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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28화 (528/628)
  • 제528화

    눈앞에 웃고 있는 지크가 보인다.

    온몸에 입은 상처 덕에 피범벅이 된 상태에서, 소름 끼치게 웃어젖히는 그의 모습은 그렌에겐 정말로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마 같아 보였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눈앞의 지크가 진짜 악마라 해도 평소의 그렌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어떤 존재라 해도 능력을 사용하면 어떻게든 제압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 능력이 사라졌다고 눈앞의 악마 같은 놈이 통보했다.

    그건 즉, 회귀 능력이 그에게 부여해 줬던 무한의 시간과 끝없는 기회가 사라졌다는 걸 의미한다. 이제 그는 다른 이들과 같이 고작 한 번의 기회만을 움켜쥔 채 아득바득 발버둥 쳐야 한다.

    그리고 그 한 번의 기회가 얼마나 허무하게 날아갈 수 있는지, 그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지금 같은, 서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발버둥 치는 전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목숨이라는 기회는, 눈먼 화살 하나에도 쉽게 날아갈 수 있는 희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거짓말이야.”

    그렌이 새삼 현상을 부정했다.

    “거짓말인 게 분명해.”

    그렌의 눈은 벌게져 있었다.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마.”

    애초에 당장 내놓을 뚜렷한 근거가 있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궁한 것도 사실이다. 클로원의 유적이고 뭐고를 지금 당장 확인시켜 줄 수는 없다. 그리고 가능하다 해도 그럴 생각도 없다.

    “못 믿겠으면 한 번 죽어보면 되지!”

    지크가 그렌에게 달려들었다. 지크의 검이 지독한 살기를 머금은 채 그렌에게 쇄도했다. 하지만 그렌의 방어를 뚫을 수는 없었다. 둘 사이의 수준 차는 여전했다.

    수월하게 지크의 공격을 막아낸 그렌의 눈에 지크의 빈틈이 들어왔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전투 경험은 폼이 아닌 것이다.

    후웅!

    지크가 몸을 비틀며 검을 뻗는다. 자신에게 향하는 공격을 무시하고 그렌을 공격하려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시간상 그렌의 공격이 훨씬 더 빨리 닿을 게 뻔했다.

    드디어 저 빌어먹을 지크를 끝장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그렌은 희망에 부풀었다.

    이대로 검을 밀어 넣기만 하면 그의 승리가 확정된다. 물론 지크의 공격을 감수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어지간히도 재수가 없지 않으면 지크의 공격이 치명상이 될 수는….

    흠칫!

    그렌의 몸이 굳었다. 지금껏 거의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던 움직임에 의식이 끼어들었다.

    근육이 급격하게 요동치며 검의 궤적이 바뀐다. 조금만 더 밀어 넣었으면 얻었을 승리를 포기해가며 그렌이 선택한 선택지는 지크의 공격을 막는 것이었다.

    콰앙!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충격음이 터지고 둘이 조금 거리를 뒀다.

    둘의 표정은 완전히 상반되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승리를 목전에 뒀던 그렌의 안색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반해 지크는 히죽히죽 웃음 지었다. 마치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태도였다.

    “왜 그래? 조금만 더 했으면 네가 이겼을 텐데.”

    대답은 없었다.

    지크가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둘의 검이 연신 맞부딪친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공방의 형태가 약간 달랐다.

    그렌이 우세를 점하는 건 같다. 하지만 그의 검놀림은 확연히 소극적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지크의 검이 조금이라도 파고 들어온다 싶으면 화들짝 놀라 지크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해졌다.

    “뭐야, 뭐야, 뭐야! 천하의 태양의 용사께서 겁이라도 먹으신 거냐!”

    당연히 그런 상황이 지속될수록 지크의 공격도 한층 더 거칠어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렌의 움직임도 더욱 위축되어 갔다.

    “역시나 그랬어, 이 겁쟁이 자식!”

    콰앙!

    지크가 크게 내려친 검을 그렌이 막아낸다. 그렌의 안색은 남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했다.

    “혹시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겁이 나 제대로 검도 휘두르지 못하시겠지! 지금까지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말 그대로 목숨이 여벌로 있으셨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진짜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거는 상황이 되니 자기보다 실력이 월등히 떨어지는 상대에게도 제대로 덤비지 못하는 쓰레기 같으니라고! 역시 너 같은 놈에게 회귀 능력을 빼앗은 건 백번 잘한 짓이야!”

    “웃기지 마! 내가 그걸 믿을 것 같냐!”

    그렌은 여전히 자신의 능력이 사라졌다는 걸 부정하는 중이었다. 지크는 코웃음 쳤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더 겁쟁이라는 거다! 회귀 능력이 사라졌다는 걸 제대로 믿지도 못하는 주제에! ‘혹시나’라는 생각 때문에 검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있지!”

    지크의 도발에 이를 악문 그렌이 지크의 검을 거세게 밀어냈다. 그리고 지크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변의 소리가 들려온다. 병사들의 함성 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마법과 검기에 의한 폭음. 그리고 다친 사람의 비명과 죽어가는 자들의 마지막 신음.

    이곳이 목숨을 건 전장이라는 것을 싫어도 깨닫게 해주는 소리다.

    지금까지는 저것들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저들과 같은 세계에 서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그렌은 치밀어 오르는 공포와 불안을 느껴야 했다.

    “이제 먼저 덤비지도 못하는 거냐! 어서 덤벼! 네 실력이 훨씬 윗줄인 건 확실하잖아!”

    하지만 지크의 도발에도 그렌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크도 더 이상 도발하지 않았다.

    그렌이 오지 않는다면 자신이 가면 되는 것이다.

    콰앙! 콰앙! 콰앙!

    지크의 파상 공세가 연이어 이어졌다. 그러면서 지크는 자신의 특기인 혓바닥을 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너, 실력을 강제로 올렸었지? 어차피 회귀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테니 부작용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지 않아?”

    지크의 공격을 정신없이 막으면서도 그렌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부작용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게 그인 것이다.

    “우리 불쌍한 용사님. 여기서 겨우겨우 달아난다고 해봤자 부작용이란 함정이 기다리고 있으니. 바로 뒤지는 거냐, 아니면 평생을 병신으로 사는 거냐? 뭐, 어쨌든 네 마지막 기회가 날아갔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한 것 같다만.”

    “닥쳐!”

    “지금까지의 네 행적을 보자면 어쨌든 넌 용사가 되고 싶었던 모양인데, 지금 꼴을 보라지! 넌 이제 밸리드의 협력자로서 낙인 찍혀 완전히 악당으로 떨어질 거다.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직위가 박탈되는 건 물론이고, 카르위먼에 있는 네 졸개들도 모조리 싹 쓸려 나가겠지. 그에 비해 난 네가 그토록 바라던 용사가 될 테고.”

    자신에게 용사 명칭이 붙는 걸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싫어하는 지크였지만, 그렌에게 고통을 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는 태연하게 그 단어를 내뱉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말을 해줘야 되겠군. 내가 용사가 된 이유 말이야. 간단히 말하자면 그건 그렌 제너드, 네 덕이 커.”

    저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내가 회귀하고 착한 일을 하게 된 계기가, 내가 회귀하기 전 네가 한 말이거든.”

    지크는 또박또박 그렌이 했던 말을 읊어주었다.

    “‘다음에 태어나면 부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

    당시의 엄숙했던 그렌의 톤까지 되살린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계속 이죽이는 채였다.

    “그게 내가 착한 일을 하게 된 계기다. 그리고 그 영향이 지금에까지 미친 거고.”

    지크는 그렌과 눈을 맞추었다.

    “네 계획을 망친 가장 큰 적은 바로 너였어!”

    그렌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지크를 변수 취급하며, 지크에게 착하게 살라고 한 인간을 찾아 찢어 죽여 버리겠다고 벼르던 게 그다.

    한데, 그 찢어 죽여 버릴 인간이 회귀하기 전의 자신이었다니. 게다가 지크 또한 회귀를 경험했단 소리는 더욱 충격을 주었다.

    ‘나만의 능력이 왜 저놈에게!’

    하지만 그렇다면 많은 의문이 풀린다. 그러나 그걸 그렌은 결코 좋아할 수 없었다.

    “자, 마왕 지크 모어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준 빛나는 태양의 용사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의 말을 따라볼까? 눈앞에 있는, 세상의 뒤에서 온갖 나쁜 짓을 자행하던 쓰레기를 치우는 것으로 말이야!”

    콰앙! 콰앙! 콰앙!

    지크의 공격이 연속으로 그렌의 급소를 노렸다. 머리, 목, 심장 등등 어디 할 것 없이 꿰뚫렸다간 즉사할 부위다. 그리고 그렌은 여전히 그 곳으로 오는 공격을 기겁을 하며 막아댔다.

    “자! 자! 자! 열심히 막아! 자칫 방어가 뚫리기라도 하는 날엔 네가 죽는 거야!”

    오늘 여러 가지 일로 많은 충격을 받은 그렌이었지만, 지금 그에게 휘감겨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

    뒤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렌의 머리는 오로지 생존 그 하나만을 위해 돌아가고 있었다. 부작용을 감수하고 높인 실력과 수많은 회귀 속에 쌓은 경험을 살린다는 생각은 아예 존재하지조차 않았다.

    이번에 죽으면 마지막이라는 사실과 상대하고 있는 자가 온갖 난관 속에서도 승리를 챙겨온 지크라는 사실이 맞물리며 그렌에게 한 가지 선택을 강조했다.

    얼마 전까지의, 회귀 능력이 있던 그렌이라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일. 그러나 지금의, 다른 이와 똑같이 하나의 목숨을 갖고 있는 그렌에겐 무척이나 달콤한 유혹.

    “으아아아아!”

    그렌이 커다란 괴성을 내질렀다. 기합인지 비명인지 모를 그 소리와 함께 그렌은 검을 휘둘렀다.

    슈우우우욱!

    토르니움의 검날에 맺힌 검기들이 지크를 향해 수없이 돌진한다. 지크는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두 다리를 대지에 단단히 디딘 후 검기들을 요격해 나갔다.

    콰콰콰콰쾅!

    다행히 그리 위력이 높은 검기는 아니었다. 얼마간의 폭음 이후 검기는 모조리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진 것은 검기만이 아니었다.

    지크는 웃었다. 지금까지처럼 상대를 조롱하는 웃음이 아닌, 폐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커다란 웃음이었다.

    “아하하하하하! 진짜냐, 그렌 제너드! 설마설마했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지크의 눈에 등을 보인 채 달려가고 있는 그렌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사자에게서 도망가는 토끼 같은 모습이다.

    당장 검이든 뭐든 내팽개치고 배를 잡은 채 땅바닥을 뒹굴며 하염없이 웃음을 토해내고 싶었지만, 그렌을 놓칠 순 없었다.

    지크는 바로 그렌을 뒤쫓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연합군의 그렌 제너드가 꽁무니를 빼고 도망친다! 저게 연합군 최고 실력자의 모습이냐!”

    주변에 그의 추태를 확연히 알려야 했다.

    * * *

    지크와 그렌이 사라진 후, 두 사람의 일행의 충돌은 한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어느 쪽 세력이 더 우세한지 가려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비천한 자식이이이!”

    한스의 도발 아닌 도발에 눈이 돌아간 할튼이 연신 한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검은 에스텔레이드에 너무도 쉽게 막혔다.

    애초에 이미 한스의 경지는 할튼을 뛰어넘은 상태. 게다가 무기의 차이도 크다. 거기에 한스의 만류 때문에 끼어들진 않고 있지만, 라라도 조금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다.

    누가 봐도 두 집단의 전위 차이는 크게 났다.

    그나마 할튼이 버티고 있던 이유는 첼시의 존재 덕분이었다.

    스으윽!

    할튼의 몸에 생긴 상처가 사라진다. 그에 힘입어 할튼은 다시 한번 덤벼들었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다. 첼시의 지원을 업었다 해도 할튼은 한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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