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3화
퍽!
둔탁한 소리가 났다. 라일라의 주먹이 세르피나의 볼을 정면으로 강타한 것이다.
마법사라지만 웬만한 성인 장정은 손쉽게 두들겨 팰 수 있는 라일라의 일격이다. 세르피나의 얼굴이 홱 돌아가며 상체가 휘청거렸다.
하지만 세르피나의 육체는 곧 라일라의 육체. 당연히 그녀의 육체 또한 라일라처럼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게다가 세르피나의 육체는 세계수의 마력으로 실체화된 것뿐.
때문에 세르피나는 그다지 대미지를 입지 않았다.
태연하게 고개를 돌려 다시 라일라를 쳐다본다.
“개자식!”
“이제 와서?”
라일라는 윈두르를 들어 마력을 운용했다. 세르피나의 소환을 당장 중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라지지 않았다.
“소용없어.”
“…몸의 마력을 고정시켰구나.”
“수정에 무리가 가면서 세계수 분신의 마력이 흐트러졌기에 가능했지.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세계수의 마력이 다시 질서를 되찾으면 소용없어지겠지만, 적어도 당장은 포기해라.”
세르피나의 말을 들은 라일라의 행동은 신속했다.
후웅!
그대로 윈두르를 세르피나를 향해 휘둘렀다.
소환을 중지시킬 수 없으면 물리적으로 없애면 될 일.
아무리 거리가 가까워 마법보다 검이 더 효율적이라 해도 마법사인 그녀가 바로 검을 휘두른다는 것 자체가 라일라의 특성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심지어 지크나 한스가 봐도 깔끔하다고 감탄할 만한 일격이었다.
그러나 세르피나는 상당히 쉽게 검을 피했다. 입술을 한 번 깨문 라일라가 이번엔 마법을 준비했다.
윈두르의 마력 증폭에 힘입어 순식간에 마법이 완성됐다. 그대로 세르피나를 향해 쏘아냈다.
하지만 세르피나는 이번에도 쉽게 라일라의 공격을 무효화시켰다.
상대는 클로원의 공주. 기억이 온전치 않은 라일라보다 대부분의 면에서 앞서는 존재다. 특히 지식의 차이는 마법사로서 치명적이다.
그러나 라일라는 굴하지 않고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우우웅!
그때, 수정에서 강렬한 마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라일라가 흠칫 놀라 수정을 쳐다봤다. 무차별적으로 움직이는 마력이 당장이라도 수정을 파괴할 것 같다.
라일라는 이를 악물고 세르피나를 한 번 노려본 후 다시 유리관 안으로 뛰어들었다.
“소용없다. 이미 저 마력은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라도 무리야. 너도 알잖아?”
라일라는 세르피나의 말을 무시했다. 바로 마력을 불어넣어 마력을 제어하려 애썼다.
그 모습을 세르피나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딱히 방해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할 필요가 없었다.
쩌저저적!
라일라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수정에서 커다란 파열음이 났다. 아까 생긴 실금이 확 벌어져 커다란 균열이 되었다.
새어나오는 마력이 더욱 늘어났다.
“빌어먹을!”
라일라가 유리관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다시 유리관 안에서 나온 라일라가 세르피나에게 다가갔다.
“말해!”
주어도 목적어도 모조리 빠진 말이지만, 세르피나는 어렵지 않게 그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방금 한 말을 또 반복하는 취미는 없지만, 네 사정을 가엾게 여겨 반복해주지. 저걸 멈출 방법은 없어.”
“드래곤을 조종하는 방법은 있을 것 아냐!”
“아, 그쪽으로 생각을 했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방법 또한 없다. 이 중계지는 어디까지나 브뤼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졌지, 생명체를 조종하는 기능까지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크를 죽인다는 거야?”
“말했다시피 드래곤을 조종할 생각은 없다. 내가 계획한 건 어디까지나 녀석을 깨우는 것뿐. 그 후의 일은 자동적으로 벌어질 일들이다.”
세르피나의 어조는 얄미울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저 드래곤은 딱히 우리가 길들인 게 아냐. 브뤼셀 시스템에 필요해서 야생 상태에 있던 걸 잡은 후 강제로 저 안으로 집어넣었지.”
아무래도 스스로 수긍하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시스템의 일부가 된 세르피나와는 달리, 저 드래곤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클로원에 대해 엄청난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게 뻔해. 깨어나면 당연히 그 분노를 쏟아낼 만한 존재를 찾아다닐 거다. 하지만 녀석에겐 아쉽게도 클로원은 멸망한 지 오래됐다. 그러나 그게 녀석의 분노를 잦아들게 하진 않겠지. 오히려 어떻게든 클로원과 관련이 있는 것들을 찾으려 들 거다.”
“…그게 지크라는 거야?”
“그래. 클로원 황제의 검의 소유자. 드래곤이 화풀이하기엔 너무도 좋은 대상 아닌가?”
“윈두르는 지금 나한테 있어.”
“하지만 녀석에겐 아직 윈두르의 잔향이 진하게 남아 있지. 드래곤의 능력이라면 그 정도는 손쉽게 찾아낼 거다.”
“거기엔 한스의 에스텔레이드와 그렌 제너드의 토르니움도 있어.”
“둘도 사이좋게 드래곤의 목표가 되겠지. 지크를 죽일 수 있는 이상, 다른 놈들이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
“…가장 먼저 목표가 될 곳은? 나를 시켜서 브뤼셀 시스템을 복구시키려 하는 거 아니었어? 나를 죽이게 될 계획을 짰다고?”
“걱정 마라. 우리는 안전하다.”
저게 무슨 개소리일까. 세르피나의 말처럼 드래곤이 클로원에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다면 클로원의 유적인 이곳은 가장 먼저 목표가 될 것이다.
“수정이 깨져 드래곤이 깨어난다고 해도 바로 정신을 차리는 게 아냐. 한동안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지. 하지만 지금껏 갇혀 있었다는 사실만은 그 몽롱한 정신으로도 깨달을 거야. 당연히 바로 이동할 거다.”
“저만한 거체가 땅을 뚫고 이동한다면 이 유적도 매장될 거야.”
“드래곤이 마법의 전문가라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알려져 있다고 알고 있다만.”
마법. 그렇게 생각하니 하나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순간이동.”
“맞아. 녀석은 수정이 풀리자마자 순간이동으로 사라질 거다.”
“꽤 확신하고 있네. 네 생각이 틀릴 거라는 생각은 없나 보지?”
“브뤼셀 시스템은 한 번에 척 하고 만들어진 게 아냐. 꽤 여러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지.”
“드래곤의 탈출이 몇 번이고 있었단 뜻이야?”
“참고로 저 녀석과는 다른 녀석들이었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드래곤들을 몇 마리나 잡아 실험체로 썼었다니.
클로원의 무지막지함을 어느 정도는 깨달았다고 여겼지만, 아무래도 실체는 그보다 훨씬 대단했던 모양이다.
물론 지금 그따위 것에 감탄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클로원의 유적에서는 순간이동이 불가능할 텐데.”
“수정이 깨질 때 그 봉인이 일시적으로 풀린다. 아, 시스템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수정이 깨지며 유적의 마력이 일시적으로 흐트러지기 때문에 생기는 빈틈이니까. 철저하게 물리적인 일이라, 네가 유적의 제어권을 모두 손에 넣었다고 해서 막거나 할 수는 없다. 뭐, 그것도 잠깐이지만. 곧 마력의 흐름은 안정될 거고, 순간이동도 다시 막히겠지. 다 뛰어난 클로원의 설계 덕이다.”
“…혹시 실수로 드래곤이 깨어났을 때 시설의 파괴를 막기 위한 설계인가.”
“정확하다.”
“드래곤이 윈두르의 잔향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민감한 탐지 능력을 가졌다면 이 유적이 바로 공격 목표가 될 텐데?”
“순간이동까지 무효화시키는 시설이다. 고작 시설 바깥으로 흘러가는 마력을 차단하는 기능이야 당연히 있지. 강력한 건 두말할 것도 없고.”
완벽히 막혔다.
라일라는 수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입에서 영창이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곧 그녀의 머리 위로 커다란 불덩이가 솟구쳤다. 라일라는 불덩이를 수정을 향해 던졌다.
“소용없는 짓을.”
세르피나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라일라에게 들리지 않았다. 아니, 라일라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콰아아앙!
수정에 부딪친 화염은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뜨거운 열풍이 라일라와 세르피나가 있는 곳까지 훅 하고 밀려들어 왔다.
수정 따위는 산산조각을 넘어 아예 녹아버리지 않았을까 의심되는 위력이다.
그러나 라일라는 자신의 마법의 결과물을 보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에 비해 세르피나는 당연하다는 듯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라일라의 마법이 작렬한 부분은 분명 상처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라일라가 쏘아낸 마법에 비하면 그 대미지는 무척이나 적었다. 게다가 수정의 덩치를 생각하면 코끼리가 모기에 물린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라일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질이 안 되면 양으로 밀어붙이기라도 하려는 듯 계속해서 마법을 쏘아 보냈다.
그녀의 마법은 수정을 착실히 깎아냈지만, 그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수정의 강도는 튼튼하다. 아무리 세계수 분신의 마력 지원이 있다고 하지만 드래곤을 봉인하기 위한 것이니 당연하지. 물론 네 마법이라면 언젠가는 부술 수 있긴 하다만, 시간에 맞추진 못할 거다. 그리고 시간에 맞춘다 해도 뭘 할 셈이지? 드래곤이 이 시설 안에서 깨어날 뿐이야. 너 혼자 드래곤을 상대하기라도 할 텐가?”
세르피나의 빈정거림에도 라일라는 멈추지 않았다.
이성은 세르피나의 말이 맞는다고 알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발악도 아니다. 그저 헛된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포기하지 못한 자의 발버둥, 딱 그것이다.
세르피나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의 라일라에게는 그 어떤 말도 닿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필사적인 라일라와는 다르게 여유가 넘치는 태도로 라일라의 쓸데없는 발버둥을 지켜봤다.
쿠르르르르릉!
진동이 더 심해졌다. 아마 지상에도 이 흔들림이 감지되고 있을 것이다. 진동의 규모로 보아 상당히 멀리까지 전해졌을 수도 있다.
이젠 수정의 표면 전부에 금이 가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라일라가 이바지한 바는, 정말로 극히 일부밖에 없었다.
아니, 극히 일부라는 표현도 너무 후하게 줬다는 감마저 있을 정도였다.
뚝!
진동이 멎었다. 지금까지의 격렬한 흔들거림이 혹 환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몸은 아직 흔들리지 않는 공간에 익숙해지지 않은지 살짝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
콰지지직!
지금까지의 파열음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소리가 수정에서 울렸다. 엄청난 균열이 거미줄처럼 수정에 새겨졌다.
번뜩!
순간 라일라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세르피나도 압력을 느꼈는지 지금까지의 여유가 사라졌다.
수정 안.
샛노란 무언가가 비치고 있었다. 그 안으로 보이는 세로로 길게 찢어진 붉은 색 눈동자는 말 그대로 파괴의 화신 그 자체처럼 보였다.
드래곤의 눈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마치 지금의 사태를 파악하려는 듯한 움직임이다.
하지만 뭔가 제대로 초점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드래곤이 깨어난다고 해도 한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거라는 세르피나의 말이 라일라의 뇌리에 떠올랐다.
화아아악!
드래곤의 몸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마법사인 라일라와 세르피나는 그 강렬한 마력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다.
무차별적으로 뿜어지는 마력이 세세하게 정렬되더니 곧 일정한 규칙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의 상황조차 잊고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그 마력의 움직임은 정밀하고 아름다웠다.
왜 드래곤이 세상에서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마법을 능숙하게 구현하는 존재로 알려질 수 있었는지 완벽히 납득될 정도였다.
‘순간이동을 하려는 건가!’
사용되는 마력의 양을 생각하면 상당히 먼 곳으로 이동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저 녀석이 어디로 이동할지 알아?”
정말로 말을 걸기 싫고 의지하기는 더욱 싫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는 세르피나밖에 없다.
지크를 위해서라도 라일라는 자존심을 죽이고 다시 세르피나에게 물었다.
“유적 바로 위 지상으로 이동한다고 보기엔 들어가는 마력이 너무 많아.”
“자기의 레어가 있던 자리겠지. 드래곤들은 이럴 때 자신들의 레어로 가더군. 아마 가장 안정되는 장소가 거기인 모양이야.”
물론 그 레어가 아직까지 존속하고 있을 리는 없다. 그래서 세르피나도 ‘레어’가 아니라 ‘레어가 있던 자리’라는 표현을 썼으리라.
“거기가 어디야?”
“아마 스틸월 백작가와 피네 자작가의 경계면 어느 즈음에 있었을 거다.”
“…너, 거기까지 생각하고…!”
“아니, 이건 진짜 우연이다. 물론 나에게 유리한 우연임을 부정하진 않겠지만 말이야.”
스틸월 백작가와 피네 자작가의 경계라면 지금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이다.
그리고 드래곤이 노릴 지크와 한스, 그렌이 모두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 순간, 드래곤이 짜낸 마력이 한계점에 도달했다. 완성된 마력이 드래곤을 주변으로 맹렬히 움직였다.
그리고 드래곤이 사라졌다.
남은 건 이곳저곳이 갈라지고 안이 텅 비어버린, 거대한 수정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