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43화 (543/628)

제543화

드래곤.

전설로만 내려오는 존재. 정말로 그런 것이 존재했는지, 아니면 그저 어떤 꿈꾸는 이야기꾼이 퍼뜨린 상상이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존재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주제에 인지도 하나만큼은 대단했다.

많은 소설 속에서 드래곤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당으로도, 주인공에게 조언을 해주는 현자로도, 주인공과 함께 싸우는 동료로도 등장했다.

역할은 소설마다 달랐지만 공통점은 하나. 드래곤이란 존재가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이다.

그 이미지는 당연히 사람들의 동경을 불러일으켜, 가문의 깃발에 드래곤을 새겨 넣은 왕가와 귀족가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드래곤이란 존재는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때문에 전쟁터에 처음 드래곤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무척이나 컸다.

그리고 드래곤의 힘이 그들이 상상하던 그대로란 것을 알았을 때는 공포에 질렸다. 신화나 소설 속에서 드래곤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하는, 이름 모를 엑스트라들이 자신들이 될 거란 생각이 자연스레 뇌리에 스며들었다.

인간으로서는 손조차 닿을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의 폭력.

그런 드래곤이 허공에서 추락하고 있었다. 가슴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혹시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 연기에 속은 이들을 조롱하며 몸의 균형을 잡은 드래곤이 다시 그 끔찍한 브레스를 내뿜는 것이 아닐까.

드래곤의 추락을 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지만, 다행히 그들의 상상이 현실이 되는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콰아앙!

굉음. 흙먼지. 드래곤이 지면으로 내동댕이쳐지며 그것들이 솟아올랐다.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소리는 금방 멎었고 흙먼지도 이내 내려앉았다.

남은 것은 자신의 무게가 만든 커다란 구덩이 안에서 여전히 압박감을 뿜어내고 있는 거대한 덩치뿐. 그러나 그 덩치에 움직임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하늘을 뒤덮을 것 같던 날개는 지면에 축 늘어져 있고 브레스를 뿜어내던 험상궂은 얼굴이나 마법을 불러오던 손도 미동도 없었다.

한 명, 한 명, 사람들은 깨달았다.

의혹에서 기대로, 기대에서 기쁨으로, 기쁨에서 환희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아니, 몇 명이 동시에 내지른 건지도 모른다.

하나 확실한 건,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목청껏 소리를 내지르지 않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눈앞에서 전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전설이 무너져 내렸다.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드래곤을 향해 하얗고 검은 마력이 돌진하는 모습은 충분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드래곤이 추락했다.

그 상황 증거만으로도 사람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신화나 소설 속에서는 나쁜 드래곤이 나타날 때마다 하나의 존재를 동시에 내세우기 마련이었다.

전설인 드래곤을 타도하는 또 다른 전설.

드래곤 슬레이어.

그들은 지금, 그 말도 안 되는 또 다른 전설을 목격했다.

땅바닥에 떨어진 드래곤은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 호흡은 없고 드래곤의 심장마저 침묵했다. 이제 더 이상 드래곤의 신체가 스스로 움직일 리는 없다.

들썩!

드래곤의 가슴에 난 커다란 상처가 움찔거렸다. 그 상처 안에서 지크가 기어 나왔다.

드래곤의 덩치 때문에 그가 나온 곳은 지면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다. 드래곤의 상처에서 몸을 완전히 빼내자 그의 몸이 지면에 떨어졌다.

툭!

그의 몸이 지면에 나뒹군다. 마치 드래곤의 시체 옆에 인간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것만 같은 광경이다.

하지만 드래곤과 달리 지크는 비틀비틀 일어섰다.

“캬악, 퉷!”

가장 먼저 입 안에 가득 고인 드래곤의 피부터 뱉어냈다. 드래곤의 피는 더럽게 맛이 없었다. 아니, 회귀 전의 요하임 정도가 아니면 누가 타인의 피를 맛있다고 하겠는가.

‘전설에서는 무슨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기적의 약처럼 나오더니 막상 먹어보니 별것 없네.’

잘려나간 팔이나 짓이겨진 손가락에서는 여전히 피가 뿜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딱히 마력이 늘어나거나 그렇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전설 속 드래곤과 실제 드래곤의 차이를 알아냈지만 지크는 기쁘지 않았다.

이런 정신 나간 돌진을 한 이유 중 하나에는 드래곤의 피를 마시면 상처가 낫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어렴풋이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물론 그러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정도의 인식이었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지크 님!”

루벨라가 와이그에게 업혀 달려오고 있었다. 지크의 옆에 도착한 그녀는 바로 지크의 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지크라지만 한쪽 팔이 통째로 날아가고 한쪽 손이 짓이겨진 상태에서 고통이 없을 수는 없었다. 루벨라의 성력이 몸에 닿는 순간 아픔이 점점 사라졌다. 그대로 놓아두었으면 아무리 지크라도 목숨을 앗아갔을 상처도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 이건….”

루벨라가 새로 돋아나는 지크의 손가락 안으로 사라진 운명을 비트는 열쇠를 발견했다. 그녀가 곤혹스러워했다.

“죄송하지만 지크 님, 손가락을 잠시 절단할게요. 이물질이 몸 안으로 들어갔어요. 보통 이런 건 치료 중에 밖으로 배출되는데….”

루벨라가 와이그에 도움을 청하려는 걸 지크가 막았다.

“괜찮습니다. 이물질이 아니에요. 오히려 제 비장의 카드 중 하나죠.”

“그런가요?”

지크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어쩐지 성법으로도 밀려나오지 않는다고 했더니 뭔가 특별한 물건인 모양이었다.

루벨라는 운명을 비트는 열쇠에 신경을 끄고 다시 치료에 집중했다.

지크의 곁으로 일행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괜찮…으시진 않군요.”

와이그 다음으로 달려온 한스가 지크의 몸을 보고 말했다. 걸레짝 일보 직전인 그 몸이 괜찮다면 괜찮지 않은 상태란 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곧 괜찮아질 거다. 그리고 이 정도도 안 했으면 이건 못 잡았어.”

지크가 드래곤의 몸을 주먹으로 쾅쾅 쳤다.

한스도, 도착해서 지크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다른 이들도 일제히 드래곤의 시체를 바라봤다.

“…정말로 잡았군요.”

한스의 목소리에 경외감이 서린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목숨을 두고 싸울 때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지만, 전투가 끝난 후 드래곤을 가까이서 보자 새삼 그 거대함이 돋보였던 것이다. 거기에 방금 전까지 경험했던 드래곤의 압도적인 힘.

“그래, 잡았다. 그러니 마음껏 기뻐해라. 드래곤 슬레이어.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사람이 된 거야.”

드래곤 슬레이어. 그 단어를 듣는 순간 한스의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드래곤 슬레이어란 전설이나 소설 속에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드래곤을 잡아야만 붙는 칭호인데 이 세상에 드래곤이 없다. 종종 자신이 드래곤을 잡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전부 사기꾼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을 잡은 지금, 그들은 그 칭호를 사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드래곤 슬레이어라. 클클클, 어마어마한 칭호로군! 하지만 녀석과 대부분 싸운 건 자네지 않던가.”

한스는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윌위스의 말이 맞다. 드래곤과 정면으로 치고받은 건 지크. 그들은 어디까지나 지크를 보좌했을 따름이다.

“혼자서는 못 잡았습니다. 힘을 합쳐 마지막 일격을 버텨준 덕분에 이길 수 있었던 거죠.”

누가 봐도 드래곤의 약점임이 분명한, 특수 브레스를 뿜은 이후의 드래곤의 가슴 부위. 그 안에는 드래곤의 심장이 있다. 지크는 그 점을 노렸다.

일단 모두와 함께 드래곤의 특수 브레스를 막는다. 그중 첼시는 오로지 지크의 회복만을 위해 노력했다. 브레스가 끝난 후 지크가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그건 그렇지. 브레스가 예상보다 길어졌을 때는 끝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들은 결국 브레스를 막아냈다.

그리고 지크는 바로 에스텔레이드와 토르니움을 드래곤에게 던졌다.

그 후, 검의 주인이 없다는 걸 깨달은 드래곤이 안심한 순간, 드래곤의 앞에 나타나 에스텔레이드와 토르니움을 다시 쥐었다. 그리고 공격했다.

“자네에겐 그게 있었지.”

“라일라 겁니다. 오기 전에 녀석이 줬죠.”

지크는 목에 건 목걸이를 쓰다듬었다. 라일라가 가지고 있는, 순간이동을 가능케 하는 아티팩트. 라일라와 헤어지기 전 그녀가 지크에게 챙겨준 그것이 이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다.

전투에서 굉장히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아티팩트지만 지크는 최후의 순간이 올 때까지 그것을 끝끝내 숨겼다. 한스와 스녹이 위험에 처했을 때 사용할까 생각했지만, 그때는 이미 아티팩트를 사용한다고 해도 둘을 위험에서 빼낼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그 아티팩트는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렇다 해도 정말 드래곤을 쓰러뜨리다니.”

와이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또 그 묘한 힘을 썼군요.”

예전 몬스터 무리들을 일거에 쓸어버린 지크의 힘을 또다시 목격한 틸은 경의로운 눈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설마 드래곤과 맞상대가 가능할 줄은 몰랐습니다.”

“보셨지 않습니까. 아무리 저라도 드래곤과 맞상대는 불가능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맞상대를 했다고 해도 됩니다.”

세상에 그 누가 전설의 드래곤과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보기에 지크는 거의 전설 속에 나오는 용사와 비슷한 인물이었다.

“끝났어요.”

루벨라가 손을 뗐다. 지크의 몸에 남은 상처는 없었다. 그저 이곳저곳 찢어진 옷과 흠뻑 묻어 있는 피가 그가 격렬한 사투를 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뭔가 불편한 점이 있다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그 드래곤에게 입은 상처니, 제대로 치료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소설 같은 곳에서는 드래곤의 저주 같은 게 유명하지 않던가. 카르위먼의 성녀인 그녀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대미지가 있을 수도 있다.

“명심하죠. 다른 분들의 치료는 끝났습니까?”

“지크 님이 드래곤의 목을 날리고 있을 때 이미 끝났어요.”

“다행이군요.”

지크는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헨과 다른 스틸월 기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짙은 환희가 가득 차 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그 전설적인 명칭에 그들의 이름이 오른 것이다. 게다가 그 드래곤과 대등한 싸움을 한 것이 그들 주군의 아들임에야.

“타이너 경.”

“네, 도련님!”

미헨은 지크의 부름에 바로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전쟁은 끝났다고 봐도 될 겁니다.”

“물론이죠! 연합군은 완전히 흩어졌습니다! 아마 제대로 병력을 수습도 못 할 것이고, 만약 수습한다 해도 녀석들에게 미래는 없을 테죠!”

카르위먼이 그들에게 붙었고 밸리드의 협력자라는 낙인도 찍혔다. 무엇보다 그들 진영엔 그 전설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다. 연합군이든 뭐든 스틸월 백작가는 태연하게 짓밟을 수 있었다.

“그러니 더 이상 전 필요 없을 겁니다.”

미헨의 표정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무,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확인할 게 있습니다. 지금 당장요.”

지크의 시선이 스틸월 영지, 라일라가 있을 클로원의 유적으로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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