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4화
“갔군.”
세르피나의 태평한 말에 라일라는 그녀를 노려봤다.
“그렇게 노려봐 봤자 바뀌는 건 없다. 이제 남은 건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이지. 지크가 죽는지, 죽지 않는지. 물론 지크의 죽음으로 끝나겠지만.”
라일라의 눈초리가 더욱 험악해졌지만 세르피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완벽하게 모든 힘을 다루게 된 지크라면 드래곤이 상대라도 좋은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클로원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드래곤 슬레이어가 됐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그의 마력은 전부 깨어나지 않았지?”
그렇다면 지크가 드래곤을 이기긴 힘들 것이다.
“거긴 다른 이들도 있어!”
“그게 너의 유일한 희망이겠지.”
세르피나는 이제는 무척이나 조용해진 공간을 걸었다. 고리 위에는 깨진 수정에서 튕겨 나온 파편이 꽤 많이 나뒹굴고 있었다.
세르피나는 그중에서도 사람의 무릎까지 오는, 딱 걸터앉기 좋은 수정 파편 위에 앉았다.
“그럼 마음 편히 기다리자고. 저 위가 어떻게 정리되는지.”
라일라의 기분이 험악하지 않았다면 차라도 한 잔 타 오라고 시킬 분위기다. 물론 정말로 시켰다간 라일라가 꺼낸 찻잔이 투척 무기로 바뀌겠지만.
세르피나는 정말로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셈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그녀처럼 평온하게 있을 수 없었다.
‘당장 나가서 나도 전투에 참가할까?’
하지만 그녀가 지금 허둥지둥 나간다고 해도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결과가 나왔을 확률이 높다. 뭔가를 하려면, 지금 여기서 해야 한다.
라일라가 초조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응?’
그녀의 손에 쥐여 있는 윈두르의 손잡이가 느껴졌다. 그 순간, 라일라는 급히 유리관 안으로 들어갔다.
“소용없다니까.”
세르피나가 혀를 끌끌 찼지만 라일라를 방해할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뭔가 행동을 취하려는 모습은 없었다.
라일라는 유리관 안에서 바로 마력을 장치 안으로 집어넣었다. 유적 안으로 도도하게 흐르는 마력 한중간에 뻥 하고 구멍이 난 것 같다. 드래곤의 부재로 인한 것이다.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들도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물론 세르피나의 장담처럼 슬슬 안정화되려는 낌새가 보이고 있었지만, 적어도 드래곤이 있던 시점으로 돌아가진 못할 게 분명했다.
적어도 세르피나의 말처럼 유적을 제어해 지크에게 도움을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라일라는 윈두르를 꼭 부여잡았다.
헛수고일 수도 있다. 헛된 희망일 수도 있다. 그러나 라일라는 끝까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지금껏 배운 건 그런 것이었다.
라일라는 세계수 분신의 마력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그 강대한 마력을 조종하기란 어려웠다. 지금껏 세계수 분신의 마력을 비교적 수월히 컨트롤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 유적의 시스템 내에서 마력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거의 무력화된 지금, 세계수 분신의 마력을 움직이는 건 순전히 라일라의 몫이었다.
라일라의 의지 따위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마력들이 야생마처럼 날뛴다. 라일라는 더더욱 집중했다.
무력화된 시스템을 그나마 수습해 보조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라일라의 의식은 시스템 안으로 점점 침잠해 들어갔다.
그렇게 밀고 당기길 얼마. 라일라는 세계수 분신의 마력 일부를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마력을 천천히 인도해 자신이 있는 유리관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윈두르와 공명시켰다.
우우우우웅!
유리관 안에서 거센 마력음이 터져 나왔다.
‘…저건?’
세르피나의 눈이 커졌다.
* * *
전장은 어수선했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옆에는 아직 버젓이 적군이 존재했지만 갑자기 닥친 지진이란 재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그 대부분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존재했고, 그들에 의해 전투는 슬슬 재가열되기 시작했다.
지크와 그렌은 당연히 그 대부분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격한 지진 때문에 피나는 균형을 잃고 넘어져 있었다. 엘레나처럼 그녀를 지탱해줄 일행조차 없으니 그 진동을 평범한 마법사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그녀가 버텨낼 리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렌을 포위하고 있던 마법이 사라졌다. 그렌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니 놓치지 않으려 했다.
“어디 가.”
“으악!”
발을 떼자마자 날아온 지크의 검에 그렌은 추하게 땅바닥을 뒹굴었다.
그렌의 능력이라면 별로 위험하지도 않은 공격이다. 그조차 기겁을 해대며 피하는 그의 모습은,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인식을 심어줬다.
지금의 그렌은 완전히 글렀다고.
그건 첼시와 피나, 할튼에게는 말 그대로 절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사정일 뿐. 지크는 묵묵히 그렌을 몰아붙였다.
“히익!”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검에 그렌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의 시선이 길 잃은 개미처럼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다 첼시와 피나, 할튼에게 고정됐다
“뭐 하는 거야! 날 지키라니까!”
그러나 세 명 중 그 누구도 그렌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지크의 일행이 떡 하니 있으니 그들이 싸움에 끼어들 능력은 없다.
게다가 지금의 그렌을 보고 있으면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첼시는 지크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손수 그렌을 두들겨 패고 싶었다.
그렌을 믿고 그녀는 카르위먼의 신관직조차 버렸다. 한데, 지금 그렌이 보여주는 꼬라지는 대체 뭐란 말인가.
‘저, 저런 놈을 믿고 내가…!’
그렌에 대한 원망보다 눈깔이 삐었던 자신에 대한 분노가 먼저 치솟아 오를 정도다.
첼시가 스스로에 대한 분노에 빠져 있다면 피나는 넋이 나가 있었다.
아무리 그렌의 태도가 최근 이상해졌다 하더라도, 그는 그녀의 학파를 다시 자랑스럽게 만들 믿음직한 협력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믿음이 모두 무너져 버렸다.
그녀는 마법사답게 머리가 좋다. 지금까지 얻은 정보들과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얼추 진실을 알 수 있다.
그녀가 학파를 부활시키기 위한 희망이라 생각한 그렌은, 사기꾼이자 거짓말쟁이였다. 그 진실된 모습은 추하기 그지없었다.
그게 분노든 절망이든, 첼시와 피나는 확실히 전투 의지를 잃었다.
그러나 할튼은 달랐다. 그의 목적은 지크의 죽음과 스틸월의 몰락. 그중에서도 가장 바라는 건 지크의 죽음이다.
그 지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모든 계획이 무너져 내린 지금, 그에게 남은 건 독기뿐이었다.
“으아아아앗!”
그가 고함을 내지르며 지크를 향해 달려갔다. 한스가 그를 막으려 에스텔레이드를 들어 올렸지만, 웬일인지 곧 다시 내렸다. 지크가 눈짓으로 할튼을 내버려두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스는 속으로 혀를 차며 할튼의 뒷모습을 봤다.
‘불쌍한 사람 같으니.’
지크에게 덤빈 이치고 좋은 꼴을 본 인간이 없다는 걸 가장 잘 알고 있는 한스로서는 할튼의 미래가 여실히 보였다.
한스는 할튼에게 동지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지크가 갑자기 변했을 때 함께 그에게 두들겨 맞았고, 지크에게 누명을 씌우려다가 사이좋게 박살 나기도 했다.
그 때문에 한스는 할튼이 증오를 버리고 편안한 미래를 누렸으면 했다. 적어도 지크에게 덤빈다는 자살행위라도 그만두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 할튼의 행동을 보면, 아무래도 그의 소원은 꿈속의 꿈일 뿐인 모양이었다.
한스는 연민이 가득 담긴 눈으로 할튼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한스의 마음속이 어떻든, 할튼의 가슴엔 지크에 대한 복수심이 가득했다.
“하아아압!”
할튼이 지크를 향해 검을 크게 내리쳤다. 그러나 지크는 너무 손쉽게 할튼의 검을 쳐냈다.
“이익!”
할튼은 포기하지 않았다. 방어를 완전히 포기하고 지크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안 그래도 실력 차이가 나는 판에 방어까지 포기했으니 지크의 검이 할튼의 복부에 적중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커억!”
고통스러운 신음이 할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할튼의 눈에 절망의 빛은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 피가 흘러나오는 입으로 미소까지 지었다.
덥석!
할튼이 복부를 관통한 지크의 검을 붙잡았다. 날카로운 날에 베인 손에서 피가 줄줄이 흘러나왔지만 할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금!”
할튼이 정말로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그는 그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이 새끼의 검을 잡고 있는 동안 어서…!”
아무리 지크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잠시 동안은 그의 검을 봉쇄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면 된다. 그 정도의 짧은 시간이라면 그렌이 충분히 지크의 목을 날릴 수 있을 테니까.
지크가 검을 버리고 물러나도 상관없다. 지크와 그렌의 실력 차이를 생각하면, 무기조차 잃어버린 지크를 그렌은 너무도 손쉽게 압도할 수 있다.
이거라면, 이렇게 유리한 판을 짜맞춰 주었다면 아무리 겁쟁이가 된 그렌이라도 생각이 달라지리라. 말 그대로 달려들어서 검만 휘두르면 끝나는 일 아닌가.
웬일인지 지크는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놀라 검을 빼려는 반응도 검을 놓고 다른 검을 뽑으려는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할튼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크가 무슨 생각으로 가만히 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에 당황해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쁠 건 없다. 할튼은 어서 그렌이 지크의 목을 날려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지크의 목은 여전히 붙어 있었다. 지크에게 향하는 공격 또한 없다.
할튼은 그렌이 있던 곳을 봤다.
아무도 없었다.
‘왜….’
급히 주변을 돌아본다.
그렌이 도망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도 추하게.
하지만 그는 도망조차 성공하지 못했다. 거대한 흙벽이 일어나 그의 앞을 가로막고, 빛나는 검기가 그에게 쏘아졌다.
그리고 그렌은 이번에도 온갖 추태를 부리며 한스와 스녹의 공격을 피해댔다.
“쯧쯧! 설마 네가 나를 잠깐이라도 붙잡아두면 저 쓰레기 녀석이 날 해치워 주리라고 생각했던 거야? 이건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니면 눈깔이 삔 건지. 저놈은 자기만 잘살면 되는 놈이야. 그런 놈이 네 희생에 감동이라도 해서 도주를 포기하고 날 죽이려 들겠냐?”
지크의 차가운 말이 할튼의 심부를 파고들었다.
“뭐, 한 가지 목적에 눈이 멀면 주변 상황을 다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건 왕왕 있는 일이지. 이해해. 하지만 어리석은 것도 사실이야, 할튼 바이너. 그것도 무척.”
푸욱!
“커억!”
지크가 검을 돌리자 할튼의 상처가 더욱 커졌다.
“잠깐의 희망은 달… 하긴, 너한텐 그런 것도 없었지. 그저 네 멋대로 상상하고 네 멋대로 결론을 내린 망상일 뿐이었으니까. 그만 가라, 할튼 바이너.”
지크는 그대로 검을 뽑아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튀며, 할튼은 지면에 쓰러졌다.
완전히 감기기 전 그의 눈에 비친 건, 더 이상 흥미도 없다는 듯 등을 돌리고 그렌이 있는 쪽을 향하는 지크의 모습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