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6화
말장난. 하지만 일단 틀린 말은 없기에 뭐라 하기도 힘들다. 명백히 그렌을 조롱하기 위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의외로 그렌은 화를 내지 않았다.
지크를 쓰러뜨리는 데 지크의 동료들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재난의 마왕이나 마도의 마왕이 함께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 같은 상황을 위해 그도 도구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그렌은 지크를 향해 돌진했다.
마치 주변에 있는 지크의 동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콰앙!
다시 한번 지크와 그렌의 검이 마주쳤다. 한스가 옆에서 지크를 도우려 할 때였다.
후웅!
할튼의 검이 한스를 향해 휘둘러졌다. 한스는 에스텔레이드의 방향을 틀었다.
콰앙!
에스텔레이드와 할튼의 검이 부딪치며 또 다른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한스와 할튼은 서로 몇 걸음씩 물러났다.
그 틈을 노려 라라가 할튼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할튼은 라라의 검을 쳐내며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방해를 받은 할튼의 분노가 무척이나 끓어올랐다. 희번덕거리는 그의 눈이 한스와 라라를 노려봤다.
멀리서 피나가 다시 한번 마법을 발동했다.
이번엔 커다란 얼음의 기둥이었다. 맞았다가는 형체조차 알아보지 못할 만큼 거대한 그것이 쏘아졌다.
목표는 주문을 외고 있는 엘레나였다.
얼음 기둥은 그 크기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빨랐다. 순식간에 엘레나의 머리 위까지 들이닥쳤다.
그러나 얼음 기둥과 부딪친 건 엘레나의 육신이 아니었다.
쿠우웅!
엘레나를 보호하듯 지면이 일어나 엘레나의 머리를 뒤덮었다.
스녹의 힘이었다. 흙과 단단한 암석이 뒤섞인 그것은 얼음 기둥을 확실히 막아냈다.
그사이 영창을 끝낸 엘레나가 역으로 피나를 향해 불기둥을 쏘았다.
퍼엉!
가로막는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불기둥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하지만 엘레나의 공격 또한 피나를 가격하지 못했다.
우우웅!
피나의 앞에 만들어진 반쯤 투명한 장벽은 얼마간 쏟아지던 화염 기둥을 모조리 막아내더니 허공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한 차례 공방을 벌인 두 집단은 본격적으로 전투에 들어갔다.
날카로운 검기들이 상대를 향해 달려들고 마법들이 주변을 초토화시키며 대지의 권능과 성법이 부딪친다.
안 그래도 지크와 그렌의 싸움에 끼지 않으려 거리를 두던 병사들이 부랴부랴 더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저 조금 건강한 일반인에 불과한 그들이 저 괴물 같은 싸움에 휘말린다면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했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동료끼리 연계를 해 가며 전투를 하는 두 집단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지크와 그렌은 무리에서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렌이 지크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정말로 혼자서 날 상대할 셈인가?’
그는 일부러 지크를 전투 지점에서 떨어뜨리고 있었다.
일대일이라면 지크를 제압할 자신이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도구들을 데리고 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이 지크의 동료들을 잠깐이라도 묶어둘 때, 그가 지크를 처리하려는 계획이었다.
물론 평소 지크가 데리고 다니던 동료들이라면 그의 동료들이 목숨까지 바친다 해도 만족스럽게 발목을 묶진 못했을 테지만, 밸리드의 기습으로 고급 병력인 지크의 동료들이 어떻게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구들이 목숨을 걸고 덤벼든다면 약간의 시간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크 또한 그렌과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동료에게서 떨어뜨리려는 그렌의 의도에, 지크는 무척이나 쉽게 따라줬다.
아니, 오히려 그가 더 조장하는 낌새도 있었다.
‘기분 나쁘군.’
원래 혼자서 자신을 상대할 생각이었다고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지크의 말이 떠올랐다.
절대 그에게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빌어먹을 놈. 후회시켜 주겠어!’
두 사람은 계속 검을 마주치며 움직였다.
그들의 진로에 있는 병사들이 급히 그들을 피했다. 하지만 행동이 굼뜨거나 다른 요소에 방해를 받은 자들은 여지없이 둘의 충돌에서 발생한 검기와 마력에 죽어나갔다.
물론 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전투 지점이 방벽 바깥인지라 죽어나가는 건 전부 연합군의 병사들이었으니 지크야 꺼릴 것이 없었고, 그렌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둘은 동료들의 곁을 떠나 그들만의 전투에 빠져들었다.
* * *
지크와 그렌이 떠나는 데에도 동료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집단 모두 그들의 리더에게서 말을 들었던 것이다.
상대의 동료만 잡아 놓으라고.
“흐아아아앗!”
할튼이 커다랗게 검을 휘둘렀다. 한스는 에스텔레이드로 할튼의 검을 받아냈다.
“큭!”
할튼이 신음을 내뱉었다. 몇 번 더 공격을 가했지만 한스는 침착하게 에스텔레이드를 휘둘러 할튼의 공격을 모조리 튕겨냈다.
‘하인 주제에!’
백작 부인을 돌봐준 유모의 손자라는 것이 조금 특이할 뿐, 한스는 그저 백작가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하인에 불과했다.
왕국의 강철벽이라 칭해질 만큼 군이 강한 스틸월 백작가에서도 촉망받는 인재였던 그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그 차이가 존재했다.
한데 그 하인 따위가 자신의 검을 받아내고 있었다.
아니, 너무도 자존심이 상해 감히 인정하지 못하고 있을 뿐, 할튼은 한스의 실력이 자신보다 훨씬 윗줄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크의 제자라는 사실까지 더해, 할튼의 한스에 대한 증오는 계속 깊어졌다.
그건 지크의 실력은 그가 감히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걸 알고 난 후, 지크에 대한 분노가 전이된 때문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할튼의 가장 강한 증오의 대상은 지크이지만, 지크는 너무도 강해 자신이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그나마 만만한 한스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물론 할튼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이유였다.
이유야 어찌 됐든 간에 할튼은 증오하는 한스를 잔인하게 도륙내고 싶었다.
때문에 계속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한스의 방어를 뚫을 수 없었다.
푸욱!
“크윽!”
오히려 라라에게 빈틈을 허용해 옆구리에 구멍이 났다. 하지만 할튼은 멈추지 않았다.
덥석!
오히려 옆구리에 박힌 라라의 검을 맨손으로 쥐었다.
날카로운 칼날에 손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지만 할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상태로 라라에게 칼을 휘둘렀다.
“윽!”
라라는 당황했다. 검을 포기하고 물러나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수를 써야 하는지 일순간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하는 전투 중, 그런 고민은 치명적이다.
퍼억!
한스가 급히 할튼을 걷어찼다. 할튼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할튼이 휘둘렀던 검은 아슬아슬하게 라라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마워요!”
라라는 이마에 살짝 흐른 식은땀을 닦아내며 감사를 표했다.
후웅!
할튼이 떨어지자 다시 한번 얼음의 폭격이 한스와 라라를 덮쳤다.
동시에 쏟아진 화염 화살들이 얼음과 맞부딪쳤다.
슈우우욱!
뜨거운 증기가 전장 한복판에 피어났다. 그를 뚫고 이번엔 암석덩어리들이 피나와 첼시가 있는 곳으로 쏟아졌다.
중간에 끼어든 할튼이 검에 마력을 잔뜩 집어넣은 채 휘둘렀다.
콰아앙!
암석들이 쪼개지며 작은 조각들과 모래로 변해 사방으로 쏟아졌다.
스녹의 공격은 막았지만 할튼의 상처는 더욱 벌어졌다.
꽤 커다란 상처였기에 그대로 두면 할튼은 전투불능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첼시의 지팡이가 빛을 뿜으며 할튼에게로 향하자, 할튼의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한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가 입을 열었다.
“자신의 상처를 무시하고 상대를 공격한다. 어디서 많이 본 수법이군요. 아무래도 지크 님과의 결투에서 뭔가를 얻으신 모양입니다.”
“닥쳐!”
한스는 한숨을 한번 쉬었다.
“그만하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지크 님에게 가진 원한은 솔직히 말해서 말도 안 되는 거잖습니까. 지크 님에게 잘못한 게 맞아요, 당신이나 저나. 저는 목이 날아가고 당신도 기사직에서 파면당할 수도 있는 잘못이었죠.”
백작가의 후계자에게 무례하게 굴고 할튼은 손찌검까지 하려고 했었다.
“터무니없는 원한은 청산하고 돌아오시죠. 지크 님과 백작님에게 용서를 구하세요.”
“용서?”
한스의 말이 할튼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가 이가 부서질 듯 갈아댔다.
“용서라고? 내가? 누구에게? 뭘? 당시 백작가는 다 그런 분위기였어! 그놈은 그에 짓눌려 입 닫고 살았고! 네놈도 잘 알 텐데!”
지금껏 쌓아온 그의 감정들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그러나 한스는 여전히 담담했다.
“지크 님에게 당시 손찌검을 하려 한 것에 대한 사과, 그리고 백작님에게는 배신에 대한 사과입니다. 아무리 당시 분위기가 그랬다 하더라도 우리가 한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백작가 전체가 지크 님에게 잘못을 했었죠. 그리고 당신이 패배한 이후, 백작가에서는 별다른 책임을 묻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한데 당신은 이런 중요한 시기에 백작가를 배신했죠. 사과를 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웃기지 마! 너 같은 하인 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명예와 영광을 누려야 할 이가 나였다! 그걸 진창 속에 처박은 개자식! 그리고 그 개자식의 가족이 다스리는 영지! 그 모든 것이 복수를 할 대상이다!”
말로만 그렇게 내뱉는 건 아닌 듯 할튼의 목소리엔 깊은 원한이 절절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저 주변에서, 매일 하던 대로 했을 뿐이야! 내가 어째서 그딴 꼴사나운 패배 이후에 그딴 진창 속에 처박혀야 한단 말이냐!”
“그렇군요.”
마치 뭔가 생각을 하듯 잠시 하늘을 쳐다본 한스가 다시 할튼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말했다.
“그냥 재수가 없었네요, 당신은.”
“…뭐?”
지금껏 피를 토하며 원한을 내뱉던 할튼이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닫았다.
그의 얼굴도 황당함에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재수? 재수가 없었다고? 고작 그딴 걸로 내 인생이 이 따위로 변했단 말이냐!”
“하지만 사실이잖습니까.”
할튼의 분노 따위는 알 바가 아니라는 듯 한스는 태연히 말했다.
“아마 당신 자리에 다른 기사가 있었더라도 웬만하면 당신과 같은 행동을 취했겠죠. 그리고 그에 따른 지크 님의 태도도 같았을 테고요. 즉, 당신의 자리엔 누가 들어가도 같은 상황이 펼쳐졌을 겁니다. 당신은 거기에 우연히 있었을 뿐이에요.”
그러곤 답을 몰라 우는 아이에게 선심 써 베푸듯, 한스는 그렇게 말했다.
“재수가 없었네요.”
이 정도로 깔끔하게 말하면 오히려 분노보다 허탈함이 먼저 찾아온다는 것을, 할튼은 절절히 깨달았다.
라라는 슬쩍 한스를 쳐다봤다. 상대는 분명 적이고, 말이나 태도를 보면 분명 인성이 나쁜 쪽에 속하는 이였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원한에 불타는 사람에게 재수가 없었을 뿐이었다고 잘라 말하다니.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한스 씨도 의외로 사람을 말로 두들겨 패는 게 능숙해.’
그리고 한스가 그 능력을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라일라 씨에게 상담을 한번 해볼까.’
라라는 그 생각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한스 씨도 어떻게 보면 참 잔인하시다니까.”
“응? 그다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쿠.
“…….”
그리고 한 사람과 한 마리, 지크의 영향을 받은 이가 더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