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0화
“네?”
지금 상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던 첼시가 순간적으로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그렌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키라니.
말만 들으면 마치 그들이 죽든 말든 자신만 살기 위해 내뱉는, 찌질하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말 같지 않은가.
물론 착실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이유가 됐든 첼시는 그에 동조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의 목표는 성녀가 되어 권력의 중추가 돼서 사는 것이다. 그렌이 어떤 목적으로 목숨을 걸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첼시에게는 전혀 달갑지 않은 요구였다.
게다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기도 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 아니, 그것보다 저건 뭐죠? 어째서 카르위먼의 성기사들이 우리를 밸리드의 협력자라 부르며 난입한 거냐고요!”
첼시는 당장에 설명을 요구했다. 제발 한스의 말이 틀리길 빌면서.
피나도 거들었다.
“네가 밸리드와 한통속이라고 들었어! 아니지? 그저 누명일 뿐이지?”
평소에 어떤 일이 있건 간에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던 그녀의 목소리에 깊은 간절함이 섞였다.
정말로 한스의 말이 맞는다면 지금껏 그녀가 한 노력이 일거에 날아가는 것이다.
아니, 날아가는 정도가 아니다.
마탑에서의 반란에 이어 밸리드와 협력하던 연합군의 밑에서 싸웠다는 이력마저 붙어 버린다면, 그녀의 콘로드 학파는 재부흥을 하기는커녕 아예 학파 자체가 소멸할 수도 있다.
그 누가 콘로드 학파로 오려고 하겠는가.
때문에 피나도 다급했다.
둘만큼은 아니지만 할튼도 제법 긴장한 표정으로 그렌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도 지크와 스틸월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을 뿐, 밸리드의 협력자라는 딱지는 결코 사양이었다.
세 명 모두 그렌이 단호하게 부정해주길,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주길 원했다.
그러나 초조하기는 그렌도 마찬가지였다. 당장이라도 지크가 쫓아올 것 같았다. 이곳저곳에 금이 가긴 했지만 그나마 그의 본성을 가려주던 가면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
“닥치고 여기서 지크 놈을 막고 있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네가 뭘 해준다는 거냐.”
그렌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쫓아온 지크가 여유롭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와, 왔다! 어이, 뭐 하고 있어! 당장 저놈을 막아!”
그리고 그렌은 다시 도주를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일행은 그의 도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쩌저적!
그렌의 주위를 날카로운 고드름이 순식간에 둘러쌌다.
“설명부터 해!”
지팡이를 겨눈 채 피나가 싸늘하게 말했다.
얼마 전이라면 그렌을 믿어 줬을지도 모른다. 그렌에게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며 정말로 목숨을 걸고 지크의 발목을 잡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렌에 대한 믿음은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아무런 설명 없이 자신들을 방패로 삼고 도망을 치려 하는 이를, 피나는 보내줄 수 없었다.
그건 첼시와 할튼도 마찬가지. 그들의 눈에도 진실을 요구하는 빛이 넘실거렸다.
그렌을 둘러싸고 있는 고드름은 날카로운 데다가 단단하다. 사람의 신체 따위는 손쉽게 꿰뚫을 수 있다. 그게 몇이나 둘러싸고 있느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히 움직이기 어렵다.
하지만 그렌은 다르다. 이 전장에서 실력만으로는 최고라고 할 만한 그에게, 제대로 영창조차 읊지 않아 약해 빠진 고드름 따위 토르니움을 뽑을 필요도 없이 맨손으로도 제거가 가능하다.
때문에 피나는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그렌이 순식간에 그녀의 마법을 깨뜨리고 감히 자신을 공격한 그녀에게 반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상 외로 그렌의 방어나 반격은 없었다.
혹, 그들의 분노를 깨닫고 대화를 해주기 위함일까. 세 사람은 얼핏 기대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이상함을 느꼈다. 대화를 하기 위함이라고 하기엔 그렌의 태도가 너무도 이상했다.
그건 대화를 하려는 것보다는 꼭….
“겁먹었군. 한심한 놈 같으니.”
생각보다도 더 찌질한 그렌의 반응에 지크조차 절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지크 님.”
한스가 지크의 곁에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마법 상자에서 꺼낸 포션이 쥐어 있었다.
“받으세요.”
포션이야 자신도 가지고 있지만 굳이 거부할 필요도 없어 지크는 포션을 건네받고는 몸 이곳저곳에 뿌렸다. 곧 그의 몸에 있던 무수한 상처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은 잘되셨습니까.”
“무척이나. 저 얼빠진 꼴을 봐라.”
지크는 그렌을 향해 턱짓했다.
“저것만 봐도 얼마나 잘됐는지 딱 감이 오지 않냐?”
“음, 지크 님의 계획을 몰라서 잘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지크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저게 어떤 과정을 거쳐 도달한 결과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평소 그의 모습과는 확연하게 다른 건 알겠군요. 마치 겁을 먹은 것 같은데요. 하지만 그럴 리….”
“겁먹은 거 맞아.”
지크가 태연하게 말했다. 한스는 물론이고 하나둘 지크의 곁으로 모여든 다른 일행 또한 적잖이 놀랐다.
“겁을 말입니까? 하지만 고작 저런 마법은 그에게 별 위협도 되지 않을 텐데요.”
얼음 고드름이 가까이 생성되긴 했지만 저 정도는 여기 있는 모두가 어렵지 않게 막거나 파훼할 수 있다. 그들이 봐도 괴물 같은 실력을 자랑하던 그렌이 겁을 먹을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그렌 저놈은 꽤나 특별한 능력이 있었거든. 자세히 설명하기는 좀 그렇지만, 거의 무한한 목숨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을 거야.”
“무한한… 목숨이요?”
목숨은 단 하나뿐. 수많은 지식을 쌓은 지식인부터 평생을 흙과 함께 뒹구는 농사꾼까지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소중하고 그렇기에 지키려 한다.
한데, 그 목숨이 여러 개도 아니고 무한하다니.
놀람을 넘어 경악하기에 충분한 사실이었다. 그렌을 다그치고 있던 그의 일행들마저 이야기를 들었는지 놀란 표정으로 지크와 그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래. 엄청난 능력이 아닐 수 없지. 하지만 내가 그걸 박살내 버렸거든. 이제 저놈의 목숨은 다른 이들과 같이 하나뿐이다. 한스, 네게 묻겠는데 말이야. 네가 무한한 목숨을 가지고 있다가 다른 이들과 같이 단 하나의 목숨만 가지게 되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그, 글쎄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라서….”
한스는 곤혹스러워했다.
“무한한 목숨이 있다는 건 이 세상에 놈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다는 뜻이야. 그래서 남들은 목숨이 아까워 감히 시도해보지 못할 것들에 대해 너무도 쉽게 도전할 수 있지. 마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용사님처럼.”
한스는 지크가 말한 용사라는 단어에서 지독한 모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절대로 긍정적인 의도로 한 말이 아니리라.
“그렇게 전능한 감각으로 세상에 무서울 것 없다는 듯 설치다가 그 능력을 빼앗긴다면 어떻게 될까?”
지크는 손가락으로 그렌을 가리켰다.
“딱 저렇게 된다.”
한스를 비롯한 지크 일행의 시선이 그렌에게 향했다.
“자신의 실력이면 충분히 헤쳐 나올 수 있는 고난에도 움츠러들어 버리지. 왜?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거든. 손가락만으로 막을 수 있는 약한 공격도 하품 나올 정도로 느린 공격도 재수 없으면 맞고 뒤질 수 있으니까. 그게 너무도 무서운 거다. 고작 저런 얼음덩이 몇 개에 포위되었다고 겁먹어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녀석이 다시 여기까지 온 것도 나한테서 도망치기 위해서야. 그리고 자기가 살자고 제 동료들에게 다짜고짜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를 막으라고 요구한 거지.”
“그것 참….”
한스는 겁먹은 그렌의 얼굴을 확인하며 말했다.
“추하군요.”
“큭큭큭! 그렇지. 추하지.”
한스의 말이 취향에 직격이었는지 지크는 배를 잡고 낄낄댔다.
하지만 지크처럼 지금의 상황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대놓고 비웃는 사람은 지크밖에 없었다. 지크 일행 대부분은 약간 혐오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라라는 좀 달랐다.
“…저게 정말 그렌이라고요?”
“믿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저게 놈의 진짜 모습이다. 넌 진짜 잘 빠져 나온 거야. 저런 놈이 너를 진짜 동료로서 대해줄 리 없다는 건 알겠지?”
라라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무언의 긍정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저 말이 사실이야?”
피나가 그렌에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한 분노가 스며 있었다.
자신의 학파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희망을 걸었던 것이 바로 그렌 제너드다. 한데, 그런 그렌의 본 모습이 이런 것이었다니.
“말을 좀 해봐!”
첼시도 끼어들었다. 주변 사람에게, 특히 그렌에게 존대를 꼬박꼬박 해오던 그녀였지만 더 이상 그녀는 존대를 쓰지 않았다.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할튼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도 여간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복수를 하기 위해 그와 손을 잡았건만, 그가 보여준 가능성이 모조리 거짓말이었다니.
그 모습을 잠시 즐겁게 관찰하던 지크는 슬슬 움직이기로 했다.
‘슬슬 잡아볼까.’
여기까지 와서 그렌을 놓쳐줄 이유는 없다. 길고 긴 인연을 끊어야 할 때가 되었다.
지크는 겁을 먹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그렌에게 다가가려 했다.
우르르르릉!
땅이 울렸다.
“뭐, 뭐야!”
“꺄아악!”
마치 커다란 파도에 휩쓸린 배마냥 땅 전체가 거세게 출렁였다. 주변의 병사들이 넘어져 이리 뒹굴고 저리 나자빠진다. 재수 없는 자는 그 와중에 주변의 병기에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에 비해 지크 일행은 중심을 잘 잡았다. 그들이 쌓아온 수련은 고작 이 정도 흔들림에 몸의 자유를 빼앗길 정도로 얕지 않았다. 마법사인 엘레나 정도만이 스녹에게 기대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지크는 발아래 지면을 내려다봤다가 스녹을 쳐다봤다. 스녹이 고개를 저었다.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진짜 지진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
‘회귀 전에 이런 지진이 있었나?’
뚜렷이 생각나는 건 없다. 그러나 자신의 기억에 없다고 지진이 없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다행히 지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흔들리던 대지는 평소의 굳건함을 되찾았다.
주변에서 안도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그러나 지크는 찜찜함을 느꼈다. 이번 지진이 뭔가의 징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괜한 감이면 좋겠는데.’
* * *
라일라는 오늘도 유적에서 시스템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이 지하에 처박힌 지 얼마나 됐을까. 이제는 날짜 감각마저 슬슬 마비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열의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해 세르피나의 교육을 흡수했다. 이제 이 유적의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세르피나가 말하자 라일라는 뿜어대던 마력을 끊었다. 진한 피로감이 몰려온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뭐 하나. 빨리 식사를 차리지 않고.”
라일라가 세르피나를 가볍게 노려봤다. 자기와 똑 닮은 얼굴이 뻔뻔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세르피나는 뭘 보냐는 듯 턱을 들고 그녀를 마주 쳐다봤다.
라일라는 한숨을 쉬고 마법 상자에서 식탁과 의자 그리고 음식들을 꺼냈다.
“흠, 점점 음식이 볼품없어지는군.”
“맛있는 것들은 이미 다 먹어 치웠으니까. 불만 있으면 먹지 마.”
세르피나는 대답 없이 의자에 앉아 가까이 있던 빵을 덥석 집었다. 라일라도 세르피나의 맞은편 의자에 피로한 몸을 앉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