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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44화 (544/628)

제544화

지크는 클로원 제국 유적에 당도했다.

혼자 돌아온 지크를 향해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전황이 유리하단 보고는 받았지만, 설마 갑자기 나타난 전설의 드래곤이 날뛰어 전장이 박살 났고 지크는 그 드래곤을 처리한 후 볼일을 보러 유유히 돌아왔다는, 누가 들으면 미친 소리 작작하란 소식을 보고받지는 못한 것이다.

혹시 전황이 다시 한번 바뀌어 스틸월 백작군이 패배, 지크는 그 패배를 전하러 온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크는 훌쩍 떠나기 전 백작에게 받아 온 허가서를 보여주는 걸로 입을 다물렸다.

허가서를 내줄 때 백작도 지크의 돌발 행동에 상당한 의문을 품었지만, 눈앞에서 드래곤을 썰어버린 사이 나쁜 아들놈에게 차마 이유 같은 걸 물을 수는 없었다.

클로원의 유적으로 통하는 구덩이 앞에는 병사 몇 명이 지키고 있었다. 지크는 그들을 지나쳐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윈두르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 누구도 통과시키지 않는 문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문은 지크가 앞에 서자 스르르 움직여 안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지크가 갖고 있는 운명을 비트는 열쇠 때문일까. 그러나 지크는 다른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위해 문을 열어준 것 같다.

유적 안으로 몸을 집어넣자 문이 다시 닫혀, 외부와 유적 안을 완전히 차단시켰다.

이미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한 곳이니만큼 지크의 움직임은 거칠 것이 없었다. 지크의 눈에 곧 커다란 수정과 그를 휘감고 있는 고리가 들어왔다.

수정은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안에 있던 드래곤도 없었다.

역시 그 드래곤은 여기 있던 녀석이었다.

지크가 고리 위에 발을 디뎠다.

“왔군.”

라일라와 똑같은 생김새. 하지만 태도, 분위기, 표정 등 모든 것이 다른 여인.

지크는 순간 검을 빼서 그녀의 목에 들이댔다.

“저 드래곤, 네 짓이었냐?”

“그래.”

세르피나는 무감정하게 대답했다. 지크는 잠시 세르피나를 쳐다보다 검을 거뒀다.

“안됐군. 마지막 수가 박살 나서.”

“역시 그랬나.”

지크가 유적에 도착한 것을 본 세르피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지크의 말은 그저 쐐기를 박는 것에 불과했다.

“너희가 이겼다. 축하하지.”

“의외로 미련이 남지는 않은 모양이지?”

“그게 마지막 미련의 조각이었다. 이겼으면 미련을 그대로 끌고 갔을 테지만, 지금은 졌으니까.”

“앞으로 쓸데없는 일은 안 하겠다는 소리군.”

“내겐 앞으로가 없다.”

세르피나는 조금 씁쓸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크는 그녀의 감정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의외네. 만나자마자 칼부림부터 날 줄 알았는데.”

“지크 브레이브.”

지크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그렌보다도 더 짜증 나는, 명실공히 지크가 가장 혐오하는 인물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브레이브는 검을 들어 올렸다. 적의가 있어서는 아니다.

오히려 반대. 지크가 자신을 보면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를 것이라고 확신해서였다.

게다가 저번의 복수심도 살짝 있었다. 가지고 있는 마력이나 실력은 동등하다지만, 저번엔 검 차이로 밀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윈두르는 라일라가 가지고 있다. 지크가 가지고 있는 건 평범한 검. 그에 비해 브레이브는 에스텔레이드를 가지고 있다.

이길 수 있다, 이번엔.

물론 목숨 걸고 싸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그보다 약하지 않다는 걸 조금만, 아주 조금만 보여주면 됐다.

그러나 지크는 웬일인지 코를 한 번 울리고는 다시 세르피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라일라는 어디 있지?”

“따라와.”

세르피나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응?”

지크의 기습을 막고 저번에 무너진 자존심을 아주 조금만 다시 채워 넣으려던 브레이브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어, 어이, 잠깐!”

브레이브가 황급히 둘을 따라 나섰다.

“뭐야! 이번엔 왜 이렇게 얌전해! 예전처럼 날 죽이겠다고 날뛰어야 하지 않아?”

“사람을 보자마자 싸우려고 들다니. 내가 무슨 동네 양아치냐?”

죽일까, 이 새끼.

그렌과는 달리 진짜 용사로서의 마음가짐을 갖고 있던 브레이브조차 울컥해 검을 날릴까 말까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지크는 코웃음을 치고는 계속 세르피나를 따라 걸었다.

“…에이씨!”

결국 브레이브는 자기 혼자 바보가 된 느낌을 받으며 검을 집어넣고 지크를 따라갔다.

세르피나는 지크를 라일라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유리관 안에서 윈두르를 껴안고 마치 잠들듯 눈을 감고 있는 라일라. 지크의 눈꼬리가 치솟았다.

“설명.”

세르피나는 담담히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지크는 슬쩍슬쩍 브레이브를 쳐다봤다. 그녀의 설명이 맞는가 확인하는 것이었다.

브레이브의 얼굴엔 아직 뾰로통함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간간이 고개를 끄덕여주며 그녀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그렇게 된 거다.”

이야기가 끝났다.

“그럼 상황이 끝났는데 라일라는 왜 아직 저 갑갑한 통 안에서 안 나오고 있는 거냐?”

“네게 운명을 비트는 열쇠를 보내고 세계수의 마력을 통해 네 힘을 온전히 깨우게 하려면 시스템에 일반적으로 접근하는 걸로는 불가능했거든. 때문에 녀석은 더욱더 시스템에 깊이 잠겨들었다. 시스템의 코어가 될 정도로.”

“…녀석이 코어가 됐다는 거냐?”

“그래.”

“스스로 깨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지크는 바로 검을 빼 들었다. 스스로 깨어나는 게 불가능하다면 외부에서 부숴버리면 되는 일 아닌가.

하지만 브레이브가 막았다.

“뭐냐?”

“뭔 생각을 하는지 알겠지만, 그러지 마.”

“이걸 깨면 라일라에게 해가 가나?”

“몸은 괜찮아. 어디까지나 몸은.”

그 말은 곧 몸이 아닌 다른 곳에 문제가 생긴다는 뜻이다. 지크는 빨리 설명하라 눈짓을 했다.

설명은 세르피나가 했다.

“나의 몸이 막대한 기억을 품고 있다는 건 알고 있을 테지. 그 기억은 제국이 번성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지. 당연히 제국은 그 기억이 남에게 넘어갔을 때 얼마나 위험할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반역도들도 나의 기억을 노린 것이고.”

지크는 예전에 만났던 실험체를 떠올렸다.

“때문에 시스템엔 세공이 가해져 있다. 강제로 나의 몸을 탈취했을 시, 기억을 봉인해 버리는 것이지. 절대 브뤼셀 시스템이 아니면 기억을 볼 수 없도록. 그리고 그 부작용으로 인격은 완전히 날아간다.”

세르피나가 라일라를 쳐다봤다.

“내가 저 녀석이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녀석은 끝없는 회귀의 모순으로 어느 정도 힘을 축적한 세계수에 의해 강제로 깨워졌고, 그 때문에 기억이 봉인되며 나라는 인격이 날아갔지. 거기에 자리 잡은 것이 바로 네가 아는 라일라의 인격이고. 물론 세계수의 힘으로 깨어난 덕에 기억 봉인은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다는 건 내가 이 유리통을 날려 버린다면….”

“너는 세 번째 나를 만나보게 될 거다.”

검을 잡고 있는 지크의 손에 힘이 빠졌다.

“…라일라도 알고 있었냐?”

“시스템에 관해서는 대략적으로 전부 알려줬어. 적어도 돌이키지 못하게 되기 전에는 깨달았을 테지.”

그 말은 곧, 저 상태를 라일라 스스로가 선택했다는 말이다.

“어차피 몸은 똑같아. 그저 기억을 잃어버렸을 뿐. 어떻게 잘 유도한다면 라일라와 비슷한 성격을 갖게 될 수도 있다.”

“그건 라일라가 아니야.”

지크는 딱 잘라 말했다.

자신과 브레이브를 철저히 구별하고 라일라와 세르피나도 동일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크에게, 인격이 날아간 라일라를 라일라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해결 방법은?”

지크가 물었다.

“없다고는 말하지 마라. 그렇지 않다면 네가 마왕이랍시고 저 지크 브레이브와 대판 붙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머나먼 시대를 지나 깨어난 세르피나는 클로원 제국의 재건을 목표로 움직였다.

한마디로 그때는 라일라가 아니라 세르피나었단 뜻이고 그 말은 즉, 인격을 유지하고 있었단 뜻이다.

“역시 눈치가 빠르군. 조금 더 골려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농담할 기분 아니니까 빨리 내뱉어.”

“정이 상당히 많이 든 모양이야. 너는 이렇게 조바심을 내는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지크의 눈이 날카로워지자 세르피나는 그제야 설명을 시작했다.

“간단해. 내가 강제로 깨웠다고 했지? 그게 아니면 돼. 즉, 정식 절차를 밟아서 깨우면 된다는 거다.”

“방법은?”

“여기선 안 돼. 브뤼셀 시스템의 중심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지. 세계수의 본체가 있는 곳 말이야.”

“참고로 흑막 놈이 주로 있는 곳도 거기야.”

브레이브가 보충했다.

“잘됐군. 어차피 그 흑막 놈의 얼굴에도 검을 꽂아 넣을 셈이었는데, 같이 하면 되겠어.”

“그리고 세계수도 해방시키고?”

“그건 덤.”

물론 덤이든 뭐든 세계수는 자신이 해방될 수만 있다면 지크에게 얼마든지 협력을 할 것이다.

“장소가 어디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고 있지?”

“물론.”

지크의 머리 위로 하나의 장소가 떠오른다. 지크가 알던 지식은 아니다.

“이게 라일라의 지식인가.”

“다시 브뤼셀 시스템의 코어가 됐으니, 봉인된 기억이 떠오른 거지.”

클로원의 그 방대한 지식과 정보가 모조리 그녀에게 돌아온 것이다.

“원래는 브뤼셀 시스템의 본체가 있는 특별한 장치로만 기억을 볼 수 있지만, 지금 그녀와 너는 윈두르와 운명을 비트는 열쇠로 이어져 있지. 정보의 교류가 가능할 거다.”

지크는 라일라가 있는 통에 손을 대봤다. 여전히 라일라는 눈을 뜨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식은 분명히 그녀가 보낸 것이었다.

다음 목표가 잡혔다. 흑막을 짓밟고 브뤼셀 시스템의 본체를 확보하는 것. 그리고 겸사겸사 세계수를 확보한다.

“너희들은 어쩔 거냐?”

지크가 세르피나와 브레이브를 보며 말했다.

“역할은 끝났으니 슬슬 가봐야지.”

브레이브가 나타난 이유는 어디까지나 세르피나의 감시. 그녀가 사라진다면 그도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다.

“너는?”

“나도 마찬가지다.”

“다행이네. 클로원의 재건 운운하며 남겠다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마지막 발버둥을 실패했다. 더 이상 끄는 건 의미 없는 짓일 뿐.”

세르피나는 라일라가 들어 있는 유리관을 쳐다봤다가 지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녀석에게 말해 줘라. 어디 한번 자신의 삶을 잘 살아보라고. 클로원 제국의 재건이라는 대업을 내팽개친 녀석이 얼마나 잘 살지 두고 보겠노라고.”

세르피나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애초에 자신의 몸을 그 특유의 마력 조정 능력으로 묶어두고 있었던 것이니, 그걸 풀자 그녀의 몸은 다시 마력으로 돌아갔다.

“하여간 제멋대로인 녀석.”

브레이브가 투덜거렸다.

“뭐 하냐? 너도 어서 가야지.”

“…너도 참 밉살맞은 녀석이야.”

“대가리를 깨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

“한번 붙어 볼까?”

그는 아직까지 복수의 꿈을 놓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지크는 손을 내저었다.

“그럴 기분 아니니까 그냥 가라.”

“…정말로 라일라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군.”

지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브레이브는 피식 웃었다.

“하긴, 그럴 만해. 나도 집에서 막 나올 때만 하더라도 세상 전부가 싫을 정도였으니까. 나야 좋은 동료들을 만나 상처가 아물었지만, 넌 아니었잖아?”

그러긴커녕 지크 모어가 될 때까지 온갖 험한 일을 다 겪었다.

“저렇게 순수하게 호의를 보이면서, 게다가 너를 위해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겠지.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마왕이 되지 않았을 테니까.”

“안 가냐?”

“알았어. 갈게. 그래도 한 마디만 더.”

브레이브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지금의 너는 에스텔레이드도 잘 어울릴 거야.”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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