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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27화 (527/628)

제527화

일행들과 상당히 떨어진 즉, 방해가 들어올 가능성이 적은 곳에서 지크와 그렌은 본격적으로 맞붙었다.

한 수 한 수가 일반적인 기사라면 꿈에서나 그릴 정도로 강력한 일격들이 사정없이 쏟아진다.

그렌은 노도같이 몸에 흐르는 마력을 토르니움에 실어 쏘아냈다. 아직은 감당 못 할 마력에 몸이 욱신거렸지만 참을 만했다.

물론 지금이야 욱신거리는 걸로 끝나지만 곧 부작용은 그의 몸을 좀먹어 점점 더 커다란 상처를 낼 것이다.

하지만 그렌은 상관없었다. 지금은 지크만 쓰러뜨리면 된다.

콰아앙!

토르니움을 휘두르자 지크가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또 한 번 휘두르자 거의 땅바닥에 구를 듯 다급하게 피했다.

다시 한번 휘두르자 겨우 검을 들어 방어해 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정말로 허세였을 뿐인가?’

혼자서 괜찮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더니 정작 본격적으로 맞붙자 지크는 자신의 몸을 지키기 급급했다.

방어란 것도 시원치 않아 몸에 이미 상당수의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자신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하는 지크의 모습이 무척이나 즐거웠지만, 그렌은 마음 한구석에서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다.

‘뭔가 꾸미는 게 있을 것도 같은데….’

하지만 그렌은 곧 생각을 접었다. 지크가 무엇을 꾸미든 자신은 지크만 쓰러뜨리면 된다.

‘무슨 수를 쓰든 그 전에 때려잡는다!’

그리고 녀석을 본거지로 데려가 온갖 고문을 다 가해 정보를 토해 내게 만든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가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올바르고 편안한 세상으로.

콰아앙!

그렌의 공격이 거세졌다. 자신이 어느 정도 부상을 입더라도 최대한 빨리 끝장내겠다는 의지가 온몸에서 전해졌다.

지크의 손발이 더욱 어지러워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크는 꿋꿋이 버텼다. 막고 흘리고 치명적이지 않은 공격은 몸으로 때웠다.

“젠장!”

조금만 더 있으면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지크의 모습에 그렌은 결국 분을 터뜨렸다.

“좀 뒤져라!”

콰아앙!

욕설과 함께 그렌이 토르니움을 크게 내리쳤다. 하지만 이번 공격도 지크는 끝끝내 막아 냈다.

“너 좋을 짓은 못 하지!”

베인 볼에서 흐르는 피를 혀로 핥은 뒤 침과 함께 뱉어 내며 지크가 이죽거렸다.

“네 실력으로는 날 이기지 못해! 그리고 네 아버지도 곧 끝장날 거다! 괜한 반항은 말고 순순히 포기하라고!”

“네 말이 맞는다면 순순히 포기하겠는데 말이야. 난 충분히 널 이길 수 있어. 그리고 저 빌어먹을 아버지도 끝장나지 않을 거고.”

“헛소…!”

그렌이 다시 토르니움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앙!

연합군의 진영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그렌은 급히 폭발이 일어난 쪽을 쳐다봤다.

지금까지 폭발은 어느 정도 있어 왔다.

양 진영 다 마력을 다루는 고위 병력들이 존재했고 무엇보다 스틸월 백작군 쪽에 붙은 마법사들은 화염 마법을 전문으로 하는 플루 학파 소속이다.

그들은 전장에 꾸준히 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지금의 폭발은 그 수준이 달랐다.

마치 플루 학파의 수장이자 전대 마탑주, 회귀 전 마도의 마왕이라 불리던 윌위스 드웨인의 것처럼.

‘그놈은 밸리드 놈들을 막으러 갔을 텐데?’

그 수가 적다지만 스틸월 백작군의 후방을 들이친 밸리드의 병력의 질은 상당하다.

아무리 틸과 윌위스가 강하다지만 이렇게 빨리 정리될 만한 병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실은 비정했다.

콰아아아앙!

또 한 번의 화염 마법이 연합군을 강타했다.

폭발이 직격한 자들은 온 몸이 찢겨져 날아갔고 주변에 있는 자들은 극도의 화상을 입었다.

연합군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왜인지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적의 최고 마도사가 돌아온 것이다.

“한눈팔 새가 있냐?”

그렌은 흠칫 놀라 토르니움을 들었다.

콰앙!

지크의 검이 토르니움을 찍어 누른다. 그렌에게 있어 심각한 위협이 되는 공격은 아니었다. 아직도 둘의 수준 차이는 크다.

하지만 그렌은 등허리가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맞대고 있는 검 너머에 있는 지크의 얼굴이 보였다.

이곳저곳에 피를 묻힌 채, 그는 섬뜩하고 웃고 있었다.

“윌위스가 돌아온 모양이네. 틸도 얼마 안 있어 돌아올 거고. 후방에 빠졌던 모든 병력들이 다시 전방에 배치될 거야. 아까 뭐라 그랬었지? 내 빌어먹을 아버지가 끝장난다고 했었나?”

그렌이 토르니움을 신경질적으로 밀어붙였다. 지크는 순순히 밀려났다. 하지만 그의 입은 쉬지 않았다.

“네 잘난 예측 중 하나가 작살났군. 나머지 하나의 예측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밸리드 놈들이 벌써 당했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렌의 눈에 어린 불신의 빛이 뚜렷했다.

그리고 지크는 그런 불신을 손수 깨부수는 걸 거리끼지 않는 아주 착실한 인간이었다.

“네놈이 밸리드랑 붙어먹던 건 이미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내가 회귀에 관한 말을 하면 네놈이 나를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즉, 밸리드 놈들이 공격을 할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 범위 내였다는 거다.”

그렇다면 대응 방법은 간단했다.

“밸리드라면 이를 박박 가는 곳이 어디인지는 알지?”

그 순간, 스틸월 백작군의 진영 안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성스럽게 느껴지는 그 빛은 부상에 쓰러져 울부짖고 있는 스틸월 백작군의 병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순간, 부상병들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기적과도 같은 광경. 그렌은 그 광경을 만든 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이네.”

“성녀님도 너 같은 놈에게 이름으로 불리길 원하지 않을걸?”

“카르위먼을 끌어들였군, 네놈!”

“적의 적은 친구. 게다가 그 적의 적이 나와 사이도 나쁘지 않다면 바로 절친 정도는 될 수 있지 않겠냐?”

“시간에 맞지 않았을 텐데….”

피네 자작령에서 밸리드의 흔적을 발견하고 바로 카르위먼의 병력을 요청했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지원을 올 수는 없다.

“말했잖냐. 밸리드의 공격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고. 애초에 내가 카르위먼에 병력 파견을 요청한 건 내가 피네 자작령으로 떠나기 전이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카르위먼이 움직였다고?”

“내겐 내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는 성녀님이 계시니까. 이야, 높으신 분과는 역시 친분을 맺고 봐야 한다니까. 뭐, 카르위먼의 병력이 동원돼 봤자 밸리드가 없다면 끼어들지 않겠다는 합의하에 움직인 거지만, 그거야 별문제도 되지 않았지.”

지크는 꼭두각시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을 그렌에게 보내며 말을 이었다.

“정말로 너같이 뻔히 예상되는 놈이 우두머리일 때는 계획 세우는 게 너무 편하다니까.”

“이 개자식이!”

분통이 터진 그렌이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상황은 악화되어 갔다.

“놈들을 쓸어 버려라!”

“감히 더러운 밸리드 놈들과 손을 잡은 놈들이다! 모조리 죽여라!”

“너희들이 밸리드와 관련이 없다면 당장 항복하라!”

때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스틸월 백작군 진영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갑옷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 연합군의 동요는 윌위스의 마법에 당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폭증했다.

카르위먼의 성스러운 문양. 신앙의 군대가 그들을 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크는 보란 듯 성기사들을 향해 눈짓을 했다.

“저 봐. 저게 네 단순한 생각이 불러일으킨 결과물이다. 슬슬 인정해. 넌 멍청이라니까?”

“닥쳐!”

아까까지의 여유는 모조리 사라진 그렌이 지크에게 달려들었다.

“너만! 너만 쓰러뜨리면 돼!”

아직까지 시간은 남았다. 지크를 쓰러뜨려 정보를 빼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이 빌어먹을 세계 따위 바로 돌려 버리리라.

그리고 그런 그렌의 생각은 지크도 훤히 꿰고 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렌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 내면서도 지크는 계속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이야 뻔하지. 나를 쓰러뜨리고 정보를 빼낸 다음 회귀를 할 생각이겠지?”

지크가 회귀라는, 그렌에게 있어 최고로 중요한 비밀을 언급했지만 그렌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회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 거라는 건, 이미 그가 알고 있을 수 없는 정보를 언급했을 때부터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뒤이은 지크의 말은, 그렌에게 있어, 지금까지 살아온 수많은 시간 속에 겪은 그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나. 네가 세운 계획의 근본 자체가 틀려 먹었는데.”

지크는 천천히, 혹시나 그렌이 잘못 듣지 않도록, 입을 크게 벌려 발음을 또박또박 해서, 그 말을 내뱉었다.

“너, 이제 회귀 못 해.”

“…뭐?”

그렌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저게 무슨 소리일까. 그렌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못 들은 건 아니다.

지크의 자상한 친절은 문장의 글자 하나하나를 그렌의 귀에 때려 넣었으니까.

그러나 그 말의 내용이 문제였다.

‘회귀를 못 한다고?’

밑바닥을 전전하던 그렌이 태양의 용사라는 찬란한 이명으로 불리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도록 만들어 준, 그렌의 진정한 능력.

본격적으로 회귀를 시작한 후, 그렌은 회귀 능력이 사라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다.

상상할 수 없었다. 언뜻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가정이다.

하지만 의미 없는 가정이기도 했다.

그렌 자신조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회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귀 능력은 단 한 번도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런 회귀를 이제 하지 못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충격적인 내용을 들은 것답지 않게 그렌은 냉정하게 부정했다.

“지금껏 회귀가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회귀를 아는 놈이 나타난 적은 있고?”

그렌은 대답하지 못 했다.

“지금의 시간선은 네게 완벽히 예상외의 것일 텐데? 네가 겪은 시간선 중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빈발하고 있지. 회귀 능력의 소실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어?”

“…웃기지 마.”

작은 중얼거림. 하지만 그건 이윽고 비명 같은 거대한 절규로 바뀌었다.

“웃기지 마아아아!”

콰아아앙!

그렌이 토르니움을 휘둘렀다. 막대한 마력이 주변을 뭉갠다. 하지만 그 검 끝은 그의 심리 상태를 대변하듯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침착할 때조차 지크의 방어를 뚫지 못 한 그렌이다.

충격받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이 지크에게 닿을 리 없었다.

그리고 여유가 생긴 지크의 혀는 더욱 매끄럽게 돌아갔다.

“웃기지 말라고? 너는 회귀에 대해 뭘 알지? 클로원 제국은? 브뤼셀 시스템은? 네가 지금껏 누려 온 힘이 어디서 기원됐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고 있나?”

그렌으로서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단어들이다. 당연히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닥쳐어어!”

콰아아아아아앙!

토르니움에서 뿜어진 마력이 대지에 커다란 상처를 새긴다.

“너만! 너만 죽이면 돼! 이 빌어먹을 시간선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놈들도 모조리 올바르게 되돌아갈 거다!”

“하하하하! 그것도 괜찮겠지! 하지만 그거 아시나, 용사님!”

지크는 토르니움을 받아내며 외쳤다.

“회귀가 사라졌다는 말은 넌 이제 죽으면 끝이란 소리다.”

미친 듯 토르니움을 휘두르던 그렌의 움직임이 다시 한번 멎었다.

“다음은 없어. 카르위먼의 가르침처럼 사후세계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세상에서 네 삶은 끝나는 거야.”

지크는 검을 고쳐 쥐었다. 이곳저곳 이가 나간 검을 그렌에게 향했다.

“그럼 우리 다시 칼춤을 춰 볼까? 서로 하나밖에 없는, 죽으면 끝장나버리는 공평한 목숨을 걸고 말이지.”

기분 탓일까. 그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지크는 유쾌하게 말했다.

“길었던 희망은 달콤했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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