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0화
검을 든 입장에서 드래곤이 직접 가까이 붙어준다면 분명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드래곤의 거체가 쏜살같은 속도로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압박이었다.
후웅!
지크가 에스텔레이드를 휘둘렀다. 빛이 주변을 환하게 물들이며 드래곤의 얼굴로 향했다.
휘익!
드래곤은 목을 살짝 움직여 빛을 피해냈다. 그 와중에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지크는 이번엔 토르니움을 휘둘러 직접 드래곤을 베려 했다.
드래곤이 날개를 펼친 건 그때였다.
드래곤의 거대한 몸이 둥실 떴다. 토르니움이 허공을 헤맸다.
‘젠장, 저 덩치로 말이 되냐!’
지크는 위에서 자신을 향해 입을 쩌억 벌린 채 돌진하는 드래곤을 보며 투덜거렸다.
저 정도로 덩치가 크면 조금이라도 둔중한 면이 있어야 하는데 드래곤의 움직임은 과장 조금 보태 솜털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파괴력만은 덩칫값에 확실히 어울리니 환장할 만한 일이었다.
지크는 마력을 잔뜩 실어 다시 에스텔레이드를 휘둘렀다.
콰앙!
손아귀에 짜르르 울리는 충격. 아무리 드래곤의 비늘이 단단하다고는 하지만 마력이 모두 해방된 데다가 에스텔레이드와 토르니움을 든 지크는 충분히 비늘을 뚫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에스텔레이드는 드래곤에게 타격을 입히는 데 실패했다.
‘아, 그렇군,’
지크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장면을 보고 덤덤하게 생각했다.
‘발톱은 비늘보다 훨씬 더 단단하군.’
드래곤이 내민 앞발의 발톱에 에스텔레이드가 더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쩌억!
드래곤의 입이 열린다. 마력이 드래곤의 입 안으로 빠른 속도로 모여들었다. 지크와 드래곤의 거리는 지척. 벌써부터 뜨거운 온도가 넘실거린다.
“쯧!”
혀를 한 번 찬 후, 지크는 토르니움과 에스텔레이드에 마력을 불러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아!
드래곤의 브레스가 지크를 강타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피할 틈도 없었다. 지크는 그대로 브레스에 휘말렸다.
“지크 님!”
루벨라에게 치료를 받고 예비 검을 갖춘 후 다시 전투에 복귀하려던 한스가 경악해 지크를 불렀다.
아무리 지크를 믿는 그라지만 드래곤의 브레스의 위력은 너무도 막강했던 것이다.
경악한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지크는 너무도 무방비하게 브레스에 휩쓸렸다.
적어도 지금 여기 있는 이들 중, 저 상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드래곤의 브레스가 잦아들었다. 원하는 대로 브레스를 토해낸 드래곤의 표정이 상쾌해 보였다.
드디어 증오스러운 놈들 중에서도 가장 거슬리던 놈을 처단한 것이 흡족한 것일까.
그러나 드래곤의 그 표정도 오래가지 못했다.
브레스가 사라진 자리로, 두 개의 검을 교차한 채 서 있는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온몸에서 연기가 나고 옷 이곳저곳이 탄화됐으며 피부가 발갛게 물들어 있긴 하지만, 지크는 분명 브레스의 안에서 당당하게 살아남았다.
그는 검을 내렸다.
‘어찌저찌 막아냈군.’
해방된 마력과 에스텔레이드, 토르니움의 힘을 빌렸다지만 그는 드래곤의 브레스를 견디는 데 성공했다.
물론 계속 이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실제로 완전히 타격을 비껴낸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조건이 훨씬 좋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좋아, 해볼 만하겠어!’
적어도 드래곤의 일격에 박살 나지는 않는 게 확인됐다.
쿠오오오오오!
지크를 제거하는 데 실패한 것에 대한 분노일까. 드래곤이 거대한 포효를 내질렀다.
다시 한번 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여 몸을 띄웠다. 그리고 지크를 향해 돌진했다. 그것의 주변으로 마력이 움직이며 마법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가지가지 하는군.’
이제는 고속으로 이동하며 마법을 구현하다니. 마력의 해방과 두 검으로 인해 차이를 많이 메웠다지만 여전히 지크는 드래곤과 맞상대할 수준은 아니었다.
콰앙! 콰앙! 콰앙!
지크가 연신 검을 휘둘렀다. 날아오는 마법을 가르고 손톱을 튕겨내며 브레스를 비껴낸다.
고작해야 마력이 동등하게 되었다고 해서, 좋은 무기를 손에 넣었다고 해서 드래곤에게 우위를 점할 순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지크가 필요하다고 느낀 역할을 하는 데에는 문제없었다.
우우웅!
다시 한번 드래곤의 곁에서 마법이 발동된다. 이번엔 3속성 마법과 2속성 마법을 동시에 뿌릴 모양이었다.
원래라면 윌위스가 두 가지 속성을 무효화하고 다른 이들이 힘을 합쳐 다른 마법들을 대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후웅!
에스텔레이드에서 뻗어나간 빛이 마법과 충돌했다.
예전 윌위스의 인페르노를 해체시켰던 것처럼 속성 사이의 틈을 찌를 순 없었다.
이 빌어먹을 드래곤의 마법은 속성끼리의 틈이 없었다. 하지만 에스텔레이드의 빛은 마법을 단순 힘으로 밀어붙였다.
그 뒤를 이어 날아간 토르니움의 마력 또한 마법을 강타했다.
콰앙!
결국 2속성 마법은 에스텔레이드의 강력한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효화됐다. 그리고 3속성 마법 또한 토르니움의 광폭한 마력에 약체화됐다. 그 마법은 엘레나의 손에 마무리됐다.
드래곤의 마법을 견제하던 윌위스의 할 일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윌위스에게 남은 일은 하나다.
우우우우웅!
그의 지팡이에서 막대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드래곤에게 마법 공격이라…. 정말로 오래 살고 보니 별일을 다 겪는군.”
나이 많은 사람 특유의 감상이 흘러나왔다. 한탄조 비슷한 어조와 다르게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에서는 마력이 맹렬히 움직였다.
“나중에 자랑할 거리가 모자라지는 않겠어.”
윌위스의 마법이 발동됐다.
인페르노.
예전, 지크를 위협으로 몰아넣었던 그 마법이 펼쳐졌다. 강력한 바람이 불과 암석들을 머금은 채 드래곤에게 향했다.
드래곤은 급히 몸을 띄우려 했다. 그러나 빛과 어둠의 마력이 방해했다.
"어딜 가시나!"
지크가 전방위적으로 검기를 날려댔다. 드래곤은 손을 휘둘러 검기를 하나하나 깨뜨려댔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마법의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에 실패했다.
거센 바람이 불과 돌을 머금고 드래곤의 육체를 연신 가격한다. 단단한 드래곤의 비늘은 그 자체로 막강한 항마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마법을 시전하는 이는 인간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가진 마법사.
드래곤의 비늘이 불타고 깨지며 속살이 드러났다. 그리고 드러난 살을 바람이 베어갔다.
쿠오오오오!
드래곤이 비명을 질렀다. 그것의 시선이 윌위스에게 향했다. 입을 벌려 고온의 마력을 입에 모았다.
방금 전까진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으려 하면 일행은 일단 몸을 피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콰아아아아!
새빨간 브레스가 공기를 달구며 내뿜어졌다. 목표는 당연히 윌위스와 그 주변.
하지만 브레스가 목표에 닿기도 전에 지크가 브레스의 앞에 끼어들었다
우우웅!
에스텔레이드와 토르니움은 이미 마력을 머금은 채 거센 공명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지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한 번 내쉬었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두 검이 브레스와 부딪쳐 격렬한 힘겨루기를 한다. 단순 휘두르기 같았지만, 거기에는 지금껏 쌓아온 경험으로 만들어진 온갖 기술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물론 쉽진 않았다. 아무리 지크의 힘이 강해졌다고 해도 드래곤의 브레스란 간단한 공격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크는 브레스의 방향을 바꾸는 것에 성공했다. 브레스가 원래의 궤적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없는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으아아앗!”
“하아아앗!”
그 틈을 노리고 틸과 와이그가 드래곤에게 뛰어들었다. 그들의 일격 일격이 드래곤의 비늘을 부수고 상처를 입혔다.
쿠오오오오!
드래곤이 다리를 들어 올려 두 사람을 향해 내리찍었다. 두 사람은 바로 이탈했다.
다음으로 꼬리 공격이 이어졌다. 지면을 훑어가며 꼬리가 주변을 모조리 휩쓴다.
그러나 이번에도 지크가 끼어들었다.
꽝!
토르니움과 드래곤의 꼬리가 충돌했다. 지금껏 한 번 휘둘러지면 감히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일행을 흩어 놓았던 드래곤의 꼬리가 도중에 막혔다.
드래곤의 꼬리를 피해 조금 더 거리를 벌리려던 틸과 와이그가 그 모습을 보고 그 즉시 방향을 틀었다. 그들의 검이 다시 드래곤의 신체에 상처를 입혔다.
전투의 양상이 바뀌었다. 지금껏 지크 일행의 전략이 막강한 드래곤의 공격을 피하는 데 중시를 두고 그 사이사이 공격을 해내갔다면, 지금은 드래곤에게 상처를 입히는 데에 집중했다.
여전히 드래곤의 공격은 맹렬하기 그지없었지만 그걸 지크가 모조리 끊어버렸다.
드래곤과의 전투 장면은, 드래곤의 압도적인 거체 때문에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진 상태에서도 잘 보였다.
브레스가 뿜어지고 마법이 날아가며 거체가 지면을 울린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리는 드래곤의 압도적인 공격력. 거리가 벌어진 상태에서도 전율이 일 정도다.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달리 그 막강한 드래곤의 공격이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빛과 어둠을 둘러싼 인영. 단 한 명의 인간이 드래곤과 정면으로 대적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대대로 전해져오는 신화를 현실에 구현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지크의 다른 일행들도 열심히 드래곤을 공격하고 있었지만 지크가 가장 눈에 띄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이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도련님!”
몇 명의 기사들이 달려왔다. 대니가 불러온, 백작가의 정예 기사들이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강철검 기사단의 단장, 미헨이 큰 소리로 자신들의 당도를 알렸다.
“저희도 합세하겠습니다!”
기사들이 저마다의 검을 빼 들고 드래곤을 향해 달려갔다. 백작가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기사들의 참전은 분명 전투에 커다란 호재였다.
드래곤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늘어났다. 대부분의 공격을 지크가 받아내며 다른 이들이 드래곤의 공격에 집중한다.
드래곤도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크보다는 다른 이들을 먼저 처리하기 위해 공격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더 안 좋았다.
퍼엉! 퍼엉!
마법은 윌위스와 엘레나, 스녹에게 막히고 육탄 공격은 한스와 라라, 백작가의 기사들에게 방해받았다.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건 틸과 와이그였다. 그리고 누군가 부상을 입는다면 바로 루벨라의 성법이 치료를 했다.
그렇게 일행이 드래곤의 공격을 전부 무효화한 순간, 지크가 풀려났다.
콰드드득!
끄아아아아악!
어깻죽지가 꿰뚫리고 옆구리가 길게 베인 드래곤이 괴성을 지른다.
탐욕스럽게 드래곤의 옆구리를 뜯어 먹은 토르니움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에 비해 어깻죽지를 꿰뚫은 에스텔레이드는 여전히 새하얀 검신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크가 다시 달려들자 드래곤이 황급히 몸을 피했다. 다른 이들의 공격이 드래곤을 덮쳤다.
어쩌면 처음으로, 드래곤에게 위기감이란 감정이 깃들었다.
드래곤이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도망치는 건가?’
지크는 드래곤을 올려다봤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드래곤이 날아오른 높이가 너무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드래곤은 여전히 전투 의욕이 가득했다.
드래곤의 입이 벌어졌다. 브레스의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드래곤의 주위에서 마법이 발현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