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2화
한창 유리관 장치 안에서 이것저것을 시험해보던 라일라의 눈이 유리벽 너머로 향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하는 거야?”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가 세르피나에게 쏘아졌다. 그녀가 어느새 제어 장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널 도와주려는 거다.”
세르피나가 장치에 손을 대고 마력을 불어 넣었다. 라일라는 장치의 조작이 조금 더 수월해진 것을 느꼈다. 세르피나의 마력이 그녀의 마력을 이끌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그녀를 도와주는 행위였지만 오히려 라일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라니. 계약에 따라 나는 너를 성실히 돕고 있는 것뿐이다만?”
“성실히라니. 감동해서 눈물이라도 흘리면 되나?”
이론은 모두 가르쳤고 남은 건 세계수 분신의 마력들이 흘러나올 때 하는 연습뿐이라고 주장했던 이가 누구던가. 그 때문에 세계수 분신의 마력이 없을 때는 하는 일 없이 시간만 죽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의 흐름을 모두 제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래서 배움이 끝났다고 기뻐하며 지크를 도우러 가려 했을 때 세르피나는 말했다.
세계수 분신의 마력을 제어하는 법을 가르쳤을 뿐, 근본적으로 세계수 분신의 마력의 흐름을 틀어막으려면 유적 전체를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때, 정말로 윈두르로 그녀를 찔러버릴까 라일라는 무척이나 고민했다.
결국 한 번만 더 속이면 제어든 나발이든 바로 역소환하겠다는 엄포를 놓고는 그때부터 유적의 근본적 제어에 대한 학습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게 것이다.
“그럴 필요 없다. 그저 마음속에 나에 대한 감사와 경의를 품으면 된다.”
“품겠냐.”
라일라는 세르피나에게 눈을 한 번 흘기고 다시 유리관 장치의 조사에 들어갔다.
라일라는 착실하게 장치의 제어 방법을 습득해갔다. 그녀의 뛰어난 재능에 세르피나의 보조가 더해져 그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쿠우우웅!
유적에 진동이 울렸다. 라일라는 슬쩍 유리벽 너머 아래, 유적의 밑바닥 쪽을 내려다봤다.
스으으윽!
세계수의 분신의 마력이 분출되고 있었다.
‘벌써 그런 시간인가.’
지하에 있어 시간관념이 거의 마비된 지금, 규칙적으로 분출되는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은 그나마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현상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마력은 유적 밑바닥에서 점점 불어났다.
‘굉장해! 저 막대한 마력이 전부 느껴져!’
과연 이 장치는 바깥에 있는 일반적인 제어 장치와는 그 감응도가 확연히 달랐다. 라일라는 온몸을 휘감는 것 같은 세계수 분신의 마력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게 분신의, 그것도 극히 일부 마력. 이러니까 시간을 되감아 버리는 그 엄청난 짓도 가능하겠지.’
정말로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마력을 지닌 지크나 라일라 본인의 마력조차 티끌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였다. 언제나 세르피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라일라에게 잠시 빈틈이 생긴 것은.
스으윽.
라일라의 마력을 유도하던 세르피나의 마력이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평소라면 바로 반응을 할 라일라였지만 세계수의 마력 때문에 눈치채는 게 늦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조용히 움직이던 세르피나의 마력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움직였다.
‘응?’
그쯤 되자 라일라도 눈치를 챘다. 세계수의 마력에 압도당해 있던 라일라가 상황을 파악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극히 짧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저게…!’
유리벽 너머로 세르피나를 노려봤지만 그럴 시간조차 아까웠다. 저 빌어먹을 공주님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막아야 했다.
라일라는 일단 세르피나를 역소환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윈두르의 마력에 뭔가 간섭하고 있어.’
아마도 이 유리관 장치에 세계수 분신의 마력이 흐르며 윈두르에게 간섭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걸 알고 날 여기다 넣었군!’
이가 갈렸지만 지금 성을 낼 시간은 없었다.
일단 바깥으로 나가려 했지만 입구는 열리지 않았다.
‘입구를 잠갔어.’
방금 움직인 세르피나의 마력의 용도가 아마 이것인 모양이었다.
꼼짝없이 갇힌 모양새가 됐지만 라일라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고작 이걸로 날 가두겠다고?’
라일라는 바로 장치를 이용해 유적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세르피나와 유적의 제어권을 두고 다투는 형국이 됐지만 라일라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가 브뤼셀 시스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라지만, 그녀는 질 생각이 없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도 아니었다.
일단 라일라는 세르피나에게 이 유적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전수 받았다. 유적의 시스템을 조사하며 혹시라도 있을 세르피나와의 제어권 다툼을 어떻게 진행해나갈지 계획까지 짜놨다.
물론 고작 그것뿐이라면 잘해야 비등, 보통은 약간 불리한 싸움을 하게 됐겠지만 지금 라일라에게는 유리한 점이 두 가지 더 있었다.
하나는 지금 라일라를 가두고 있는 유리관 장치. 과연 브뤼셀 시스템의 제어를 위한 예비 장치라는 설명이 허언이 아닌 듯, 일반 제어 장치보다 훨씬 더 마력 감응력이 높았다.
당연히 일반 제어 장치를 사용할 세르피나보다 라일라가 시스템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라일라가 들고 있는 윈두르다. 지금껏 윈두르는 라일라의 손에 들려 그녀의 마력을 증폭해주고 있었다. 그 성능은 웬만한 지팡이들을 가볍게 압살했다.
게다가 세계수의 가지라는 특성상, 세계수의 마력을 다루는 제어 장치를 훨씬 더 쉽게 다룰 수 있게 만들어줬다.
그 두 가지에 힘입어 라일라는 세르피나와 제어권 다툼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녀의 자신감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듯, 라일라는 시스템에 침투해 있는 세르피나의 마력을 순식간에 지워나갔다.
눈 몇 번 깜빡일 새에 절반 이상의 마력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남은 것을 처리하는 데에도 지금과 비슷한 시간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수월하게 흘러갔지만, 라일라는 안심할 수 없었다. 너무 수월한 것이 오히려 불길했다.
‘세르피나가 고작 이 정도로 무력화되는 허접한 계획을 세웠다고?’
지크에겐 장난감처럼 다뤄졌지만 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생각나는 것은 둘.
‘뭔가 다른 수를 더 써놨거나 혹은….’
꿍꿍이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거나.
라일라는 유리벽 너머의 세르피나를 찾았다. 세르피나는 여전히 제어장치 앞에 그대로 서서 수정을 쳐다보고 있었다.
라일라와 세르피나가 다툼을 벌이건 뭐건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은 무구한 세월 동안 그랬듯, 한데 뒤섞여 수정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세르피나가 움직인 건 그때였다.
그녀가 손을 제어장치에 가져다 댔다. 드디어 본격적인 무언가를 목표로 행동하려는 게 분명했다.
‘목적이 뭐냐.’
이미 대부분의 제어권은 라일라의 손에 떨어져 있는 상태. 세르피나가 뭘 하든 결코 쉽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세르피나의 반격도 만만치 않을 터. 라일라는 유리관의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하며 그 어떤 세르피나의 행동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하지만 세르피나의 행동은 라일라의 예상을 완벽히 빗겨갔다.
‘어?’
세르피나의 마력을 감시하던 라일라는 순간 자신이 잘못 감지한 줄 알았다.
제어권 탈취가 예상되는 주요 지점에 마력을 집중시키고 있던 라일라를 비웃듯, 세르피나의 마력은 라일라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을 향해 나아갔다.
방어를 소홀히 한 라일라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곳은 세르피나가 공격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생각할 수도 없던 곳이었던 것이다.
‘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저 녀석은!’
기겁을 한 라일라가 세르피나의 마력을 차단하려 움직였다. 제어 장치의 우월성과 윈두르의 지원으로 인해 라일라의 마력은 빠르게 세르피나의 마력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조금 늦었다. 세르피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지어졌다.
쿠르르르르릉!
유적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세계수 분신의 마력이 들어차기 시작했을 때 약간의 진동이 있긴 했지만, 이번 건 차원이 달랐다.
유리관의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라일라가 구르듯 제어 장치에서 튀어나왔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세르피나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너 대체 뭔 생각이야!”
“천박하기는. 일단 몸부터 일으키거라.”
서둘러 나오느라 반쯤 주저앉아 있던 라일라를 보고 세르피나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 태연함이 라일라는 짜증났다.
세르피나의 말대로 라일라는 몸을 번뜩 일으켰다. 그리고 뚜벅뚜벅 세르피나에게로 다가가더니 멱살을 확 잡아챘다.
“당장 말해!”
지크와 상당한 시간을 붙어 지냈다보니 그녀의 사람 협박하는 자세도 제법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아니라 지크가 온다고 하더라도 단순 협박으로는 세르피나를 겁박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흥분을 하지? 이곳은 클로원이 만든 곳이고, 네가 클로원의 공주임을 부정한 이상 이 세상에서 이 유적의 소유권을 갖고 있는 것 나뿐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얄밉도록 침착하게, 세르피나는 말을 이었다.
“내가 내 소유물을 부수겠다는 것이 뭐가 잘못됐지?”
라일라가 세르피나의 행동을 막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세르피나는 클로원의 부활을 노린다. 그러려면 브뤼셀 시스템이 필수다. 지금 브뤼셀 시스템은 무력화되었지만 어떻게든 다시 부활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 유적에 있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소중할 수밖에 없다.
한데, 지금 세르피나가 한 일은 라일라의 그런 생각을 완전히 비웃는 일이었다.
유적의 자폭. 세르피나가 시도한 일이었다.
라일라가 뭐라 말을 하려 할 때였다.
우우우우웅!
수정이 있는 곳에서 엄청난 공명음이 들려 왔다. 라일라도 세르피나도 일제히 그곳을 쳐다봤다.
라일라는 이를 악물었다. 황급히 세르피나의 자폭 시도를 막긴 했지만, 그래서 유적 자체가 날아가는 건 막았다지만 이미 폭주하기 시작한 일부 세계수의 마력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그 파괴 범위는 극히 적어, 유적은커녕 그들이 서 있는 고리조차 파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곳, 마력들이 모이고 있는 수정만은 달랐다. 수정 안쪽의 마력이 기괴하게 비틀리는 것을 라일라는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라일라는 다시 세르피나에게 시선을 돌리고 손아귀에 힘을 줬다.
“헛소리 말고 목적이나 말해!”
“그러지.”
세르피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기에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내 목적은 하나, 드래곤을 깨우는 거다.”
“역시 저거, 아직 살아있었던 거냐.”
“물론이지. 우리가 이것저것 처치도 해놨고, 무엇보다 드래곤의 생명력은 굉장하거든.”
드래곤이라니. 세상에서 전설로 치부되는 존재가 바로 드래곤이다. 그리고 그 엄청난 힘과 능력 또한 전설로서 내려오고 있다.
“드래곤을 깨워서? 그걸로 뭘 어쩌려고?”
“간단해. 지크를 죽이게 할 거다.”
라일라는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귓가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지크를 죽이다니. 라일라 입장에서는 그 어떤 재앙보다도 더 끔찍한 일이었다.
“어, 어째서…?”
당황해 말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말을 더듬었다는 것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라일라가 받은 충격은 큰 것이었다.
“클로원을 부활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지만,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더군. 브뤼셀 시스템은 망가졌고 나는 만족스럽게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만 있으면 답이 나올 수 있을 것도 같았거든. 그때, 어떤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다면 그럴 능력이 있는 녀석을 시키자고.”
세르피나가 라일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흔들리는 라일라의 눈동자에 비해, 그녀의 눈동자는 또렷했다.
“그 대상이야 바로 떠올랐지. 지크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 나와 똑같은 얼굴의, 능력도 출중한 존재 하나가 말이다. 만약 지크가 죽는다면, 그 존재는 그를 그리워한 나머지 브뤼셀 시스템을 재건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같이.”
그리고 세르피나는 라일라에게 유혹하듯 속삭였다.
“브뤼셀 시스템을 사용하면 죽은 자와 다시 만나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거든.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