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7화
지크가 유적을 나오자 앞에 한스와 라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잠깐 라일라 녀석 얼굴이나 보고 왔다.”
한스의 시선이 유적으로 통하는 구덩이를 쳐다봤다.
“당분간은 못 깨어나신다고 하셨죠.”
“그래.”
한스도 라일라와 정이 들 만큼 들었다.
그의 일생 중에서 라일라와 알고 지낸 기간이야 상대적으로 짧지만, 같이 겪었던 경험이 어디 보통 경험이던가.
“그렇게 걱정하지 마라. 저 녀석은 내가 어떻게든 깨우고 말 테니까.”
지크의 그 말은, 지금껏 지크가 했던 그 어떤 말보다도 더한 결의에 차 있는 것 같다고 한스는 느꼈다.
“그럼 정말로 걱정할 필요 없겠군요.”
“당연하지.”
그걸 믿음이라고 해야 할까. 신앙이라고 해야 할까.
이 일행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지크에 대한 일행의 믿음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라라는 잘 알고 있었다.
언뜻 비정상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그것이었지만, 서로 간의 믿음이나 신뢰라고는 밀알 한 톨만큼도 없었던 저번 파티를 생각하면 라라로서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너희는 순찰이라도 다녀온 거냐?”
“네.”
아무리 스틸월 역사상에서 손에 꼽히는 승리를 얻은 스틸월 백작가라지만 피해가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스틸월 백작군에서도 상당한 피해가 났다.
게다가 외교적으로 사태가 완전히 수습될 때까지는 피네 자작령과 플로드 백작령에도 군을 주둔시키기도 해야 해 병력이 부족했다.
때문에 백작의 요청을 받고 한스는 비올사의 치안 유지 및 유사 사태 대비에 한 팔 보태고 있었다.
“백작님께서 지크 님께도 요청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씹었다.”
한스도 라라도 동시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전쟁 도와줬으면 됐지 뭘 더 부려먹으려고. 애초에 이 전쟁도 난 끼어들 이유 없었어.”
“그렇긴 하죠.”
때문에 현 백작령에 있는 이들 중 최강의 실력자이자 대표적인 드래곤 슬레이어로 명성이 퍼져 존재만으로도 그게 범죄자든 타 세력이든 강력한 억제력이 될 수 있는 지크는 유유자적 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지크에게 뭐라 하는 자도 없었다.
“백작님께서 지크 님을 부르셨습니다.”
“난 그 작자 얼굴 보기 싫은데?”
지금까지야 필요가 있어서 그의 명령을 들어줬다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크의 반응은 한스는 물론이고 백작도 이미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한스는 바로 백작이 알려 준 추가 정보를 입에 담았다.
“드라큘 백작님과 루즈 영애께서 오시고 계시답니다.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으시다는군요.”
드라큘 백작가와 루즈 후작가는 스틸월 백작에게도 무척이나 중요한 가문이었다.
왕가마저 원군을 보내는 걸 머뭇거리고 있을 때 온갖 지원을 해준 가문인 것이다.
드라큘 백작은 타국의 귀족이었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오히려 크로뇽 왕국과 전혀 연관이 없는 타국에서 온 지원인 만큼 더더욱 고마웠다.
때문에 그 두 가문에서 사람이 온다고 했을 때, 전쟁 후 아직 혼란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바로 승낙을 했다.
물론 두 가문과 계속 친분을 쌓으면 좋다는 귀족적인 판단도 있었다.
“그 사람들이 온다고?”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좋아. 가보지 뭐.”
하지만 승낙을 했다고 해도 백작의 명령을 받은 다른 사람들처럼 지크의 움직임은 재빠르지 않았다.
설렁설렁 걷는 것이 무슨 나이 먹은 노인이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네 옛 동료들은 어때? 종종 찾아간다며?”
지크가 라라를 향해 물었다.
첼시 윈드네와 피나 어쿠스는 비올사에 머물고 있었다.
일단 이번 일은 플로드 백작과 피네 자작의 잘못이었다로 방향이 잡히는 중이었지만 그렇다고 적이었던 자들과의 긴장 상태가 완전히 해소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달랐다. 어쨌든 마지막에 지크를 도와 드래곤의 상대를 한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녀들도 드래곤 슬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때문에 그녀들은 비올사에 머무르는 게 허락됐다.
물론 약간의 감시가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네. 두 사람 다 지크 씨를 뵙고 싶어 하더군요.”
“그 녀석들이라면 그렇겠지.”
자신들의 명성을 올리기 위해 움직이던 녀석들이다.
그 짧은 시간 내에 사태를 파악하고 바로 지크 일행의 편에 서서 드래곤에 대적한 판단력은 지크도 나름 감탄할 정도였다.
‘의외로 쓸 만한 놈들이야. 그러니 그렌 제너드 그 자식도 그 녀석들을 끼고 다녔겠지.’
그렌 제너드라는 다 썩은 줄을 잡고 있다가 판단력 하나만으로 앞으로도 다시없을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칭을 거머쥐게 된 두 사람이다.
명성이 완전히 시궁창에 쳐박히는 것을 막았고 역으로 상승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다른 드래곤 슬레이어들과는 달리 그녀들이 원래 적이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
게다가 그냥 세력이 다른 정도가 아닌, 그녀들이 몸담고 있던 세력이 밸리드의 주구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두 사람, 특히 첼시의 입장이 무척이나 난처하게 된 것도 분명했다.
일반인이 밸리드에게 속았다는 것과 카르위먼의 신도가 밸리드에게 속았다는 것은 완전히 다르니까.
물론 이번 전쟁을 앞두고 카르위먼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카르위먼에 미련이 뚝뚝 떨어진다는 것이야 한 번만 만나 보면 알 수 있었다.
‘흑막 놈을 상대할 때 써먹을 수 있을지도.’
그럼 그녀들은 그렇게 바라던 명성을 얻고 지크도 써먹을 손패가 늘어난다.
물론 첼시는 카르위먼으로 돌아가 루벨라를 밀어낼 생각이 가득한 것 같았지만.
‘루벨라가 밀려난다고?’
이 세상 온갖 쓸데없는 걱정을 전부 모아놓는다 하더라도 루벨라가 성녀 자리에서 밀려난다는 것보다는 생산적인 걱정일 것이다.
“나중에 한번 보지. 그래도 드래곤을 잡을 때 협력을 한 상대이니, 바라는 게 상식적인 거라면 들어줘야지.”
라라가 살짝 안도하는 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전 동료랍시고 챙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세 사람이 저택의 근처까지 걸어왔을 때였다.
퍼엉!
저 멀리서 화려한 불길이 솟구쳤다. 그 불길은 세 사람의 시선을 모두 잡아두기에 충분했다.
“연무장 쪽이로군. 그렇다면 엘레나인가?”
“드웨인 님이 마법을 봐주시는 모양입니다.”
지크의 발걸음이 연무장 쪽으로 변했다.
“지크 님? 백작님께서 기다리실 텐데요.”
“기다리라고 해. 싫으면 제가 만나러 오면 되지.”
그러며 휘적휘적 연무장으로 향한다.
한스는 한숨을 살짝 쉬고는 당황한 라라를 붙들고 지크를 따라 나섰다.
연무장에 도착하자 예상하던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윌위스의 지도하에 엘레나가 연신 마법을 뿌리고 있었다.
스녹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가볍게 엘레나의 마법 상대가 되어주고 있었다.
“아, 자네 왔군.”
지크를 발견한 윌위스가 잠시 휴식을 알렸다.
바로 엘레나에게 다가가는 스녹을 보며 윌위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스녹을 향해 말했다.
“어디 다친 덴 없는 게냐.”
내용은 이번 훈련으로 다친 곳이 없는지 걱정하는 것이지만, 어투는 ‘어디 한 군데 콱 부러졌으면!’ 하는 심정이 절절히 흘러나왔다.
“괜찮습니다. 엘레나가 잘 조절을 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로구만.”
한스는 ‘영혼이 없다’는 표현이 지금만큼 어울리는 장면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그만해요, 할아버지!”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느냐.”
손녀의 질책에 퉁명스럽게 대답한 윌위스지만 그래도 찔리는 건 있는지 슬그머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나는 그저 이 녀석을 걱정했을 뿐이… 악!”
스녹의 옆으로 다가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던 윌위스가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주변에서 맴돌던 윌위스의 손가락을 노웸이 콱 물었던 것이다.
물론 장난 반 분풀이 반으로 깨문 것이라 손가락에 살짝 이빨 자국이 났을 뿐, 커다란 부상을 당하진 않았다.
다만 고통은 상당히 큰 듯했다.
“이, 이놈의 쥐새끼가!”
윌위스가 지팡이를 허공에 붕붕 휘두르며 화를 내자 노웸은 스녹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쪼르르 엘레나의 몸을 타고 올라가 그녀의 어깨 위에 도달했다. 그리고 윌위스를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
손녀를 향해 지팡이를 휘두를 순 없던 윌위스는 부들부들 떨며 노웸을 노려보기만 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스녹이 놀라 황급히 윌위스의 손가락을 살펴보았다.
윌위스는 됐다는 듯 손을 몇 번 내저었다.
그도 손녀와 너무도 친해진 새까만 사내놈에게 조금 심술을 내보인 것뿐 정말로 스녹을 싫어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의 잘못이 조금도 없는 이 건에서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물론 조금 전 스녹에게 한 언행에 대해서 언급한다면 고개를 돌려 모르쇠로 일관하겠지만.
“엘레나의 마법을 봐주시고 계셨습니까?”
“그렇네. 본격적으로 마법을 사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저렇게까지 성장하지 않았나. 이런 때 열심히 가르쳐 놔야 더더욱 실력이 늘지.”
윌위스의 목소리에는 손녀에 대한 자긍심이 깊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한데, 라일라 양은 괜찮나?”
손녀를 이만큼이나 키워낸 훌륭한 스승이자 그녀 또한 뛰어난 마법사이니 윌위스도 당연히 그녀가 걱정되었다.
할아버지를 새초롬하게 쳐다보던 엘레나 또한 라일라의 이야기가 나오자 얼른 다가왔다.
“괜찮습니다. 조금 있으면 깨어날 거예요.”
“일단 그렇다면 다행이긴 하네만….”
다른 이들에게 라일라는 현재 유적 안에서 할 일이 있어 나오지 않는 걸로 되어 있었다.
괜히 사정을 설명하려면 클로원의 설명부터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윌위스를 포함한 눈치 빠른 몇 명은 라일라에게 뭔가 이상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들에게만 라일라가 정신을 잃고 있으며 유적 안에서 나올 수 없는 상태라는 것만 더 전했을 뿐이다.
“뭔가 도울 방도는 없을까요?”
엘레나가 물었다.
“당장은 없어. 나중에 할 일이 생기면 바로 알려줄 테니까 그 때까지 마법실력을 향상시켜 놓도록 해.”
“네!”
그녀의 뚜렷한 각오가 목소리에 가득 묻어났다.
“그러고 보니 드웨인 님도 요새 마법 연구에 공을 들이시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거 말인가?”
스틸월 백작에게 요청해 백작가 외진 곳에 있는 작은 건물 하나를 빌린 그는 엘레나를 교육할 때만 제외하면 항상 그곳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번에 크게 새로 개안할 사건이 있지 않았는가.”
“드래곤의 마법 말입니까?”
“맞네. 솔직히 나는 마법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느껴 왔다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마법을 잘 다루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해 왔지. 솔직히 엘프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다른 이가 말했다면 자만도 정도껏 하라고 말하겠지만, 저 말을 하는 상대가 윌위스라면 다르다.
후일 마도의 마왕이라도 칭해지는 그이니만큼 정말로 마법이라는 분야만큼은 최고를 자랑했다.
모든 기억을 되찾은 라일라라면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은 절대로 마법이라는 분야에서 윌위스를 능가할 수 없었다.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군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자네도 그 드래곤의 마법을 겪어보지 않았는가. 그 위력, 그 시전 속도, 동시 시전 개수. 그 어떤 것도 나보다 월등히 높았지 않은가. 나도 그저 내 세계에 갇혀 있었던 게지.”
“그야 드래곤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종족이 다르다고 해도 마법의 종주라고 자부했던 이상, 새로운 세계에 도전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