 이후 최고로 안정적인 입지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눈앞의 어떤 분 덕분이죠.”
“인맥이로군요.”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맥. 사람과의 관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서로 간에 도움을 주고받는 일이야 얼마든지 일어난다.
문제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도움을 줄 수 있는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상황에 더 커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능력 있는 사람과 친분을 쌓기를 원한다.
그리고 능력 있는 사람과 친분을 쌓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능력으로서 인정받는다.
지금껏 드라큘 백작가는 선대 드라큘 백작의 행적 때문에 그 친분을 쌓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있던 친분들도 모조리 없어진 상황.
평범한 사람들도 힘이 들 판국에 귀족인 그는 가문 자체의 존망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다.
한데, 그것이 지크의 존재가 부각되며 일순간 뒤집혔다.
세상에 탄생한 드래곤 슬레이어들. 그중에서도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지크와 요하임이 상당한 친분을 맺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다.
친분 정도가 아니라 요하임 드라큘의 편에 서서 드라큘 백작가의 음모를 밝혀내고 현 드라큘 백작을 앉힌 최고의 공신이 지크라는 사실까지 알려졌다.
당연히 지금껏 드라큘 백작가를 좋지 않은 눈으로 보고 있던 왕가와 여타의 귀족 가문들이 드라큘 백작가와 인연을 이으려 하기 시작했다.
드래곤 슬레이어와 연이 닿은 가문과 사이가 좋아서 나쁠 건 없다. 게다가 운이 좋아 드래곤 슬레이어와 직접적으로 인연을 만들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던가.
“때문에 지금 백작가 내에서 감히 제게 반항을 하는 인물은 없습니다. 제가 부탁을 한다면 천하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직접 검을 들고 모조리 박살내러 온다고 벌벌 떨고 있으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군요.”
요하임의 부탁이라면 지크는 언제든 그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의 머리를 예술적으로 조각내 줄 수 있었다.
“하하하, 다행히 그런 부탁을 드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지크 님의 활약에 입지가 단단해진 건 맞지만 그렇다고 얼마 전까지의 입지가 불안하기 짝이 없었던 것도 아니니까요.”
요하임의 능력과 노력은 드라큘 백작가를 서서히 안정시켜 갔고. 특히 루즈 후작가와의 약혼은 그의 입지를 더욱 안정시켜 줬다.
이웃 왕국의 직위가 한 단계 높은 가문과의 약혼이었던 것이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그렇죠. 정말 다행이죠.”
지크의 말에 요하임이 웃으며 맞장구친다. 하지만 만약 옆에 한스나 스녹, 라일라가 있었으면 생각했었을 것이다.
요하임이 말한 다행은 자신에게 별일이 일어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말이었지만, 과연 지크가 말한 다행이란 소리는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일까라고.
지크와 요하임이 그렇게 대화를 나눌 때, 이블린은 뭔가를 찾는 듯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저기, 지크 씨.”
이블린의 부름에 지크가 그녀를 쳐다봤다.
“라일라 씨는 어디 있나요?”
솔직히 지크를 참 좋아하는 이블린이었지만 그래도 라일라 쪽이 조금은 더 친근했다.
“녀석은 잠들어 있습니다.”
“잠들어요? 요새 좀 피곤한 일을 하시나 보죠?”
이블린은 라일라가 피로 때문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때문에 그녀의 태도도 가벼웠다. 어차피 며칠 머무를 예정이니 다음 날 보면 되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지크는 그녀의 착각을 정정해 주었다.
“네, 무척이나 피곤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깨어나지 못할 겁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지크의 말에서 심각함을 읽은 그녀가 정색하며 물었다.
“있었죠. 자세한 건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다만 녀석이 아주 푹 자고 있어서, 적어도 이번 기회에는 만나지 못하실 겁니다.”
“그거 설마 죽었다는 얘기를 돌려서 말하는 거라든가….”
“전혀 아닙니다.”
지크는 힘주어 부정했다. 이블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라일라라는 존재는 이블린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였던 것이다.
“그럼 언제 깨어나시나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아니, 정확히는 제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저 녀석, 잠꾸러기가 된지라 스스로는 못 일어나거든요. 하지만 최대한 빨리 깨울 생각입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크 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이유가 있겠죠. 아무쪼록 힘내세요. 저도 다시 한번 라일라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까요.”
“물론이죠. 저도 저 녀석에게 대답해줄 게 하나 생겨서 말입니다.”
“…대답?”
“네, 대답.”
예전에 라일라가 바랐던 대답을, 이제는 해줄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