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6화
플로드 백작의 자살은, 어찌 보면 예상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일단 몰랐다는 이유로 발뺌이라도 시도할 수 있는 다른 귀족들과는 다르게 그가 밸리드와 손을 잡았다는 증거는 명백했다.
밸리드의 음모에 가장 정력적으로 가담한 것만으로도 의심을 받을 판에, 뚜렷한 증거까지 나와버린 상황.
그것으로 그의 운명은 끝났다.
귀족으로서만이 아니다. 카르위먼의 세력이 강한 이 세계에서 밸리드의 협력자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존재다. 그가 살아 있는 걸, 사람들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반항도 어렵다.
휘하 병력의 상당수가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도 플로드 백작이 밸리드의 협력자라는 정보에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왕가와 다른 귀족들도 그를 외면하고 있는 상황.
결정적으로 가문 대대로의 원수인 스틸월 백작이 군을 이끌고 오고 있었다.
남아 있는 길이 죽음뿐이라는 건, 아무리 어리석은 존재라도 알 수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느냐, 아니면 다른 이에게 목숨을 잃느냐 정도만이 남겨진 선택지일 뿐.
플로드 백작의 선택은 전자였다.
스틸월 백작은 책상 위에 엎어져 있는 노인을 쳐다봤다.
노인의 입에서 새어 나온 핏물이 책상을 뒤덮고 바닥으로까지 똑, 똑, 떨어지고 있다. 책상 옆에 뚜껑이 열려 있는 고풍스러운 와인병과 바닥에 산산이 깨진 와인 잔이 보인다. 독을 탄 와인을 마시고 자살을 한 모양이었다.
그 노인이 바로 스틸월 백작가의 원수인 플로드 백작가의 주인이자, 스틸월 백작의 장인인 리빌 플로드였다.
평생의 경쟁 상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의 죽음에, 스틸월 백작도 살짝 감상적으로 되었다.
이번의 치 떨리는 음모를 꾸민 자였지만 어쨌든 스틸월 백작은 승자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래도 장인이었으니, 약간의 애도 정도는 표해도 되리라.
스틸월 백작은 플로드 백작을 향해 살짝 묵례를 했다.
그러나 감상적으로 되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주변인에게 명령을 내리려 할 때였다. 곁에 있는 지크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 할 말은 없느냐.”
“뭘 말입니까?”
“그래도 네 외할아버지가 아니냐.”
지크는 피식 웃었다.
“댁이 저 작자를 장인 취급을 하지 않듯, 나도 저 작자를 외할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작자도 나를 외손자 취급하지 않고 있었을 테고.”
딸을 미끼로 쓴 인간이 그 딸의 아들에게 애정이 있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지금 할 이유는 없지요. 난 말도 사고도 할 수 없는 고깃덩이에게 말을 거는 취미는 갖고 있지 않아서요.”
그리고 지크는 등을 돌려 방을 나갔다. 백작의 시선이 한동안 지크의 등을 응시했다.
“시체를 수습하도록.”
백작이 명령을 내렸다.
* * *
스틸월 백작군이 귀환했다. 창을 높이 들고 대열을 맞춰 진입하는 그들에게 영민들이 꽃가루를 뿌리며 환호를 내지른다.
승리.
그 황홀한 두 글자는 스틸월 영민들의 흥분을 머리끝까지 밀어올리기 충분했다.
요 근래, 그들에게 좋은 소식은 없었다. 바퀴벌레 같은 밸리드 놈들이 영지 안에서 대량으로 출몰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한데 그들의 영주가 그 밸리드의 주구라는 소문이 돌았다. 거기에 그들을 단죄한답시고 예전부터 치고받아온 플로드 백작이 연합군을 형성해서 공격해 들어오기까지.
당연히 영지민들은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생활해야 했다.
하지만 상황이 반전됐다.
그들의 영주가 밸리드의 주구였다는 누명은 벗겨졌다. 오히려 그들을 단죄한답시고 쳐들어온 플로드 백작이 밸리드의 주구였다.
연합군은 백작군의 막강한 힘에 짓밟혔다. 거기에 더해 연합군을 토벌한 김에 지긋지긋한 플로드 백작령까지 점령했다.
그것들만 해도 충분히 스틸월 백작령의 영민들을 환호하게 만들 사건들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들의 가슴을 벅차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드래곤을 사냥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호.
전설이나 소설 속에서만 등장하며, 현실에는 어린아이가 나무 막대를 휘두를 때나 입에 담는 명칭이다.
하지만 그, 현실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존재가 현실에 나타났다. 그것도 그들의 편에서.
물론 드래곤 슬레이어라 불리는 인물들 대다수가 지크에 의해서 이 전쟁에 동원된, 스틸월 백작가와는 기본적으로 관계가 없는 이들이었다.
게다가 드래곤과 가장 대등하게 치고받았던 지크는 아예 자신의 가문이었던 스틸월 가문과 연마저 끊어버린, 아무리 좋게 봐도 스틸월 백작가와 절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런 깊은 사정 따위는 몰랐다.
그저 이번 전쟁에서 그들을 도와 전쟁을 치른 이들 중 전설적인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이 중요할 뿐.
그렇게 성대한 개선식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전쟁의 뒤처리가 시작됐다.
하지만 그건 높으신 분들의 이야기. 일반 병사들은 자신들의 아늑한 집으로 돌아가 전쟁의 피로를 달랬다. 그중 몇몇은 지인들과 만나기 위해 술집으로 향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자신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는 군중들에게 둘러싸였다.
“그 순간에 그게 나타났어!”
한 병사가 자신을 향한 수십 쌍의 눈을 스윽 둘러보며 말했다.
병사의 지인은 물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타인들, 거기에 술집의 주인과 종업원들까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병사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는 그 이름을 내뱉었다.
“바로 드래곤이 말이야.”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어떻게 생겼어?”
“정말로 산만큼이나 커다래?”
“입으로 불길을 뿜는다던데, 맞아?”
“마법도 쓴다며!”
여기저기서 자신의 호기심을 밀어붙여 온다. 병사는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일순간 입을 닫았다.
“덩치는 웬만한 야산만큼 컸어. 외견은 전설로 내려오는 것과 같았지. 커다란 도마뱀 같은 몸에 박쥐 같은 날개. 날카로운 이빨에 단단한 뿔. 입에서는 불을 뿜고 마법도 한 번에 다섯 가지씩이나 사용하더라고.”
다시 한번 탄성이 터져 나왔다.
“솔직히 죽는 줄 알았어. 아무리 대단한 기사님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녀석에게는 안 될 것 같았거든. 소설 속에서도 드래곤을 잡는 건 주인공 정도지, 다른 이들은 대적할 엄두도 못 내잖아?”
하도 말을 해서 그런지 입 안이 말랐다. 병사는 앞에 놓인 술을 들이켰다.
“크으!”
텅 빈 술잔이 테이블 위에 놓인다. 한 사람이 얼른 주인에게 술 한 잔을 더 병사에게 가져다 달라 요청했다. 곧 병사의 앞에 술로 가득 찬 잔 하나가 새로 생겼다.
이야기 값으로 받는 공짜 술이다. 병사는 무척이나 즐거웠다. 동시에 더욱 맛깔나게 이야기를 풀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소설 속 주인공 같은 사람들이 나타났어. 그래. 지금 소문으로 퍼진 드래곤 슬레이어 말이야.”
그 칭호가 언급된 순간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일부는 환호성을 내지르거나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드래곤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전부 우리 스틸월 백작군에서도 뛰어난 사람들이었어. 강력한 검사, 뛰어난 마법사, 신비한 엘프, 환수와의 계약자 등등.”
명칭만으로도 무슨 소설 속에 나오는 파티의 멤버 같다. 사람들의 집중력이 강해졌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드래곤 슬레어 중 가장 뛰어나고 활약을 많이 한 사람은 그분이야.”
“누구?”
“지크 도련님. 스틸월 백작님의 자제분이시지.”
또 한 번의 탄성.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더 컸다.
“드래곤은 정말 무지막지할 정도로 강력했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전투 현장에 가 봐. 드래곤이 남겨놓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까. 당연히 다른 드래곤 슬레이어 분들도 드래곤의 공격을 버거워했어. 그런데 어느 순간 지크 도련님이 딱 나선 거야!”
병사가 테이블을 쿵 내려 쳤다.
“거리가 멀어서 전투를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그분이 손에 쥔 검의 궤적은 잘 보였어. 나중에 들어 보니 성검과 마검이라고 하더라고.”
성검과 마검.
또다시 전설이나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름이 나왔다.
“하얀빛과 검은빛이 드래곤의 공격을 모두 튕겨내고 잘라내는데! 와, 그건 진짜 직접 봐야 알 수 있어! 그렇게 지크 님이 드래곤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다른 이들이 지크 님을 도와 드래곤을 공격하기 시작했지. 그 이후에는…!”
병사의 목소리는 그 후로도 계속 술집을 울렸다.
그런 장면은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병사처럼 술집에서 이야기를 푸는 사람도 있었고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있었으며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에게 떠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위대한 드래곤 슬레이어의 명성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 * *
도시에서 한창 드래곤 슬레이어들, 특히 지크의 명성이 퍼져 나가고 있을 때 장본인인 지크는 클로원의 유적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유리관 안의 라일라를 쳐다보았다. 눈을 꼭 감은 그녀는 마치 근심 하나 없이 달콤한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잠과는 달리 그녀는 스스로 깨어날 수 없으니까.
지크는 슬쩍 자신의 검지를 내려다봤다. 그 안에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있다. 그것을 매개로 삼아 라일라가 보내주는 세계수의 마력 덕분에 지크는 계속 자신의 모든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다.
라일라가 보내주는 건 세계수의 마력만이 아니었다. 브뤼셀 시스템의 코어로서 그녀가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정보들이 지크를 돕기 위해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중에는 지크의 마음에 쏙 드는 것도 있었다.
‘열심히도 움직이는군.’
지크는 하나의 정보를 유심히 살폈다. 그건 한 인물에 대한 정보였다.
브뤼셀 시스템은 정보를 저장하는 장치다. 그리고 그 장치에 정보를 입력하는 수단은 윈두르, 에스텔레이드, 토르니움을 이용하는 것.
윈두르는 라일라의 품속에 있고, 에스텔레이드는 한스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마지막 토르니움.
드래곤의 매서운 공격에 지크의 팔 한 짝과 함께 튕겨나간 토르니움은 그렌이 갖고 있었다. 하필이면 토르니움이 그렌의 근처에 떨어진 것이다.
황급히 검을 챙긴 그렌은 그 격렬한 전투 중에도 끝끝내 살아남아 결국 도망쳤다.
하지만 지크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렌이 토르니움을 챙겨 도망치는 것을 눈치챘음에도 그냥 보내줬던 것이다.
이유는 당시에 지크의 뇌리로 흘러들어온 정보 때문이었다.
그렌 제너드가 토르니움을 갖고 있다면 놈의 행방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
라일라가 어떤 상태에 빠져 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해준 충고라는 것을 짐작한 지크는 그렌을 도망치게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지금 그 대가를 톡톡히 받고 있었다.
‘솔직히 이제 그렌 제너드 그놈의 존재의의는 거의 없다만….’
지크의 계획대로 녀석은 완전히 몰락했다. 이제 한 해의 수확을 감사히 거두는 농부 같은 마음으로 녀석의 목을 수확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하나, 그렌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었다.
‘제발 흑막 놈과 접촉해라.’
그렌이 흑막과 같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흑막의 행동마저 완전히 꿰뚫어 볼 수 있다.
‘이 세상에 도움이라곤 하나도 안 되는 네놈이 마지막으로 도움이 될 만한 일이다. 계획대로 된다면 칭찬 정도는 해 주마.’
물론 그렇다고 녀석의 죽음이라는 미래가 바뀌는 건 아니지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