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1화
라일라도 빵을 집어 조금씩 뜯어내 입으로 가져갔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마법 상자 안에 있던지라 빵은 아직도 갓 구운 듯 뜨끈뜨끈했다. 짭짤하고 고소한 맛이 들어가자 지친 몸에 조금 활력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수프를 몇 번 떠 마시고 스테이크를 거침없이 물어뜯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 고상하게 먹을 여유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크와 일행들은 언제 목숨이 달아날지 알 수 없는 전장에 서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어떻게 될 거라고 라일라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엔 지크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전장의 위험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거기엔 그렌 제너드가 있고 밸리드도 있지 않던가.
그들이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데 자신이 여유롭게 있을 수는 없다. 적어도 그들이 돌아왔을 때, 이 유적지를 완벽하게 컨트롤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한시라도 빨리 습득을 끝내고 전장에 참여하는 것도 좋을 거야.’
라일라는 슬며시 옆에 세워둔 윈두르의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검이야 좋든 나쁘든 상관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지크지만, 아무래도 윈두르를 들었을 때가 더 실력을 발휘하기 좋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유들로 라일라는 한시라도 빨리 식사를 끝내려 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와는 달리 세르피나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쯧쯧, 먹는 모습이 무슨 한 달은 굶은 짐승이 먹이를 먹는 것 같구나. 아무리 역사며 긍지며 기억과 함께 잃었다지만 너는 엄연히 클로원 황실의, 그것도 위대한 초대 황제인 황금 황제의 피를 이은 몸이다. 조금쯤은 예절이란 것을 지키는 척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느냐.”
“그따위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으니 상관없어.”
라일라는 손과 입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적당히 여유롭게 먹도록 해라. 누누이 말하지만 그런 식으로 먹으면 건강에도 좋지 않다.”
“신경 꺼.”
“눈앞에 떡하니 보이니 그럴 수가 있나.”
라일라가 음식을 들고 자리를 옮기려 하자 세르피나가 제지했다.
“앉아 있거라. 나도 식사 자리에서 대화 상대 정도는 있는 것이 좋으니.”
“나는 그럴 생각 없어.”
“계속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나도 교육을 멈추겠다. 하루 정도는 푹 쉬는 것도 좋겠지.”
세르피나의 말을 반쯤 무시하던 라일라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러면 나도 네 소환을 중지시키길 거야.”
“좋을 대로 하도록 하려무나.”
마치 떼를 쓰는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세르피나가 대꾸했다.
라일라는 잠시 세르피나를 노려봤다. 라일라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느긋하게 고기를 써는 모습이, 라일라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자신은 상관없다 주장하는 듯 보인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정말로 역소환을 할까 하다가도, 그러면 학습이 늦어진다는 이유 때문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도 못했다.
결국 라일라의 식사 속도가 늦춰졌다. 만약 세르피나의 요구가 무리한 것이었다면 그녀도 단호하게 그녀를 역소환했을 테지만, 그녀의 요구는 무척이나 간단한 것이었다.
“그래, 어떤 대화를 원하는데? 클로원과 그 공주님에 대한 찬사라도 읊어볼까?”
“필요 없다. 그런 건 클로원이 멀쩡할 때 질리도록 들었거든. 네 애인에 대한 얘기를 좀 해 보려무나.”
“…또?”
지크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둘 사이에서 상당히 많이 오간 주제였다. 한데 이번에도 그에 대한 요구를 하다니.
라일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설마….”
“내가 그 녀석에게 사랑에 빠진 것인지 묻는 것이라면, 착각에도 분수가 있다는 것만 알아두거라.”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사랑이란 것과는 전혀 연관이 없었던 내가, 아무리 모든 기억을 잃었다지만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하지 않더냐. 그것도 상대는 내 계획을 막아선 지크 브레이브의 또 다른 모습. 충분히 호기심이 생길 만하지.”
생각해보면 그도 그랬다. 물론 라일라는 자신이 세르피나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알았어.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나와 지크는 애인 사이가 아니야.”
“볼품없는 짝사랑이지. 내 몸을 가지고 고작 남자 하나 제대로 꼬시지 못하고 짝사랑을 하고 앉아 있는 꼴이라니. 이래서 아무리 좋은 도구라도 사용하는 사람이 시원찮으면 제대로 된 꼴을 못 보는 게지.”
세르피나가 보내는 한심하다는 눈초리가 심히 거슬렸지만 라일라는 참았다.
애초에 지크가 마음대로 가지고 놀던 세르피나라도 라일라에겐 꽤 버거운 상대다. 이럴 때는 그냥 무시하는 게 낫다.
라일라는 세르피나의 요구대로 식사를 하면서 천천히 지크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 시간이 즐겁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당장이라도 유적의 제어 권한을 습득해야 한다는 초조함도, 세르피나에게 말려 버렸다는 불쾌감도 지크에 대한 말을 하면서 서서히 가라앉았다.
세르피나는 라일라가 얘기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상당히 많이 이야기를 나눴던 화제라 라일라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상당 부분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들이었지만 세르피나는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라일라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시작이야 어쨌든 둘 사이에는 분명 대화가 성립되고 있었다.
그리 길진 않았다. 어차피 식사를 하는 동안 나누어진 짧은 담화에 지나지 않는다.
혹시 라일라는 세르피나가 식사가 끝난 후에도 계속 이야기를 요구할지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서 치우도록. 또 시작해야지.”
세르피나는 하녀에게 명령하듯 말하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제어 장치 쪽으로 걸어갔다.
그 등을 향해 주먹을 몇 번 휘둘러준 후 라일라는 텅 빈 식기와 테이블, 의자를 마법 상자에 집어넣고 세르피나의 뒤를 따랐다.
다시 세르피나의 교육이 시작됐다. 세르피나를 싫어하는 것과는 다르게, 라일라는 세르피나의 가르침을 쉬지 않고 흡수했다.
“너희들이 추측했던 대로 이곳은 마력의 중계지다. 하지만 브뤼셀 시스템의 중심지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여기서 조작을 가할 수 있도록 예비 장소로서 쓰일 수 있게 설계되어 있기도 하지.”
이건 무척 놀라운 정보였다.
“그럼 여기서 브뤼셀 시스템을 조종할 수도 있는 거야?”
“중심지가 제어 불능에 빠지고 마력의 연결이 끊이지 않는 등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긴 하지만, 가능하긴 하다. 브뤼셀 시스템이 박살 난 이상 쓸데없는 기능이 됐지만.”
세르피나는 제어 장치를 손으로 스윽 쓸어 보았다.
“하지만 가르치려면 그것까지 가르치는 게 좋겠지. 제어 장치에 마력을 주입해 봐라.”
라일라는 세르피나의 인도에 따라 마력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곧 유적지 전체가 미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뭘 한 거야?”
지크가 한 말이 있기에 라일라는 조금 의심스럽게 세르피나를 쳐다봤다.
“익숙한 걸 불렀다. 너에게나 나에게나 말이야.”
영문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길 잠시. 라일라는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걸 발견했다.
‘저건….’
그건 커다란 유리통이었다. 사각형의 금속판 위에 얹혀 떠오르고 있는 그것은 사람 한 명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만한 것이었다.
라일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똑같진 않지만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다.
슈트올에 있던 클로원의 비밀 연구소. 그녀의 기억을 빼내기 위해 만들어진 인조 생명체, 파이넬이 있던 곳에 있던 것과 비슷했다.
차이점이라고 해 봐야 슈트올에 있던 것은 깨지고 부서져 있었지만, 저것은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을 뿐, 멀쩡하단 것이었다.
스으윽!
그것은 라일라와 세르피나가 서 있는 곳까지 상승했다. 마치 원래 일부였다고 주장하듯이, 유리통을 떠받치는 금속판은 둘이 서 있는, 수정을 둘러싼 고리의 옆에 정확히 안착했다.
“아마 기억을 하지 못하겠지만, 내 육체는 이런 장치 속에 들어가 있었다. 정확히는 중심지에 있는 장치지. 그럼으로써 나는 브뤼셀 시스템의 기억 장치로서 기능하게 된 거다.”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었던 모양이네.”
세르피나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뿌듯하게 들렸기에 라일라가 빈정거렸다.
“당연하지. 내 일생 중 가장 훌륭한 시기였다. 그리고 그게 대부분의 내 인생이었고.”
“역시 이해가 안 가. 고작해야 일개 부품으로 살아가는 일에 자긍심을 느낀다고?”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받고 싶은 생각도 없다. 어차피 죽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인간의 삶이란 거다. 차라리 제국을 지탱하는 주춧돌이 되어 도움이 되는 게 훨씬 더 의미가 있지 않더냐.”
“넌 그걸로 괜찮은 거야?”
“나에겐 너희들이 불합리하게 보일 뿐이다.”
라일라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녀의 옆에 있는 공주님은, 정말로 제국에 모든 것을 바친 존재라는 것을.
“얘기가 옆으로 샜군. 어쨌든 나는 저 장치 안에서 두 열쇠가 보내는 기억들을 보관했다.”
두 열쇠라 함은 에스텔레이드와 토르니움을 일컫는 것이다.
“하지만 비상시의 또 하나의 역할이 있었다.”
“그게 뭔데?”
“브뤼셀 시스템의 조정.”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연신 장치를 살펴보던 라일라가 세르피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보통 브뤼셀 시스템은 외부에서 관리인들이 관리했지만, 혹 그들조차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치명적인 오류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나. 나는 그때 깨어나 브뤼셀 시스템을 조정하는 역할도 맡았다. 아무래도 시스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데다가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있는 만큼, 시스템에 대한 접근도 외부에 있는 인간들보다는 쉬웠으니까.”
“그렇게 잘할 수 있으면 외부 관리인을 두지 말고 처음부터 네가 관리하지 그랬어?”
“말했듯이 나도 브뤼셀 시스템의 일부였다. 기억을 보관하는 내가 의지를 가지고 시스템을 조작하기 시작하면 시스템에 어떤 오류가 발생할지 모른다. 때문에 내가 시스템의 조정을 시도하는 것은 말 그대로 시스템의 오류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내가 나서지 않으면 브뤼셀 시스템의 붕괴를 막을 수 없다고 여겨질 때뿐이다.”
“흐음, 어쨌든 이 장치 안에 들어가면 브뤼셀 시스템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거지?”
“그래. 물론 중심지의 장치와 비할 바는 아니고, 브뤼셀 시스템이 실질적으로 붕괴된 지금 그 기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말이다. 뭐, 이 유적지를 효율적으로 제어하는 데는 도움이 될 거다.”
그리고 세르피나는 입을 다물고 라일라를 빤히 쳐다봤다.
“…뭐야?”
“뭐 하나? 어서 들어가지 않고.”
라일라는 장치를 쳐다봤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 유리통의 반쪽이 열리며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만들었다.
“설마 함정은 아니겠지?”
“싫다면 그만두도록. 나도 원해서 널 가르치고 있는 건 아니니까. 아, 그래도 내 소환은 중지시키지 말아라. 내가 계약을 어긴 것은 아니니.”
라일라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세르피나는 담담하게 그 눈길을 받았다.
“…알았어.”
라일라는 등을 돌려 장치 쪽으로 걸어갔다.
장치의 입구는 라일라의 허리 즈음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했다. 그녀는 마법사답지 않은 날랜 움직임으로 장치의 입구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마력을 일으켜 봐라.”
세르피나의 말대로 라일라는 마력을 일으켰다.
턱!
입구가 닫혔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계속 마력을 집중해, 세르피나가 지금껏 알려준 마력의 운용을 시행했다.
‘확실히 효율이 좋네.’
바깥의 제어 장치를 사용할 때보다 훨씬 유적의 구조를 파악하기 편리했다.
그렇게 라일라가 정신없이 장치를 탐색할 때였다.
세르피나가 조용히 움직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