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5화
모기처럼 귀찮게 엉겨 붙던 할튼을 끝장낸 지크는 다시 그렌에게 향했다.
그렌은 자기보다 한참은 더 실력이 낮은 한스와 스녹의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반격은커녕 어떻게든 도주하려 눈치를 보는 게 그대로 읽혔다. 하지만 그 도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 실력에 몇백 번을 사죄해도 부족할 정도로 벌레 같은 정신력이었다.
‘아니, 그러면 벌레한테 미안하지. 벌레들도 도망은 확실히 치니까.’
눈앞에서 보이는, 그렌이 벌레보다 못한 증거에 지크의 마음이 훈훈해졌다.
누가 봐도 지크 일행이 완벽히 유리한 상황. 하지만 지크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아까의 지진은 뭐였을까? 정말로 그냥 일반적인 지진이었을 뿐인가?’
정말로 단순한 자연재해일 뿐이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지크는 그 지진이 뭔가의 전조라는 예감이 계속 들었다.
때문에 기감을 최대한 넓게 펼쳐 주변의 상황을 계속 주시했다.
지크의 기감에 반응이 온 것은 그때였다.
그렌에게 달려들던 지크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딱딱한 안색으로 기감이 느껴진 곳을 쳐다봤다.
새파란 초원과 멀리 흐르는 강 너머로 뾰족뾰족한 봉우리가 나란히 정렬되어 있는 산맥이 어스름히 보인다.
그곳에서 어떤 마력이 날아왔다.
상당히 먼 거리를 날아온 듯 마력은 상당히 희미했다. 그러나 지크는 알 수 있었다.
이 마력이 출발했을 때에는 지금처럼 살랑바람 같은 마력이 아닌, 강력한 태풍 같은 것이었다고.
‘뭐지? 아까의 지진과 관련이 있는 건가?’
뚜렷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지크는 자꾸 아까의 지진이 눈에 밟혔다.
잠시 후.
쿠웅!
마력의 파장이 전장을 휩쓸었다.
“어?”
“뭐, 뭐야?”
아까 마력의 잔향을 느낀 건 지크뿐이었다. 지진 때문에 기감을 넓게 펼쳐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덕분이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뛰어난 지크의 재능 덕도 컸다.
그러나 이번의 마력 파장은 전장에 있는, 마력을 다루는 자라면 대부분 느낄 수 있었다.
지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산맥 쪽을 바라봤다. 이번 마력의 파장이 날아온 곳도 산맥이 있는 쪽이었다. 그리고 아까와는 다르게 제법 마력의 잔향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마법…인가?’
전장을 휩쓴 마법은 상당히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이런 형태의 마력은 보통 마법을 사용할 때 보인다.
‘마치 뭔가를 찾는 것 같았는데….’
갑작스러운 마력의 파도에 하나둘 마력이 날아온 곳을 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도 지금 느낀 마력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지크만큼 세밀하게 감지한 사람은 없었지만, 적어도 마력이 시작됐을 당시 엄청난 규모였던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렌을 붙들고 있는 한스와 스녹도 흘끗흘끗 산맥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지크는 단순하게 넓게 펼쳐진 기감을 산맥 쪽으로 집중했다.
‘일단 전쟁부터 끝내야겠어.’
그 후 저 산맥을 샅샅이 뒤질 생각이었다. 멀리서만 봐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산맥임을 알 수 있었지만 이런 마력을 분출할 존재라면 의외로 찾기 쉬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크는 굳이 산맥을 조사할 필요가 없었다.
지크의 눈에 산맥 쪽에서 날아오는 검은 점 하나가 보였다.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라 마력을 집중한 지크의 눈으로도 그 정체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검은 점점 가까워졌고, 그에 따라 그 형태도 뚜렷해졌다.
‘저건…!’
웬만하면 놀라지 않는 지크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커다란 덩치와 피막으로 뒤덮인 날개. 앞으로 쭉 뻗은 얼굴에는 커다란 뿔이 달려 있고 뒤로는 마치 커다란 뱀 같은 꼬리가 흔들거렸다.
전체적인 모습은 거대한 도마뱀 같았지만 도마뱀 따위와는 비교조차 불허하는 존재.
얼마 전에 직접 본 적이 있던 터라 정체를 틀리진 않을 것이다.
“드래곤.”
서서히 그 육중한 몸을 본격적으로 내보이기 시작한 존재를 보며 지크는 중얼거렸다.
“어, 어이! 저거 뭐야?”
“아, 뭐가…!”
한참을 목숨을 걸고 싸우는 중 옆에서 자신을 두드리는 동료에게 짜증을 내던 병사는, 동료가 가리킨 곳을 보고 얼어버렸다.
전투가 멈추기 시작했다. 거세게 부딪치는 검도, 화려하게 폭발하는 마법도, 상처를 치료하는 성법도 하나둘 사라졌다.
그렇게 전투를 멈춘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단 하나였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
“지크 님!”
한스가 지크에게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드래곤에 못 박혀 있었다. 당연히 그렌은 방치되었지만 지크는 그에 대해 뭐라 말하지 않았다.
이제 마력을 다루는 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눈에도 그 거대한 몸이 확연히 보였다.
“…드래곤?”
누군가 중얼거렸다.
여기 있는 이들 중 지크를 제외하곤 진짜 드래곤을 본 자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드래곤을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전설로만 내려오는 드래곤의 모습은 너무나도 유명했다.
“저, 정말로 드래곤이야?”
“전설에나 나오는 거 아니었어?”
갑자기 등장한 전설 속의 생물에 사람들은 당황했다. 정말로 저것이 드래곤인지를 의심하는 사람부터 갑자기 전설 속의 생물이 왜 튀어나왔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까지, 사람의 면면만큼이나 여러 생각이 전장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고민을 할 여유는 길지 않았다.
날아오던 드래곤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우우우웅!
주변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드래곤의 입 안에서 붉은색의 기류가 생성됐다.
그것의 색채는 점점 더 선명해져서, 최종적으로는 마치 드래곤의 입 안으로 태양이 뜬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브레스!’
전설 속 드래곤이 등장할 때마다 항상 함께 등장하곤 하는, 드래곤의 마력이 담긴 숨결.
콰아아아아!
브레스가 쏘아졌다. 화염을 농축해 하나의 빛으로 만든 것처럼, 붉은색의 초고온을 머금은 마력이 일직선으로 날아간다. 하늘이 마치 석양이 지는 마냥 붉게 물들었다.
콰아아아앙!
브레스가 지면에 격돌하며 엄청난 굉음을 뿜어냈다. 폭발에 으레 따라오는 비산하는 파편 같은 건 적었다.
브레스는 부딪치는 모든 걸 그 뜨거운 온도로 태우고 녹여 눌어붙게 만들어 버렸다. 파편 대신 화끈한 공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이어지던 브레스가 뚝 끊겼다. 전장 옆으로 길고 깊은 도랑이 패었다. 도랑은 아직까지 붉은 기를 머금은 채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생생한 생기를 뿜어내던 도랑 주변의 초목도 검게 타 불어오는 열풍에 바스스 부서졌다.
“으….”
“어….”
병사들이 브레스의 위력을 보고 얼어붙었다. 지금껏 기사나 마법사, 신관 등 여러 초인적인 인간들의 능력을 보고 몸소 경험해 본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의 공격은 그들이 보기에도 차원이 달랐다.
“으, 으아아아아!”
“드래곤이다! 진짜 드래곤이다아아아!”
병사들이 패닉에 빠지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그건 아무래도 훈련도가 낮은 연합군 쪽에서 빈발했다.
그렇다고 스틸월 백작군이 모두 침착하다는 건 아니었다. 스틸월 백작군도 혼란스러운 눈으로 공중에 떠 있는 드래곤과 브레스가 남긴 파괴의 흔적을 번갈아 보며 공포에 질렸다.
거기엔 방금 드래곤이 보여준 무지막지한 파괴와 더불어 무지라는 요소가 작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실제로 드래곤이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판단 근거라고는 방금 본 브레스와 대대로 내려온, 근거도 없는 전설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을 공포로 밀어 넣기에는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그것뿐이었기에 사람들을 더욱 공포에 밀어 넣을 수 있었다.
“침착해라!”
“당황하지 말고 대열을 지켜라!”
부관들이 소리치며 어떻게든 병사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한 번 일어난 동요는 그리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병사들을 진정시켜야 할 부관들이 같이 도망가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렇게 전장이 혼란에 젖어들 때, 지크는 오로지 드래곤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놈 그거 맞지? 클로원 유적에 있던 놈.’
생긴 건 일단 비슷했다. 게다가 그게 아니라면 어디서 갑자기 전설 속의 드래곤이 나타났단 말인가.
‘아까의 지진도 수상하고. 만약 저 녀석이 깨어난 탓에 일어난 것이라면 앞뒤가 맞아.’
상황을 추측하던 지크의 머리에 한 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수작을 부렸군. 클로원의 공주님.”
돌아가면 그 예쁘장한 얼굴에 주먹질 한 방 정도는 해야겠다는 바람이 고개를 내밀었다.
우우우웅!
드래곤의 입에서 또 한 번 거대한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브레스를 다시 한번 뿜어내려 하는 것이다.
콰아아아아아!
또다시 드래곤의 입에서 붉은색의 광선이 쏟아진다. 파괴력은 여전해 이번 공격도 지면에 커다란 생채기를 남겼다.
그러나 아까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브레스가 스틸월 백작군이나 연합군에게 입힌 피해는 실질적으로 없었다.
위력은 가공하기 짝이 없었지만, 두 브레스 모두 전장과는 조금 떨어진 곳을 할퀴었기 때문이다.
‘경고인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지크는 곧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드래곤이 내뿜고 있는 살기가 아주 진하게 느껴졌다. 저건 경고나 그런 걸 하려는 존재가 내뿜을 만한 게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쳐 죽여 버리겠다고 벼를 때 내뿜을 만한 거지.’
지크는 드래곤을 유심히 관찰했다.
‘나는 게 조금 버거워 보이는데?’
잘 보면 날갯짓을 할 때마다 조금씩 몸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사람이 기운이 없어 휘청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물론 저 덩치를 생각하면 버거운 걸 넘어서 애초에 커다란 날개 좀 붙어 있다고 허공에 뜨는 것 자체가 사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명색이 드래곤이지 않은가.
나는 걸 버거워하는 생명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몸이 안 좋은 건가.’
그럴 가능성은 높다. 수없이 오랜 세월 동안 수정 안에 갇혀 있던 존재가 아니던가. 솔직히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반칙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자신을 공격한 존재의 몸이 좋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지크는 그것에 그리 기대를 하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안정되고 있어.’
브레스의 정확도도 첫 번째보다 두 번째 것이 명백히 전장에 가까웠다. 게다가 몸의 흔들림도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다.
‘힘 빠진 놈 상대하긴 글렀군.’
지크는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어떻게 할까. 일단 저놈이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를 알면 좋겠는데.’
명확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그냥 성질이 더러운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오랜 세월 갇혀 있던 울분을 주변을 파괴하며 화풀이를 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특정한 이유로 분노를 했다면 어떻게 저 연합군 놈들 쪽으로 분노를 돌릴 순 없으려나?’
하지만 지크의 희망은 얼마 가지 않아 산산이 부서졌다.
지크는 순간 드래곤과 눈이 마주친 걸 느꼈다. 기분 탓일까. 드래곤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지크는 확실히 깨달았다.
‘아, 저놈과 안 싸우기는 글렀군.’
피할 수 없다면 남은 건 전투뿐.
‘뭐, 드래곤이고 나발이고, 한번 붙어보자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빠르게 때려눕힌다.
‘세르피나의 수작질에 말렸을 라일라도 걱정되니까.’
지크의 검에 마력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