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9화
집무실 안, 백작은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책상 한쪽에 산더미 같은 서류들이 쌓여 있다. 가장 위에 있는 서류에 백작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니 그쪽은 이미 처리한 서류를 모아 놓은 모양이었다.
그 반대쪽에도 서류가 한 무더기 보였다. 그쪽은 아직 처리하지 못한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너저분한 책상에 앉아 있는 백작의 모습은, 얼마 전 전쟁터에서 일군을 이끌던 용맹한 기사의 모습과는 동떨어져 보였다.
하지만 저 모습이 바로 한 영지의 영주된 자로서의 모습이었다.
영지의 운명을 건 전쟁의 뒷수습은 저렇게 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집무실 책상에서 서류와 씨름을 하며 진행되는 법이었다.
백작이 손에 든 펜을 한창 검토하고 있던 서류 옆에 놓았다. 서류 작업이 상당히 고됐는지 왕국에서도 내로라하는 기사인 백작의 얼굴에 짙은 피로의 그늘이 비쳤다.
“좀 늦었구나.”
“오는데 일이 좀 있어서 말입니다.”
지크는 딱 거기까지만 설명했다. 고위 귀족 상대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백작은 상관하지 않았다.
한스가 백작에게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문을 닫고 나갔다. 방 안에는 둘만이 남게 됐다.
“옆 나라의 드라큘 백작과 루즈 후작가의 영애가 오고 있다고 하는구나.”
“한스에게 들었습니다.”
“너를 보러 오는 모양이다.”
“그 친구들과 제가 인연이 꽤 깊죠.”
“그렇군.”
드라큘 백작에 대한 건 모르지만 루즈 후작 영애에 대한 건 백작도 직접 보았다. 드라큘 백작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아니더라도 굳이 그 일을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접대를 네가 할 테냐?”
“내가 왜 그럽니까? 일단 스틸월 백작가의 손님 자격으로 오는 걸 텐데요. 그냥 만날 자리나 주선해 주시죠.”
“그러마.”
백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라든가 싫어하는 걸 알고 있느냐?”
“글쎄요.”
녀석들의 취미나 취향 같은 거야 훤히 꿰고 있다. 같이 온 세상과 싸운 게 몇 년이었던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귀 전의 이야기.
‘지금 피로 가득 찬 욕조나 미남의 머리로 꾸민 화장대 같은 걸 들이밀어 봤자 경기를 일으킬 뿐이겠지.’
그걸 생각하면 지크는 자신이 삿된 길로 빠질 뻔한 두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했다는 것에 크나큰 보람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회귀 전의 그 녀석들은 아니었어.’
뱀파이어 요하임 드라큘과 서큐버스 이블린 루즈가 들었다면 남 말 하지 말라고 기함했겠지만, 아쉽게도 이 세계선에 그들은 없었다.
“인연은 깊다고 생각하지만 같이 지낸 기간은 짧아서 말이죠.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럼 일반적인 대우를 하는 수밖에 없겠군. 두 사람은 약혼 관계라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슬슬 결혼 날짜도 잡지 않았을까 생각되는군요.”
“그렇다면 두 사람의 방은 가까이 준비해 둬야겠군.”
그 뒤로도 백작은 지크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며 요하임과 이블린에 대한 접대 준비를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사이에 지크와의 만남 일정도 넣어 뒀다.
“한 가지 더 말해줘야 할 게 있다. 이번에 왕세자 전하께서도 오신다.”
“그 사람도 절 만나러 오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나한테 하는 것과는 달리 그래도 그 분의 앞에서는 예의를 지키거라.”
“일단 상황과 사람에 따라 태도를 변화시키긴 합니다.”
지크는 예전 수도에서 만났었던 왕세자를 떠올렸다.
‘나름 능력은 있어 보였지.’
한동안 백작가에 머무를 예정이니 만남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왕세자와의 만남을 그리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충 할 이야기를 전부 끝낸 백작이 지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뭘 그렇게 봅니까?”
지크가 삐딱하게 시선을 마주쳤다.
“그걸 아느냐?”
“질문 내용을 말하지도 않고 갑자기 아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합니까? 상대의 마음을 읽는 괴물과 얘기하고 계십니까?”
“너는 사라를 닮았다.”
“그건 압니다.”
사라 스틸월.
원래의 이름은 사라 플로드. 플로드 백작의 딸이자 스티월 백작의 전처. 그리고 지크의 어머니.
“누가 봐도 내가 아버지를 닮진 않았죠.”
우락부락한, 좋게 말하면 야성미 넘치고 나쁘게 말하면 거친 외모의 스틸월 백작과는 달리 지크외 외모는 깔끔하고 말쑥한 귀공자 스타일이었다.
외모도 제법 준수해 만약 착실하게 스틸월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성장하며 사교계에 데뷔했으면 뭇 귀족 영애들의 관심을 받았을 것이다.
“네 어미가 얼마나 악독한 여자인지도 알지?”
“알죠.”
“때문에 널 싫어했다.”
“그것도 압니다. 그리고 그게 피해를 입은 당시의 저에겐 얼마나 허튼 발언인지도 말이죠.”
내용은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지만 지크의 어조는 평탄했고 얼굴도 심드렁했다.
그때의 사정 따위는 지금 그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
“안다.”
이번엔 백작이 긍정했다.
“왜 새삼스레 그런 말을 꺼냅니까? 갑자기 관계 개선이라도 하고 싶어졌습니까?”
“관계 개선이라. 할 수 있다면 환영이지.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아직 정신 놓진 않으셨네.”
지크의 야유에도 백작은 여전히 담담했다.
“혹 백작위를 잇고 싶은 생각이 있느냐?”
“가만 보니 슬슬 정신을 놓아가는 단계인 것 같기도 하고. 정상인인 것처럼 연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당시 널 후계 자리에서 밀어내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너는 마력을 사용하지 못했었으니까. 스틸월의 후계자로서는 어울리지 않았어. 네 할아버지 일도 있었으니 네가 백작위를 이었다간 가문도 영지도 온전히 남아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거야 지크도 인정하는 바였다.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면 딱 그 정도까지만 너를 홀대했어야 했다는 거다. 후계자로서에 대한 부분만. 네 어미에 대한 악감정까지 너에게 투사하지 말고.”
“하지만 당신들은 그러지 않았죠.”
“그랬지.”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심리적 거리였다.
“이번에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
“모르죠. 인생이 어떻게 될지. 하지만 이번과 마찬가지로 지크 스틸월로서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스틸월 백작가와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요.”
“그렇군.”
“갑자기 왜 그렇게 감상적이 되었습니까? 내가 백작가에 보복이라도 할까 두려운 겁니까?”
“드래곤 슬레이어의 보복이라. 그래, 확실히 겁나는군.”
하지만 묘하게 씁쓸한 백작의 말은 그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리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구나.”
“드래곤의 등장보다 댁의 변화가 더 당황스러울 정도로는요.”
“간단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반쯤 쫓아낸 아들이 훌륭하게 성장해 돌아와 진창에 빠진 가문을 살려냈다. 손익을 계산하지 않는다면 귀족이 아니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한다면 인간이 아니지.”
“어머니가 가문에 끼친 해악이 있으니 딱 한 번은 도와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게 어찌어찌 확장되다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그렇다면 사라의 덕분인가?”
“그건 아니지 않을까요?”
“역시 그렇지?”
번번이 엇나가던 부자의 의견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후계자는 그레이그면 충분할 겁니다. 트라우마는 전부 뜯어고쳤으니 예전의 그 한심한 꼬라지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겠죠.”
백작은 고개를 주억였다. 이번 전쟁에서 그레이그는 나름 자신의 능력을 내보였다. 거기에 얼마 전까지 보여줬던 한심한 모습은 없었다.
“스틸월 백작가의 그릇에는 그레이그 같은 녀석이 딱입니다. 나 같은 존재는 스틸월 백작가에 너무 과분하죠.”
“얼마 전까지라면 호통을 쳤겠다만….”
지금의 지크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평생을 스틸월 백작가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자신의 가문이 그 어떤 가문, 심지어 왕가에도 꿇리지 않는다고 내심 자부하던 백작이었지만, 지크에게만은 그 자랑스러운 가문도 손색이 있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더욱 아쉬웠다.
지크 같은 존재라면 가문을 잇는 순간, 그 가문을 자기 그릇에 맞게 확대시켰을 테니까. 긍지 높은 스틸월 백작가가 한층 더 위대한 가문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건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 네게 스틸월 백작가는 너무 좁겠지.”
백작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의 덩치에 집무실이 가득 차는 것 같다.
딱히 기세를 일으키는 건 아니지만 그 사소한 움직임만으로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맥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것이 스틸월 백작이었다.
언제까지나 봉우리를 높이 세우고 고고할 것 같던 그가, 지크에게 허리를 숙였다.
“정말로 미안했다.”
그 스틸월 백작에게 이런 정중한 사과를 받은 이가 누가 있을까. 백작의 나이와 사회적 위치를 생각하면, 그의 이런 정중한 사과는 사과를 받는 이에게 오히려 압박감까지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지크는 당연히 그런 압박감 같은 걸 느끼는 자가 아니었다. 때문에 백작의 사과 그 자체와 순수하게 접할 수 있었다.
“뭔 놈의 장난입니까?”
물론 그게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등 쓸모없는 거라는 걸 알고는 계실 텐데.”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야 할 걸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지.”
백작은 허리를 폈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우리 가문을 지켜준 것에 감사한다.”
지크는 백작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게 자기만족이든 의미가 없더라도 해야 할 일이든 댁의 사과 따위는 내 알 바 아니지만, 감사는 받도록 하죠.”
“고맙다.”
백작은 다시 허리를 펴며 말했다.
“끝입니까?”
“그래, 끝이다.”
“그럼 가보죠.”
“그래.”
지크는 문을 열고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백작은 의자에 앉아 다시 펜을 들고 서류 작업을 시작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 마치 꿈이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은 덤덤하게 그저 자기가 할 일을 했다. 과연 부자라고 할까. 그런 점에서는 분명 지독하게도 서로 닮아 있었다.
하지만 딱 그것뿐.
지크와 백작의 인연은 그렇게 끊어진 채로 다시는 이어지지 못하고 굳어 갔다.
* * *
“말씀은 잘 나누셨습니까.”
지크가 백작의 집무실에서 나왔을 때 본 건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보이는 트레얼이었다.
“네. 볼일이 있다면 지금 들어가셔도 될 겁니다.”
“아닙니다. 그저 지나가던 도중에 도련님이 백작님을 뵈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제게 용건이 있습니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괜찮다면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실까요.”
“그러죠.”
둘은 천천히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지크는 흘끗 옆에서 걷는 노년의 집사를 쳐다봤다.
스틸월 백작가의 사람들 중, 지크가 악감정을 갖지 않았던 극히 소수의 사람들 중 한 명.
그가 딱히 지크의 편을 든 건 아니다. 그저 차별을 하지 않았을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지크의 호감을 사기엔 충분했다. 때문에 지크의 태도는 백작을 대하는 것보다 확실히 부드러웠다.
“백작님께서 후계자 자리에 대해 여쭤보셨으리라 보입니다만.”
“꽤 직접적이시군요. 그렇습니다.”
“대답을 여쭤도 괜찮을까요?”
“예상하신 그대로일 겁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것 참 아쉽습니다.”
“의외로 쉽게 물러나시는군요. 제가 백작위를 잇길 가장 바란 사람은 집사님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랬죠.”
트레얼은 복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을 바라봤다.
“도련님이 돌아오셨을 때 그렇게 말하셨죠. 스틸월 백작가는 도련님께 너무 좁다고.”
백작과 말다툼을 하며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솔직히 그 말에 공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스틸월 영지가 품지 못할 인재가 어디 있겠냐는 생각이었죠.”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네. 굉장히 바뀌었습니다.”
트레얼은 창밖에서 시선을 떼고 지크를 쳐다봤다. 그의 하얀 눈썹 아래 있는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도련님은 정말로 스틸월 백작가도 감히 품지 못할 위대한 이가 되셨더군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