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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38화 (538/628)
  • 제538화

    그 장면은 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목격했다.

    직접 전투를 하고 있는 지크 일행도, 대열을 정비한 채 후퇴하고 있는 병사들도, 겁을 먹은 채 목적지도 없이 그저 도주하고 있는 도망자들도.

    지금껏 지크 일행의 공격에 꿈쩍도 않고 있던 거대한 드래곤의 거체가 균형을 잃은 채 허공을 날고 있는 모습이 눈동자에 박혔다.

    쿠웅!

    마치 어떤 자연 재해에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거대한 산처럼,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 같았던 드래곤이 땅바닥을 뒹굴었다. 약간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현실이었다. 그리고 드래곤을 처음으로 쓰러뜨린 자는, 스틸월 백작군이고 연합군이고 모두 알고 있는 자였다. 매일 그렌을 상대로 인간 같지 않은 전투를 벌여 눈에 띄는 자였으니까.

    환호성은 없었다. 기쁨의 포효를 내지르기엔 고작해야 드래곤을 한 번 넘어뜨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보이던 드래곤에게 인간의 힘이 통한 것도 사실이었다.

    희망이라는 간소한, 하지만 벅찬 두 글자가 가슴에 솟아난 것도 어쩔 수 없다.

    동시에 지크, 그 두 글자의 이름이 전장에 있는 사람들의 뇌리에 더욱 깊이 새겨졌다.

    다른 이들이 지크의 실력에 경악과 희망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때, 지크도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이 힘은….’

    틀림없다. 자신의 마력이다. 잠자고 있던 마력이 모조리 깨어나 그의 몸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력은 아직 깨어날 때가 아니었다. 아직 많은 마력을 품은 가장 안쪽의 마지막 한 조각이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가 이렇게 모든 마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적은, 세계수와 공명한 윈두르를 들고 있을 때뿐이었다.

    지크는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폈다. 손가락 끝에 드는 이물감.

    ‘운명을 비트는 열쇠?’

    틀림없다. 이물감이 느껴지는 손가락은 윈두르의 일부였던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박혀 있던 그 손가락이었다.

    ‘설마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다시 내 손가락에 들어오면서 마력이 풀린 건가?’

    그렇다면 갑자기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다시 그의 손가락에 자리를 잡은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윈두르는 라일라가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생각나는 건 하나다.

    ‘라일라 녀석의 도움이로군.’

    지크는 확신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건 그가 자주 짓던, 적들을 조롱하고 괴롭힐 때 짓던 끔찍한 미소가 아니었다. 무척이나 잔잔한 것이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릴 녀석이 아니지.’

    * * *

    세르피나는 수정의 파편에 덩그러니 앉은 채 유리관 안에 들어간 라일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윈두르를 꼭 껴안은 채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을 장치로 유도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다.

    그저 쓸데없는 발악이라고 여겼다. 이곳에서 드래곤을 제어할 방도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자긍심의 원천인 클로원의 이름을 걸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과 윈두르가 공명하기 시작하자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리고 곧 엄청난 마력이 유동하자 벌떡 일어섰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생각해보니 라일라는 세르피나 자신이다. 그녀도 라일라가 그녀의 시스템 제어권의 접근에만 경계를 하는 걸 역이용해 물리적으로 수정을 부셔 라일라의 뒤통수를 쳤다. 라일라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시스템으로 드래곤을 제어하려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방법을 시도하려는 건가?’

    누가 봐도 지금 라일라의 상태는 무방비다. 세르피나의 마법이라면 유리관을 파괴하고 라일라를 방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라일라가 무슨 짓을 꾸미건 모두 헛고생이 된다.

    그러나 세르피나는 라일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수정 파편 위에 앉아 다리를 꼬고 손으로 턱을 괴었다.

    “…예상외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세르피나의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그녀의 목덜미에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세르피나는 목 아래를 내려다봤다. 새하얀 검이 그녀의 목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가 무척이나 잘 아는 검이다.

    에스텔레이드.

    클로원 제국의 황태자의 검. 그 예기는 세르피나의 목에 닿지 않았는데도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 같다.

    세르피나는 완전히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봤다.

    “설마 네가 라일라가 생각해낸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냐?”

    그녀는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지크 브레이브.”

    그, 지크 브레이브는 세르피나의 움직임에 신경을 바싹 세우면서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아니, 난 그저 네가 더 이상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도록 불린 감시자다.”

    “그렇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이군. 네가 해결책이라 했으면 저 녀석에게 실망할 뻔했어.”

    “내가 저 녀석들을 도우러 갈 수 있을 리 없잖아.”

    “그걸 알기에 실망하려 했던 거다. 저 녀석이 자포자기해 일단 불가능이든 뭐든 손부터 뻗어 보는 게 아닐까 생각했거든.”

    사념체인 그들은 세계수의 마력이 있는 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크 브레이브를 불러 봤자 지크를 도우러 가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일에 힘을 썼군.”

    “어째서?”

    “난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그걸 고이 믿긴 힘들다는 건 알지?”

    “너희들이 믿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지.”

    브레이브의 눈에는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했다. 그 기색을 알아챈 세르피나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의심이 된다면 나를 죽이지 그러나.”

    “그런 생각은 차고 넘치는데. 곱게 죽어줄래?”

    “싫다.”

    브레이브는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녀의 목을 쳐 후환을 없애고 싶다.

    하지만 그 세르피나다. 마왕으로 불리며 그와 죽고 죽이기를 얼마나 했던가. 그녀의 실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라일라에게 소환을 당한 후 세르피나의 뒤에 섰을 때, 그는 기회가 되면 바로 세르피나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과연 마왕이라 불렸던 자. 세르피나의 목에 검을 들이대려 할 때,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보고 그는 그녀를 죽이려던 걸 포기하고 그저 그녀의 목에 검을 들이미는 것으로 타협해야 했다.

    아니, 그저 위협용으로 검을 들이대려 했을 뿐, 설마 그녀가 자신의 목에 검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만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목을 베려 시도하는 즉시 반격하겠지.’

    그는 라일라를 지키기 위해 불렸다. 세르피나도 그걸 알고 있다. 당연히 전투가 시작되면 브레이브보다 라일라에게 공격을 더 집중할 게 뻔했다. 브레이브는 어쩔 수 없이 라일라의 보호를 우선할 수밖에 없으니까.

    세르피나라면 충분히 그럴 녀석이었다.

    그걸 아는지 세르피나는 브레이브에 대한 관심을 아예 끈 것처럼 보였다. 브레이브가 확 검을 그어버리면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심각하게 고민을 할 만큼.

    ‘이 녀석, 정말로 아무 짓도 할 생각이 없나?’

    세르피나는 그저 라일라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못하게 감시를 하는 역할을 맡았으니, 그녀의 그런 태도는 분명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무척 의심스러웠다.

    우우우웅!

    그 둘이 대치 아닌 대치를 하는 동안, 유리관 안에서는 계속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이 소용돌이쳤다.

    “흐응.”

    세르피나가 알겠다는 듯 콧소리를 냈다. 라일라가 껴안고 있던 윈두르의 날 한쪽 부분에 마력이 집중되더니, 곧 그 부분이 사라진 걸 목격한 것이다.

    “운명을 비트는 열쇠.”

    세르피나의 눈이 브레이브에게 향했다.

    “지크의 마력을 해방할 셈이구나, 너희들.”

    “아무리 상대가 드래곤이라도 마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지크라면 충분히 대적할 수 있을 거다.”

    숨길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 브레이브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군. 물론 그렇다 해도 드래곤이 유리하겠지만, 지크에게는 동료들이 있지. 재미있겠어. 이제는 정말로 누가 이길지 모르겠군.”

    브레이브는 깊은 눈으로 세르피나를 쳐다봤다.

    분명 세르피나의 계획이 방해받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현재의 상태를 분석하려 중얼거리고 있었다.

    “황제의 검 중에서도 파편 부분은 지크와 더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 애초에 황제의 검이 자신의 일부를 억지로 지크에게 밀어 넣은 거니까. 세계수 분신의 힘을 사용한다면 지크에게 충분히 다시 집어넣을 수 있겠어. 세계수의 마력이 필요한 부분은 라일라가 직접 중계기가 되어 지크에게 보내고 있는 모양이고. 그렇군. 저런 수라면 시설 바깥에서도 지크가 계속 자신의 마력을 활용할 수 있겠어.”

    “…진짜 그렇게 분석만 할 생각이냐?”

    “정말로 끈질긴 남자로구나. 뭐냐, 너는. 내가 너희들을 정말로 적대라도 해주길 원하더냐.”

    “네 녀석을 믿을 수 없으니 하는 말이지. 애초에 지금의 사태도 네가 라일라의 뒤통수를 치면서 일어난 일이잖아.”

    “뒤통수라니. 애초에 우리는 그런 계약이었다. 저들이 내 지식을 배우고, 나는 그들의 빈틈을 노리는 그런 계약. 신뢰 관계 따위가 어디 있었다고 뒤통수 운운한단 말이더냐.”

    “말 한번 잘 해줬어. 그래, 우리 사이에 신뢰 관계 따위는 없지. 그런 네가 얌전하게 있겠다는 말을 한다면 어떤 심정이겠냐?”

    “눈곱만큼도 믿을 수 없겠지.”

    “고마워. 내 마음을 이해해 줘서.”

    이토록 메마르고 건성인 고마움의 표현이 있을 수 있을까. 감사는커녕 경계만 잔뜩 돋아나 있는 목소리에 세르피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믿든 믿지 않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난 정말로 이 이상 뭔가 할 생각은 없다. 겸허히 바깥의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이유는?”

    “저게 내가 한 마지막 발악이기 때문이지.”

    “…계속해 봐.”

    마지막 발악. 그 단어가 브레이브의 흥미를 끌었다.

    “너희들의 생각 이상으로 나는 몰려 있었다. 지크 그놈은 정말로 치가 떨리는 놈이더군.”

    지크를 떠올리며 세르피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전 한창 치고받을 때는 너 이상의 빌어먹을 놈은 없으리라 여겼지만, 그놈에 비하면 넌 차라리 귀여운 녀석이었다. 아니, 어차피 너나 그놈이나 동일한 놈이니 굳이 차이를 둘 필요도 없겠군.”

    “…….”

    “어쨌든, 드래곤을 깨우는 건 나로서도 도박과 같은 일이다. 제국이 없는 이상 드래곤을 다시 잡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고, 그걸 다시 수정 안에 집어넣어 시스템 안에 적용시키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지. 불가능하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물론 다른 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도 확실한 건 아니야. 무엇보다 지크가 죽는다고 라일라가 전적으로 협조해줄 거라는 기대 자체가 불확실하기 짝이 없지. 저 녀석이 싫다고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사라질 테니까.”

    “…그런데도 굳이 드래곤을 깨워 지크를 습격했다고?”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브뤼셀 시스템의 코어가 되어 제국의 받침이 되는 것. 그 이상의 존재 의의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역시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널 불렀으면 안 됐어.”

    “이미 지난 일이다. 게다가 날 부른 것 이외의 방도도 없었다, 너희에겐.”

    “그래서 드래곤을 깨우는 걸로 네가 할 일은 끝났으니 조용히 결과가 나오는 걸 지켜보겠다는 건가?”

    “그렇다.”

    일단 말만 들으면 그럴 듯하다. 그러나 브레이브는 그 이유 말고도 세르피나에게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수상하단 말이지. 네 말을 믿는다면 나의 등장과 지크의 마력 해방은 네 계획에 확실한 방해가 될 텐데, 네 반응은 너무 담담해. 아무리 실패 가능성이 큰 마지막 발악이라도 말이야. 아니, 오히려 마지막 발악이기에 더욱 초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세르피나가 한숨을 쉬었다. 브레이브를 무시하는 것 같은 한숨은 아니었다.

    그건 꼭, 말하기 껄끄러운 무언가를 내뱉기 전에 하는, 마음을 다잡는 행위 같았다.

    “…그래, 어차피 너나 나나 똑같은 신세. 아무리 악연이라도 인연은 인연이지. 아마 어떤 결과가 나오든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이번으로 마지막일 테니.”

    세르피나가 돌아 앉아 정면으로 브레이브를 응시했다. 그녀의 목에 겨누어진 칼이 아슬아슬하게 피부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네가 믿기 힘든 일일 수도 있다. 그래도 듣겠느냐?”

    “애초에 이런 상황 자체가 농담 같은 상황이야. 뭘 이제 와서.”

    “하긴, 그도 그렇구나.”

    세르피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본격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건 내 마지막 발악임과 동시에, 내 삶의 결론을 짓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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