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5화
연합군은 패배했다. 궁지에 몰린 플로드 백작과 피네 자작이 밸리드를 동원한다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오히려 그것을 읽은 지크가 카르위먼의 병력을 대기시켜 두는 바람에 밸리드의 병력은 싸그리 몰살당했다.
그러나 그건 차라리 낫다. 가장 뼈아픈 건 명분이 완벽히 스틸월 백작가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들이 꾸몄던 음모가 고스란히 그들에게 돌아왔다.
카르위먼은 공식적으로 그들에게 검을 겨눴고, 교황은 파문을 선언했다.
플로드 백작가가 스틸월 백작가를 먹어치운 뒤 그 찌꺼기라도 받아먹기 위해 참전했었던 영지들이 급히 병사를 물리고 자신들은 플로드 백작가가 밸리드의 주구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선 긋기에 나섰다.
오히려 몇몇은 플로드 백작가를 같이 들이쳐 줄 수 있다며 스틸월 백작가와 카르위먼에게 필사적으로 꼬리를 흔들기도 했다.
군사적으로 강력하기 짝이 없는 스틸월 백작군과 사람들의 열렬한 신앙의 대상인 카르위먼의 성기사단과 신관들.
듣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치는 강대한 두 세력이 힘을 합쳐 쳐들어온다니. 악몽도 그런 악몽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전전긍긍하던 연합군의 구성원들은, 도저히 믿지 못할 정보 하나를 얻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탄생.
“미친 소리 하지 말고 정보나 똑바로 얻어 와!”
“지금이 농담할 때인가? 자네의 머리통엔 농담을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부족하나?”
“이런 병신 같은 정보를 중간에 잘라내라고 네놈들을 앉혀 놓은 거다! 그것조차 이해하지 못할 거면 때려치워!”
전설,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존재의 탄생 소식에 사람들은 처음엔 전부 헛소리하지 말라고 성을 내거나 무시했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상황에서 헛소리를 받아줄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 소문은 점점 더 신빙성을 얻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말 같지도 않은 소문이 진실이라고 판명됐을 때, 스틸월 백작의 적들은 모두 주저앉아 버렸다.
“…정말이라고? 정말 드래곤이 나타났고? 그리고 그걸 처리했어? 게다가 처리한 주역이 스틸월 백작의 아들인 지크 스틸월?”
“후계 자리를 포기해 더 이상 스틸월이란 성을 쓰지는 않는다고….”
“지금 그딴 게 중요하냐!”
드래곤 슬레이어라니.
숨결을 내뱉어 땅을 불태우고 고등한 마법을 사용하며 고위 금속과 맞먹는 비늘로 공격을 모두 튕겨내 버린다는 전설 속의 존재, 드래곤.
그 드래곤이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뒤집어질 텐데, 한 술 더 떠서 그 존재를 잡은 자가 나타나 버렸다.
드래곤의 힘은 전설과 소설 속에서 표현된 것과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고 한다. 성 한두 개 정도는 너무도 간단하게 불태울 수 있을 정도로.
그런 존재가 한 무리의 인간의 손에 무너졌다. 그것도 스틸월 백작가 소속으로 전쟁에 참여한 인간들에게.
순식간에 연합군의 구성원들은 스틸월 백작가, 카르위먼이라는 무겁기 이를 데 없는 이름값에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전설 속의 존재에게마저 적대당하게 된 것이다.
제정신인 영주든 맛이 간 영주든, 스틸월의 적들은 그 정보를 얻자마자 그대로 납작 엎드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자기들을 꾀어낸 플로드 백작에게 분노가 치밀 정도였다.
“무조건 우리는 몰랐다고 잡아떼! 아니, 잡아떼는 것도 아니지! 실제로 우리는 몰랐으니까!”
“빌어먹을 리빌 플로드 같으니! 아무리 스틸월이 싫다고 해도 밸리드랑 손을 잡아? 거기에 우리를 휘말리게 했어? 남의 가문을 작살내려고 작정을 했나!”
“어떻게든 가문만은 지켜야 한다! 영지를 떼어 주고 작위가 강등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살아남아야 해!”
무력, 명분 모든 것이 밀린다. 게다가 영민들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 영주님이 밸리드의 주구랑 손을 잡았다며?”
“당장이라도 카르위먼의 성기사들이 공격하러 온다는 소문이 있던데.”
“빌어먹을! 영주님 때문에 우리까지 밸리드의 주구로 낙인찍히는 거 아냐?”
평소에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영주님이지만, 밸리드의 협력자로 낙인찍힌다는 공포는 그보다 훨씬 더 컸다.
막말로 목숨은 이승에서 잃으면 끝이지만 밸리드의 협력자는 죽은 후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하지 않던가.
당연히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제는 스틸월 백작군이나 카르위먼이 문제가 아니라 영민들의 봉기에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안 그래도 전쟁에서 병사들이 작살이 나는 바람에 영지의 힘이 내려가 있는 상황이라 더더욱 위험했다.
그렇게 군을 재정비하던 중에 카르위먼의 협력을 받아 적지에 혼란을 부추긴 스틸월 백작군은 먼저 피네 자작가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그 선봉에는 돌아온 지크가 있었다.
스틸월 백작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그들의 주군이 밸리드의 주구라는 의심은 불식되고 오히려 적들이 밸리드의 주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적들은 패주한 상태.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전설 속의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있었다.
그들 전부가 드래곤과의 전투를 봤다. 그리고 빛과 어둠의 마력을 휘감은 채 드래곤과 정면으로 치고받는 놀라운 존재의 모습 또한.
적들이 그들 몇 배 이상의 대군을 끌고 와도, 함정을 파도, 기습을 해도 그들은 전혀 걱정할 것이 없었다. 전설의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그들과 함께하는데 도대체 뭐가 두렵단 말인가.
그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피네 자작가의 주도에 도착했다.
피네 자작가 본성을 함락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피네 자작은 거의 전 병력을 이번 전투에 참가시켰다. 평범한 병사들은 물론 밸리드의 병력 또한.
그리고 저번 전투에서 밸리드의 병력은 실질적으로 몰살당했고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영지로 귀환한 병사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도 전의는 없었다.
하지만 전투가 없진 않았다. 실제로 성문은 굳게 닫혀 그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몇 남아 있는 밸리드 신도들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저항한다고 해봤자 정해진 운명을 막을 순 없었다.
미약한 저항이 너무도 허무하게 찢겨나가고, 스틸월 백작군은 피네 자작가를 점령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피네 자작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아예 자작령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계획이 실패했다 여기고 몸을 피한 것이 분명했다.
“아주 악취가 진동을 하는군요.”
본성에 있는 밸리드의 흔적들을 보며 와이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예전에 본성에 잠입했을 때도 봤던 광경이지만, 어디 똥 냄새가 몇 번 맡았다고 익숙해지고 바퀴벌레가 몇 번 봤다고 귀여워지던가.
그에게 이 빌어먹을 공간에 있는 것은 오물 속에서 헤엄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 태워버리죠.”
루벨라는 당장이라도 기름을 붓고 부싯돌을 부딪치고 싶다는 표정으로 지크에게 허락을 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카르위먼이 밸리드 놈들의 흔적을 불태운다는데 그 누가 반대하랴.
“하려면 화려하게 하죠.”
빌어먹을 밸리드 놈들의 원한조차 모조리 재가 되어 버리도록.
그날, 피네 자작가의 본성에는 거대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 * *
피네 자작가에서의 의무가 끝나고 스틸월 백작군의 다음 목표는 당연히 플로드 백작가였다.
원래는 연합군을 박살 내고, 누가 봐도 국가 간의 전쟁인 이 전쟁을 내전 형식으로 덮어씌워 버렸던 피네 자작가를 뭉개버리는 걸로 끝낼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피네 자작가에서 찾은, 플로드 백작과 밸리드가 내통한 증거와 그들의 계획을 담은 증거들이 또렷이 존재했으니까.
마지막 도박을 위해 피네 자작을 비롯해 대다수의 밸리드 신도들이 전쟁에 동원되었고, 그중에는 수뇌부도 있었다.
당연히 증거를 파기한다는 명령을 내릴 자도 없어 스틸월 백작군은 증거를 고스란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지금처럼 플로드 백작가를 짓밟기 좋은 상황도 없었다.
게다가 카르위먼도 플로드 백작가의 단죄를 원했다. 스틸월 백작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플로드 백작가와의 악연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게 스틸월 백작군은 플로드 백작령으로 진입했다.
몇몇 요충지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스틸월 백작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상당수의 병력은 그냥 항복하기도 했다.
“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
“우리는 영광스러운 플로드 백작군이 아닙니까! 목숨을 걸고 지켜야죠!”
“밸리드와 협잡한 주제에 영광이고 나발이고가 어디 있어! 예전 같았으면 나도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걸었겠다만, 저 빌어먹을 백작이 밸리드랑 손을 잡았다고! 죽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아! 우리 영혼이 지옥으로 처박힐 거라니까!”
“…….”
아무리 스틸월 백작군에 비해 손색이 있다 해도, 그들도 저 왕국의 강철벽이라 칭해지는 스틸월 백작가와 대대로 싸워온 자들이다.
스틸월 백작군에 비해 밀릴 뿐, 그들은 분명 강병이라 칭해도 모자람 없는 집단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신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공포는 그들의 용기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플로드 백작은 그 현상이 스틸월 백작령에서 나타나길 바라며 음모를 꾸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현상은 플로드 백작령에서 나타나 마지막 남은 저항의 힘을 와지끈 꺾어버렸다.
플로드 백작과 친분이 있는 영지들도 침묵을 지켰다. 그들의 왕국 또한, 타국의 군대인 스틸월 백작군이 국경을 넘었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플로드 백작가는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스틸월 백작군은 플로드 백작가의 주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항복은 기대하기 힘들 듯했다. 하지만 스틸월 백작군 그 누구도 긴장하지 않았다.
저런 허약한 성문쯤이야, 드래곤 슬레이어의 칼질 한 방이면 박살이 날 게 뻔했으니까.
“플로드 백작은 귀환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백작님. 패잔병들과 함께 저 성에 틀어박혔답니다.”
피네 자작과는 달리 플로드 백작은 영지로 귀환했다.
아무래도 귀족보다는 밸리드의 신도로서의 정체성이 더 큰 데다 밸리드라는 뒷배가 남아 있는 피네 자작과는 달리, 플로드 백작은 어디 도망칠 곳도 없었던 것이다.
스틸월 백작은 감회가 새로운 눈으로 눈앞의 플로드 백작령의 주도를 쳐다봤다.
전력상 항상 스틸월 백작령이 앞서 있긴 했지만, 플로드 백작령을 압도할 수 있는 정도도 아니었다.
때문에 그들도 플로드 백작령을 침공했다가 쓴맛을 본 적도 많았다. 플로드 백작가가 그러했듯 스틸월 백작가도 플로드 백작가의 본성에 자신들의 깃발을 꽂길 무척이나 바랐다.
그 꿈이 바로 자신의 대에서 이루어졌으니, 스틸월 백작은 감개가 무량했다.
그것도 잠시.
백작의 시선이 군의 가장 앞쪽을 향했다. 한 사람이 보였다.
지크 스틸월. 지금은 그냥 지크. 부자의 인연을 끊은, 그의 아들.
이 상황이 철저하게 그의 덕택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만약 지크가 없었다면 플로드 백작가를 공략하기는커녕, 지금 플로드 백작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스틸월 백작가에서 고스란히 일어나며 그는 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음모를 밝혀내고 응원군을 끌어들이며, 심지어 갑자기 나타난 드래곤까지 잡아버렸다. 두말할 것도 없는 이 전쟁 최고의 영웅.
해야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 전쟁이 끝난 다음에 해야 할 일이다.
그가 공격 명령을 내리려 할 때였다.
굳건한 성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백기를 든 채 말을 타고 나왔다. 그는 천천히 스틸월 백작군의 진영으로 다가와 백작을 보기를 청했다.
백작 앞에 선 그는 무릎을 털썩 꿇고 백작에게 말했다.
“저희 플로드 백작군은 백작님께 항복하겠습니다.”
“플로드 백작의 의향인가?”
“백작님은 자결하셨습니다.”
침통한 목소리가 한 시대의 끝을 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