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9화
“삶의 결론?”
“너는 저 녀석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더냐.”
세르피나가 라일라를 가리켰다. 브레이브는 슬쩍 라일라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일 뿐, 그의 시선은 바로 다시 세르피나에게 향해 경계를 계속했다.
“글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다만 너와는 달리 아주 착실한 녀석이란 것 하나만은 확실하지.”
“그래. 네 말대로 저 녀석은 나와 다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다. 너는 지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브레이브의 이름도 지크지만, 여기서 말하는 지크란 당연히 지금 바깥에서 드래곤과 싸우고 있는 녀석을 일컬을 것이다.
브레이브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음, 복잡한 녀석이지.”
“꽤나 모호한 표현이지만, 그렇게밖에 평가할 수 없겠지. 착한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네가 좋아할 인물은 아니니까 말이다.”
착한 일이라는 미명하에 악당들을 괴롭히는 지크와는 달리, 지크 브레이브는 진실로 정의로운 인물이었다.
아무래도 지크 같은 인물상은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맞지 않는 자라고 해도 너는 녀석을 특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 이유는 알고 있겠지?”
“녀석은 나니까.”
다른 사건과 경험을 가져 완전히 별개의 사람처럼 됐지만, 그도 지크였고 드래곤과 싸우고 있는 이도 지크였다. 새빨간 타인이라면 모를까, 원래 사람이란 자신에게는 관대한 법이다.
“그래. 우리는 또 다른 자신을 특별하게 볼 수밖에 없다. 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듯이.”
아무리 라일라를 매도하고 경멸했다 하더라도, 그녀는 라일라를 무시하진 않았다. 무시하지 못했다. 라일라도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솔직히 실망스러운 녀석이다. 하지만 흥미도 갔다. ‘내가 다른 경험을 쌓는다면 저렇게 변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또 다른 가능성이 눈앞에 있다. 다른 이들은 상상만 하던 것을 그녀는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때문에 녀석에 대해 많은 걸 물어봤지. 하지만 역시 자아가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험은 적더군. 흥미를 끌 만한 화제는 별로 없었다. 하나만 빼놓고.”
“그게 뭐지?”
“지크에 대한 사랑.”
브레이브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헛꿈 꾸지 마라. 저 녀석이 사랑하는 건 지상에서 드래곤과 뒹굴고 있는 지크지, 네가 아니다.”
“그런 거 안 꿨어. 라일라가 착실한 건 분명하지만 너와 똑같이 생긴 얼굴 때문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는 판이다. 그딴 헛꿈을 꾸겠냐.”
“용사란 녀석이 담이 작구나.”
“싸웠던 마왕이란 작자가 좀 무지막지 했어야지.”
세르피나는 코웃음을 친 후 말을 이었다.
“지크에 대해 말할 때 라일라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그 모습은 솔직히 말해서, 신기했다. 흥미로웠다. 새로웠다. 클로원에 모든 걸 바치고 클로원을 사랑했으며 클로원의 대의의 일부였던 내가 저렇게 되다니. 만약 그게 다른 이였다면 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거다. 얼마나 대단하고 열렬한 사랑이라도 내 마음속에 닿진 않았겠지.”
“너의 또 다른 모습인 라일라의 사랑이라 마음에 닿았단 소리군.”
“그렇다. 그 모습을 계속 보자, 나도 슬쩍 그런 마음이 들더군. 저런 나도 괜찮지 않나 하고 말이야.”
“그렇다면 그냥 저 녀석들이 원하는 대로 해줬으면 됐잖아.”
“그럴 순 없지. 내 개인적 소망이 자라났다고 해도, 내가 클로원의 공주인 건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을 꾸몄다.”
그제야 브레이브는 세르피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드래곤이 이기면 계속 클로원의 공주로서 클로원의 부활을 노릴 거고, 지크가 이기면 깔끔하게 포기한다는 건가.”
“나는 클로원의 공주로서 최선을 다했다. 이 계획마저 무너진다면, 더 이상 클로원의 공주로서 할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클로원의 공주 세르피나냐, 아니면 그저 사랑하는 평범한 여자인 라일라냐. 이 전투의 결과는 그 이정표가 되겠지.”
“더럽게 복잡하게 생각하는구나, 너.”
“너처럼 단순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나도 나름 여러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어련하겠느냐.”
세르피나는 브레이브의 말을 비꼬았다.
“일단 네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도 환영이지. 지크가 드래곤을 이긴다는 것도 라일라 덕에 현실성이 생겼으니.”
“그래, 저건 생각지 못했다. 과연 지크가 내 경계를 맡길 만한 녀석이야. 바로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내놓다니.”
세르피나는 순수하게 라일라를 칭찬했다.
“물론 널 부른 건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그러니까 우린 아직 널 신뢰하지 않는다니까.”
“오냐, 널 부른 것까지 좋은 판단이라고 여기자꾸나.”
세르피나는 라일라를 흘끗 바라봤다.
“그 대가는 크지만.”
“…….”
브레이브는 대꾸하지 않았다.
* * *
쿠웅!
드래곤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덩치 덕에 마치 산이 솟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의 시선이 지크에게 쏠렸다. 지금까지 지크를 향한 드래곤의 시선은 그저 분노와 증오에 휩싸여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경계심이 추가되었다.
지크에게 당한 어깻죽지 부근에는 지금까지의 생채기보다 훨씬 더 깊은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물론 치명상은 아니다. 드래곤의 강인한 체력과 생명력을 생각하면 움직임에 방해를 받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당한 상처보다 깊은 것도 사실. 게다가 방금 전의 공격은 제대로 된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지크라도 갑자기 샘솟은 마력을 바로 이용해 전력으로 기술을 때려 박을 순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드래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앞으로의 공격은 더욱 치명적일 거라는 것도.
우우우웅!
드래곤이 마법을 준비했다. 다섯 개의 마법이 순식간에 구축되는 그 모습은 언제 봐도 대단했다. 적인 입장에서 그걸 순수하게 감상할 순 없었지만.
지크는 깨어난 마력을 몸 여기저기에 보냈다. 거대한 마력은 그 자체로 전능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지크는 어디까지나 냉정했다.
‘겨우 마력이 드래곤과 동급이 된 것에 불과해.’
지크는 희귀 금속에 비견될 정도의 비늘도 없고, 한 걸음으로 지면을 떨어 울리는 몸집도 없었으며, 고온의 마력이 섞인 숨결도 다섯 개의 마법을 일시에 구현하는 마법 실력도 없다.
지크는 한스와 스녹의 옆에 내려섰다. 와이그와 틸이 그들을 부축하고 있었다. 지크는 한스의 옆으로 가 그가 쥐고 있는 에스텔레이드를 뺏어 들었다.
“잠시 빌린다.”
“네.”
자신의 애검이 반쯤 강제로 강탈당하는데도 한스는 순순히 검을 건넸다.
에스텔레이드를 쥔 지크는 또다시 움직였다. 겁에 질린 그렌이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후웅!
지크는 다짜고짜 그렌에게 검을 휘둘렀다. 겁먹어 몸을 떠는 와중에도 그렌은 지크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지크는 전성기의 마력을 되찾은 상태. 게다가 들고 있는 검도 토르니움과 동격의 에스텔레이드다.
콰앙!
“아아악!”
지금까지의 상황과는 반대가 됐다. 그렌은 감히 지크의 일격의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벌레처럼 굴렀다.
‘죽일까.’
지크의 마음속에 살짝 갈등이 일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생각을 접었다.
‘드래곤의 시선을 끌게 내버려두는 게 낫겠어.’
완벽히 몰락한 그렌 제너드와 당장 눈앞에 닥친 드래곤.
둘의 위험도를 비교하면 당연하게도 드래곤에게 저울추가 쏠린다.
“내놔!”
퍼억!
“커헉!”
휘청거리는 그렌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렌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지크는 그대로 그렌의 손을 꺾었다.
“끄아악!”
그렌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토르니움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지크가 드래곤의 위협 앞에서도 그렌을 찾아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툭!
토르니움을 가볍게 발로 걷어차 공중으로 띄우고는, 빈손으로 토르니움을 붙잡았다.
퍼어어엉!
드래곤의 마법이 완성된 건 그때였다. 지크는 그렌을 다시 한번 걷어찼다.
“커헉!”
다시 그렌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 덕에 그는 마법의 중심 권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드래곤의 마법이 좀 무지막지 한 것이 아니다보니 고작 그 정도로 마법의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정도만 해줘도 그렌은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미끼 역할을 해달라고.’
지크는 그렌이 기꺼이 그 숭고한 역할을 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지크에게 진 빚이 얼마던가. 저 정도로는 이자도 제대로 되지 못한다. 그걸 생각한다면 오히려 자신의 관대함에 감사하지 않을까.
그렇게 잠시 실없는 생각을 했던 지크도 몸을 움직였다. 해방된 마력에 힘입어 그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훨씬 재빨랐다.
콰아아아앙!
드래곤의 마법이 지크가 있던 자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바람에 휘감긴 번개와 화염이 지크를 집어삼키기 위해 거친 춤을 췄다.
‘3속성 융합 마법!’
윌위스의 인페르노와 같은 수준의 마법이다. 물론 원래는 3속성 정도가 아니라 저기에 대지와 얼음도 섞였었다.
서로 상쇄되는 속성들이 있었지만 드래곤의 엄청난 마력과 마법 능력은 그것들을 억지로 규합하는 데 성공했다. 절대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 이빨을 드러내는 모습은 굉장히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지와 얼음의 속성은 윌위스의 방해에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지크는 손에 힘을 줬다. 두 검의 감촉이 손 안에서 느껴졌다. 그것들이 지크의 마력을 집어 삼켜 힘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에스텔레이드. 다른 한 손에는 토르니움.
빛과 어둠의 마력이 검 밖으로 새어 나왔다. 운명을 비트는 열쇠에서 나온 마력이 두 검에 섞이며 검의 힘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스윽!
지크가 토르니움을 들어 올렸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촉일까. 토르니움 특유의 거친 마력이 날뛴다. 토르니움에 마검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 제대로 마력을 다루지 못하면 오히려 주인의 몸을 해친다.
그러나 회귀 전에 토르니움을 말 그대로 손과 같이 움직였던 지크에겐 전혀 불이익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움마저 불러일으키는 감각이었다.
후웅!
마력을 가득 담아 토르니움을 휘둘렀다. 검은 마력이 드래곤의 마법과 부딪쳤다.
콰드드드득!
마검의 광폭한 마력이 마법을 밀어낸다. 바람은 흩었고 불은 꺼뜨렸으며 번개도 꺾어버렸다. 마법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며 지크는 이번엔 에스텔레이드를 들어 올렸다.
회귀 전 그렌의 애검으로서 언제나 지크의 앞을 가로막던 검. 자신은 절대 사용할 수 없다 생각했고,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음에도 그럴 생각이 없어 한스에게 양보했던 검.
그것이 왕년의 마왕의 손에서 찬란한 빛을 터뜨렸다.
지크의 거대한 마력이 급격하게 빛으로 바뀌어간다. 지크는 마력을 검 끝에 집중, 그대로 찔러 넣었다.
큐웅!
빛이 쏘아진다. 그것은 토르니움의 마력에 약해진 마법을 그대로 꿰뚫었다.
퍼엉!
갈 곳 잃은 드래곤의 마법이 허공에 날뛰다 사그라들었다. 지크와 드래곤의 시선이 마주쳤다.
크아아아아아!
드래곤이 커다란 포효를 내뱉으며 입을 쩌억 벌리고 지크를 향해 몸을 던졌다.
빛과 어둠의 마력을 휘감은 채 지크 또한 드래곤을 향해 뛰어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