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50화 (550/628)

제550화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제가 백작가를 이을 가능성이 사라졌으니 조금 더 침울해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비록 백작가와의 인연은 끊겼다지만 그래도 어렸을 적부터 뵌 분이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된 겁니다. 같은 고향에서 유명인이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은 자랑스러워하는데 저라고 다를까요. 손주를 무릎에 앉히고 위대한 드래곤 슬레이어의 어릴 적 모습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요”

“집사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럴 리가요. 저도 평범한 사람입니다.”

트레얼은 허허롭게 웃었다.

온갖 음습한 계략과 모략에서 스틸월 가문을 수호하던 노회한 가신인 그에게 겉과 속을 따로 놀게 하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말은 분명 진심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그저 지크의 성공을 기뻐해서만은 아니었다.

“제게 호감을 사 백작가 전체의 이미지를 끌어올리려고 하시는군요.”

백작가의 다른 이가 그의 일을 자신의 일인 듯 기뻐한다면 코웃음을 칠 지크였지만, 호감이 있던 트레얼은 달랐다. 그리고 트레얼도 그 점을 노렸을 것이다.

“이런, 들켰습니까?”

마치 못된 음모를 꾸미다 들킨 것처럼 트레얼은 과장스럽게 반응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웃고 있었다.

“어쩌겠습니까. 저는 스틸월 백작가의 가신인 걸요. 백작님과 도련님은 이제 완전히 인연을 끊으신 것 같고 아마 높은 확률로 도련님은 백작가로 돌아오지 않으시겠지만, 세상일이란 모를 일이죠. 관짝에 들어갈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어리석은 늙은이의 미련한 걱정이라고 생각하시고 이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것 또한 이용하는 것이겠죠? 없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니, 설령 의도를 들키더라도 상대의 기분이 심하게 상하진 않겠죠. 그거 바로 앞밖에 못 보는 멍청이들에게 사용하면 큰일 납니다.”

“당연히 사람에 따라 가려 사용하지요. 늙으면서 느는 것이라곤 흰머리와 잔걱정 그리고 사람을 보는 눈 정도니까요. 하지만 거기까지 파악하시다니, 정말로 아쉽군요. 도련님이 백작가를 이으신다면 스틸월 백작가의 명성은 지금보다 훨씬 더 솟아오를 텐데 말입니다.”

“이미 끝난 이야기니 적당히 포기하세요. 제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게 해놨으니, 그레이그 놈도 다음 대 백작으로서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요.”

그리고 트레얼은 다시는 백작위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둘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라곤 그저 소소한 잡담뿐이었다.

“음?”

복도 저편에 두 명의 사람이 보인다. 그들도 지크와 트레얼의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마님과 그레이그 공자님이시군요.”

“오늘은 저택에서 참 재미있는 만남이 많군요.”

지크와 트레얼은 천천히 두 사람에게 접근했다. 둘에게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둘이 서 있는 곳이 백작 저택을 나가기 위한 경로에 있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우연히 마주쳤다고 해도 아는 사람인 이상 상대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갈 수는 없었다.

정확히 말해서 트레얼만 그랬다.

“안녕하십니까, 마님. 그리고 공자님.”

“안녕하신가요, 트레얼.”

백작 부인이 우아하게 트레얼의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집사님.”

그레이그도 트레얼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영주의 부인과 그 아들 그리고 영주의 중신. 귀한 신분의 이들답게 그들의 인사는 무척이나 고상했다.

그러나 한 명. 여기에 그런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후웅!

지크가 다짜고짜 그레이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지크를 향해서도 우물쭈물 인사를 하려던 그레이그는 기겁하며 피했다.

후웅! 후웅!

지크는 몇 번 더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레이그는 아슬아슬하긴 해도 그 공격을 모조리 피해내는 데 성공했다.

“흠, 괜찮네.”

가만히 있는 상대에게 갑자기 주먹을 날린 사람답지 않은 태평한 목소리.

지크의 기습을 간신히 피한 그레이그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다. 하지만 그레이그보다 먼저 거칠게 항의를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인 게냐!”

백작 부인이 대경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당황과 분노에 지크는 느물느물한 말투로 답했다.

“그레이그의 치료가 잘된 건지 본 겁니다. 이 녀석의 치료를 제가 맡지 않았습니까? ‘어머니’께서는 조금 놀라셨을지도 모릅니다만, 어디까지나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지크의 어머니라는 명칭에 백작 부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레이그도 겨우 당황에서 회복해 항의했다.

“이게 무슨 놈의 확인이야!”

“어라? 이 녀석이 형을 못 믿네? 진짜야, 인마. 얼마 전의 그, 패배지향적이고 찌질하며 우울한 시절의 너라면 이렇게 잽싸게 반응했을 것 같아?”

그레이그는 답하지 못했다. 지크의 말이 이어졌다.

“게다가 피하는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반격 생각까지 하고 있더만. 그 시절의 너라면 절대 불가능하지.”

“…….”

뭐라 한 마디라도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그레이그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지크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거짓말이나 음해보다 차마 반박할 수 없는 사실로 두드리는 게 훨씬 아프다. 요 근래 지크와 어울리며 그레이그가 처절하게 깨달은 것이었다.

“어때요. 충분히 만족할 만하지 않습니까, 어머니? 아들인 그레이그가 너무 엇나가 어머니의 고심이 너무 컸던 것 같아 이렇게 직접 보여드리게 됐습니다, 어머니.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게 되어 정말로 기쁘네요, 어머니.”

누가 봐도 지크의 어머니 연호는 놀리는 것이었다.

트레얼은 지크를 말리려 들었다. 지크가 백작 부인에게 당한 짓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보복은 딱 장난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렇다고 스틸월 백작가의 집사 입장에서 백작 부인에 대한 모욕을 계속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옆에는 그녀의 아들인 그레이그도 있는 것이다.

“도련님, 이제 그만….”

“…그래, 그렇구나.”

트레얼도 그레이그도 심지어 지크조차도 그녀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 아들을 회복시켜 줬으니, 확실히 네게 고마움을 표해야지. 정말로 고맙구나.”

빈정거리는 것도 마음에 없는 말을 억지로 내뱉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엔 분명 진심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백작가를 지켜준 것도 고맙다. 백작가의 안주인으로서 감사하마.”

그녀가 지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지크가 눈을 깜박였다.

“그럼.”

백작 부인이 몸을 돌려 떠났다. 남은 세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야, 한 방 먹었네.”

지크가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백작 부인이 저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썩어도 백작가의 안주인이라 이건가.’

왕국의 강철벽이라 불리는 가문의 안주인이다. 적어도 귀족으로서 그리고 영주의 부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다.

가문이 지크에게 커다란 빚을 진 걸 알고 있는 그녀가 자신의 마음이 어떻든 지크에게 감사를 표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저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는 지크이니만큼 저런 태도를 취할 거라는 걸 예상치 못했을 뿐이다.

“도련님이 변하신 이후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는군요.”

“저도 예상치 못한 일격이어서 말이죠.”

그러며 지크는 떠나가는 백작 부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래도 절 싫어하는 건 여전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백작 부인과 다른 분들의 사정이 같지 않은 터라….”

“변호해줄 필요 없습니다. 저도 알고는 있으니까요.”

지크란 존재는 백작과 그레이그에게는 피가 이어진 가족이고 백작의 부하나 사용인들에게는 주군의 아들이다.

하지만 백작 부인과 지크의 관계는 무척이나 얇다. 피가 이어진 것도 아니고 모시는 사람의 자식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눈엣가시 같은 전 백작 부인의 아들이자 자식의 경쟁 상대. 게다가 사라 스틸월이 그녀를 음습하게 괴롭혔던 걸 생각하면 지크에 대한 미움을 깔끔히 정리했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하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저에 대한 백작가의 시선이 완전히 뒤바뀌어서 조금 불편한 감이 있었는데, 백작 부인이 그걸 조금 해소해 주는군요.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야 사람 사는 것 같죠. 오히려 옛날 생각나서 추억도 되새기고 좋은데요?”

지크가 꺼낸 ‘옛날’이란 단어에 그레이그가 어색한 표정을 짓고 트레얼이 작게 한숨 쉬었다.

지크가 세계에 명성이 자자한 드래곤 슬레이어의 대표가 된 지금, 그 시절은 백작가의 흑역사 자체였다.

지크가 그레이그를 쳐다봤다.

“어쨌든 아까 말했던 대로 치료는 잘 끝났으니 앞으로는 열심히 살아. 그때처럼 또 찌질대지 말고.”

“그게 치료야?”

“치료지. 네 상태가 고쳐졌냐, 안 고쳐졌냐?”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게 치료 행위라는 걸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백작가 사람들 중 내가 백작위를 물려받았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이 위대한 형님께서는 고작 이 쪼끄마한 영지를 물려받을 생각이 없어.”

트레얼이 헛기침을 했다. 쪼끄마한 영지라는 단어가 황당한 모양이었다.

“따라서 차기 스틸월 백작은 네가 된다. 그리고 이 위대한 형님과 항상 비교가 되겠지. 잘해봐. 당연히 이 형님이 이끄는 스틸월 영지보다는 모든 게 못났겠지만, 너라면 그런 수준에서라도 잘 이끌어나갈 수 있을 거다.”

“젠장, 조롱이야 응원이야.”

“응원이겠냐.”

지크는 그레이그의 어깨를 한 번 툭 치고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제게 볼일도 끝났으니 집사님도 이제 자기 할 일 하세요. 한창 바쁠 때 아닙니까.”

“알겠습니다.”

지크는 휘적휘적 백작가의 통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 조용하던 지크 스틸월이 저렇게 될 수가 있는 거야.”

그레이그의 한탄에 트레얼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괜찮겠어요?”

“뭐가 말입니까?”

“집사님은 형이 백작위를 잇는 걸 강력하게 바라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평범한 의문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저 말을 하는 사람이 차기 백작이 확실한 그레이그라는 걸 생각하면 섬뜩한 협박으로도 들린다. 다른 이라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변명을 해댈 것이다.

하지만 트레얼에게 겁을 먹은 기색은 없었다.

“본인이 싫다고 하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지크 도련님의 말씀대로 스틸월 백작가는 도련님이 이끌기에는 작은 것도 같고요.”

“나는 그 작은 영지를 물려받는 것에도 부담감이 느껴지는데 말입니다.”

이번 전쟁에 참여하고 그레이그는 영지를 이끌어 나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여러 모로 이번 사건은 그레이그에게 좋은 의미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공자님도 잘하실 겁니다. 비록 지크 도련님과 많이 비교당하게 되실 테지만요.”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 말이다. 하지만 그레이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비견될 만한 이를 찾는 것조차 힘들 인간이 그 인간입니다.”

지크의 계획대로 그레이그는 지크를 도저히 범접하지 못할 인간으로 격상시켜 열등감을 완전히 털어버렸다.

애초에 전설에나 나올 법한 위업을 달성한 인간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분통을 터뜨릴 인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형을 차별한 자가 어디 우리 모자뿐입니까. 스틸월 백작가에 있는 이들이라면 대부분 그 죄가 있을 텐데요. 그리 형을 백작위에 앉히고 싶었다면 애초에 차별을 하지 말았어야죠.”

‘이미 나름 명분을 세워 두셨나.’

나쁘지 않은 그레이그의 계획에 트레얼은 썩 만족스러웠다.

“그건 그렇죠.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저는 해당이 되지 않는군요.”

“집사님께는 앞으로도 고개를 들지 못할 것 같네요.”

한숨과 함께 나온 그레이그의 푸념에 트레얼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