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6화
피할 수 없는 싸움에서 겁부터 먹고 들어가면 필패다. 지크는 자신감을 잔뜩 추어올린 채 드래곤을 맞상대할 자세를 갖췄다.
하지만 역시 단순 자신감만으로 상대하기엔 드래곤이란 존재는 강력했다.
쩌어어억!
다시 한번 드래곤의 입이 열린다. 벌써 세 번째 브레스. 이번에도 드래곤이 빗맞혀 준다는 행운을 바라기엔, 벌써 두 번째 브레스가 전장 지근거리를 강타했다.
샛노란 안구 안으로 쭉 째진 눈동자가 지크를 직시했다.
콰아아아아아!
세 번째 브레스가 뿜어졌다. 예상대로 이번 브레스는 똑바로 지크를 향해 날아왔다.
“알아서 피해라!”
일행에게 한 마디를 뱉어내고 지크는 옆으로 뛰었다.
지크 일행은 모두 자기 한 목숨 정도는 지켜낼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그의 주위엔 첼시와 피나도 있었지만 지크는 그녀들에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렌 제너드 놈의 동료들이야 알아서 할 바고.’
전투 의지가 없어 보여 그대로 놔두고는 있지만, 그들이 적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콰아아앙!
지크가 있던 자리에 브레스가 강타했다. 고열을 머금은 마력이 지면을 순식간에 꿰뚫고 불사른다. 널브러져 있던 할튼의 시체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일단 브레스를 피해내긴 했지만 드래곤의 눈이 지크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마음을 놓기엔 아직 이른 것 같았다.
쿠우우우웅!
드래곤이 고개를 돌렸다. 그에 따라 브레스도 움직였다. 지면에 검게 탄 균열을 자아내며 브레스는 지크의 뒤를 쫓았다.
‘빨라!’
아무리 지크가 마력을 이용해 재빠른 움직임을 보인다 해도 드래곤이 고개를 살짝 움직이는 것보다 빠르긴 요원했다.
지크의 등 뒤로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지금!’
다가오는 마력에 신경을 집중하던 지크가 순간 옆으로 뛰었다.
콰아아아아!
브레스가 지크가 있던 자리를 강타하고 순식간에 앞쪽으로 이동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그대로 브레스에 직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기가 끝난 건 아니었다. 앞쪽으로 지나갔던 브레스가 방향을 꺾어 다시 지크 쪽으로 향한 것이다.
‘끈질기긴!’
다시 한번 방향을 꺾어 브레스를 피한다. 이번에는 지크의 행동을 예상한 듯 브레스도 순식간에 지크가 피한 쪽으로 방향을 꺾었지만, 지크는 거기서 한 번 더 꺾었다.
결국 이번에도 브레스는 지크를 직격하지 못했다.
훅!
브레스가 사라졌다. 지크는 그제야 두 발을 땅바닥에 디디고 드래곤을 쳐다봤다.
‘폐활량 한번 더럽게 좋네.’
묘하게 어긋난 감상이 어떻게 보면 지크다웠다.
“지크 님!”
“괜찮으십니까!”
한스와 스녹이 달려 왔다.
“난 괜찮다.”
그리고 지크는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번 공격에는 상당한 피해가 있었다.
아무리 다른 이들이 지크와 그렌의 전투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해서 그들의 주변에 커다란 공터가 생겨났다고 하더라도, 이곳은 엄연한 전장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지크가 사람이 없는 곳으로 브레스를 유도해 브레스의 위력에 비하면 피해는 경미했다.
그래도 상당한 수의 사망자가 난 것도 사실이었다.
다행히 부상자는 몇 없었다. 있다 해도 날아온 파편에 얻어맞은 경상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브레스에 휘말린 자들은 정통으로 직격을 당했든 비껴 맞았든 모두 한 줌 재로 변했다.
‘뭐, 전부 연합군 놈들이니까 상관없어.’
너무도 무감정하게, 지크는 그렇게 피해에 대한 생각을 끝냈다.
“지크!”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지크를 부른다. 레오나가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레오나냐.”
“다친 덴 없는 거지?”
“보다시피 멀쩡해.”
“내가 말했지 않느냐. 고작 그 정도에 죽을 녀석이 아니라고.”
레오나의 뒤쪽 허공에서 윌위스가 내려앉았다.
“그 정도의 녀석이라면 예전 내 인페르노에 맞아 저세상에 갔겠지.”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지크가 과장되게 혀를 내둘렀다.
“엄살은. 그건 그렇고, 설마 저 거대한 덩치도 자네의 계획인 건 아니겠지?”
윌위스의 시선이 허공에 있는 드래곤으로 향한다.
다시 브레스를 쏠 기미는 없다. 대신 녀석은 지크 일행이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이 도착할 때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은 가장 늦게 등장시킨다는 양식미에는 부합하긴 하다만.”
“저는 극단의 지배인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요.”
“하긴, 자네 그쪽에는 재능이 없어 보이긴 해.”
“절망을 주는 계획을 짜는 데에는 꽤 재능이 있는데요?”
“그것 참 끔찍한 재능이군그래.”
지크와 가벼운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도 윌위스의 눈은 드래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드래곤이라…. 마법의 종주라는 전설이 내려오는 존재인가.”
“감회가 깊으시겠습니다.”
“우리를 적대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말이네.”
그때, 커다란 발소리를 내며 누군가 일행에게 달려왔다.
“틸 씨도 오셨습니까.”
“응원군이 필요한 것 같아서.”
“말씀대로입니다만, 상대는 드래곤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돈은 받았습니다. 그러면 돈값을 해야죠.”
“용병의 귀감이구먼. 용병들이 전부 자네 같았으면 용병들을 보는 시선도 달랐을 텐데.”
윌위스가 감탄했다.
“그러면 곤란합니다. 다른 곳이 다 똑같으면 경쟁력이 사라지니까요.”
“흘흘! 사업 정신까지 똑바로 박힌 용병 대장이라니, 훌륭하군. 다른 곳은 전부 주먹구구식인데 말이야.”
윌위스는 껄껄 웃었다.
“지크 님!”
커다란 소리가 들린다. 와이그의 품에 안겨 일행에게 달려온 루벨라가 땅에 발을 디디는 모습이 보였다.
“성녀님과 와이그 님도 오셨군요.”
“밸리드 놈들은 전부 정리가 끝났으니까요. 갑자기 튀어나온 드래곤에 호기심이 생겨 와 보았습니다.”
그러며 와이그가 드래곤을 올려다봤다.
“혹시 이것도 지크 님의 깜짝 이벤트는 아니시겠죠?”
“왜 하나같이 제가 저 녀석을 불러들였을 수도 있다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치만요.”
대답은 루벨라에게서 들려 왔다.
“지크 님이시잖아요?”
지크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것참, 할 말 없게 만드는 말이군요.”
지금껏 해온 게 있는지라 지크는 자기변명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하나같이 엄청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지크는 조금 떨어진 곳에 엉거주춤 서 있는 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 크리스넌 경.”
“아, 도련님.”
그는 강철검 기사단의 대니 크리스넌이었다. 아무래도 그도 지크가 걱정되어서 달려온 모양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등장한 지크의 동료들에 의해 접근할 기회를 잃고 서 있던 모양이었다.
“망할 아버지에게 전해요. 병력을 최대한 후방으로 배치하라고. 전쟁도 이 정도면 끝났고, 연합군 놈들이 이 와중에 공격을 할 수 있을 리 없겠죠. 그럴 여유도 없어 보이고.”
홍수를 피해 도망가는 개미떼처럼 흩어지고 있는 연합군을 보며 지크는 그리 말했다.
“알겠습니다. 한데 지크 님은 드래곤을 상대하실 생각입니까?”
“누가 봐도 적의를 풀풀 풍기고 있으니, 가만 두고 볼 순 없지 않습니까.”
“저희도 돕겠습니다. 백작가의 최정예 기사들이라면 충분히 드래곤이라도 대적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도 그렇군요. 다만, 최소 기사단의 부단장급 이상만 오셔야 합니다. 그 아래라면 괜히 사망자만 날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대니는 바로 본진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쿠우웅!
지면이 떨렸다. 지진은 아니다. 거대한 무언가가 지면에 떨어져 내린 것이다.
“왔습니다.”
틸이 검을 내세우며 말했다. 다른 이들도 전투 준비를 했다.
‘역시 크군.’
지크는 눈앞에 내려앉은 드래곤을 보며 태평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과연 전설로 내려올 만한 몬스터다. 아무리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더라도, 이런 괴물이라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공포와 함께 오랜 시간 전해져 내려올 만하다.
“드래곤이라니. 할머니께 들려드리면 기겁하시겠네.”
레오나의 할머니라면 분명 호수의 일족의 무녀였다. 아마 이 세계에서도 손꼽히도록 오래 살아온 그녀라면 드래곤의 위험성을 다른 이들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귀여운 손녀이자 후계자가 분노한 드래곤과 맞닥트렸다면 그야 기겁을 할 만도 할 것이다.
쩌어억!
드래곤의 입이 다시 열렸다.
‘또 브레스인가.’
벌써 네 번째로 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위험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행은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드래곤의 브레스가 향한 곳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
콰아아아앙!
브레스가 다시 한번 대지에 상흔을 새긴다. 동시에 드래곤이 노리던 목표가 더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아아악!”
고귀하신 태양의 용사께서 브레스를 피해 온갖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꼴을 보니 지크와 한스, 스녹의 관심이 드래곤에게 쏠린 것을 틈 타 몰래 도망가려 했음이 분명하다.
“우와, 정말로 벌레 같네.”
레오나가 팔로 입을 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지독한 악취에 노출된 듯한 몸짓이다. 그 정도로 그녀의 혐오감은 깊었다.
“그래도 저걸 다 피하네요.”
루벨라가 경멸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 어투에는 ‘콱 죽어버리지’ 같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가 카르위먼 내에 파고든 더러운 밸리드의 협력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어떻게든 동료로 끌어들이려던 그녀들에게서 최악의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일단 내가 원하던 그림은 나왔군.’
그렌 제너드를 나락으로 완전히 떨어뜨렸다. 이제 와 저 녀석을 용사나 영웅 어쩌고 하는 인물들은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한데, 드래곤이 저 녀석은 왜 공격했지?’
단순히 한 놈도 놓치지 않겠다고 드래곤이 마음을 먹었다기엔 지금도 사방으로 도망가는 병사들이 많았다.
‘드래곤의 목표는 나 아니었나?’
생각해보면 드래곤이 자신을 적대하는 것도 상당히 뜬금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깨어난 드래곤이 무슨 원한이 있어서 자신을 공격한단 말인가.
‘직접적으로 드래곤에게 공격받은 건 나와 그렌 제너드뿐이야.’
지크는 자신과 그렌의 공통점이 뭐가 있는지 생각해봤다. 그렌과의 공통점이라는 것에 바로 기분이 더러워졌지만 그래도 아슬아슬 참을 수 있었다. 다행히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구토를 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설마 회귀를 한 자들을 노리는 건가?’
먼저 떠오르는 건 그것이다. 그러나 지크는 바로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후웅!
드래곤이 육중한 몸을 비틀었다. 거대한 꼬리가 그들에게 날아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피했다.
콰아아아앙!
드래곤의 꼬리가 강타당한 곳에 길쭉한 크레이터가 생겼다. 고작 꼬리 한 번 휘둘러 만든 위력이다. 드래곤은 그 강대한 육체만으로도 엄청나다는 전설도 있었지만 직접 보니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지크의 눈길을 끈 것은 꼬리의 위력이 아니었다.
‘방금 거, 확실히 한스를 노렸었지?’
그렇다면 드래곤이 회귀자를 노린다는 가설은 사라진다. 그리고 다른 가설 하나가 부상했다.
‘설마 클로원의 검을 사용한 자들을 노리는 건가?’
그러나 지크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쿠오오오오오오!
지금까지의 공격은 장난이었다는 듯, 드래곤의 파상 공세가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