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5화
막대한 힘과 힘의 충돌. 날뛰는 마력이 서로를 부수기 위해 노도같이 내달리고 부딪치고 폭발한다.
어느 쪽도 일반인이 버티기에는 버거운 힘. 하지만 그렇다 해도 두 힘이 완전히 같진 않았다. 상대적으로 뚜렷이 밀리는 쪽이 분명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쭉 그래 왔듯, 밀리는 쪽은 지크였다.
그렌의 마력이 지크를 검과 함께 으깨 버리려는 듯 조여 왔다. 지크는 그 힘을 뒤로 흘려보내며 그렌의 빈틈을 노렸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쾅!
다시 한 번의 굉음. 지크의 발이 뒤로 몇 걸음 밀렸다. 손은 저릿하고 팔뚝의 근육은 당장이라도 경련이 일어날 것 같다.
몸 전체를 순환하며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는 지크의 마력은, 마치 대륙을 모조리 수장시켜 버릴 듯 해일 같은 그렌의 마력을 견뎌내지 못했다.
투웅!
그렌의 검이 우격다짐으로 지크의 검을 강제로 비틀어냈다. 독을 가득 품은 뱀처럼 그렌의 검 끝이 지크의 심장을 노렸다.
휘익!
지크가 급히 몸을 꺾었다. 하지만 그렌의 검은 교묘하게 방향을 틀며 계속 지크의 심장을 쫓았다. 지크가 발에 힘을 줬다.
후웅!
급격히 꺾이는 지크의 몸뚱이 곁으로 아슬아슬하게 그렌의 검이 스쳐 지나간다. 그렌의 눈에 아쉬움이 서렸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익숙하게 검을 회수해 다시 한번 지크를 공격해갔다.
방금의 기회를 놓친 건 아까웠지만, 그도 이렇게나 빨리 지크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후웅! 후웅!
그렌의 검은 계속 그 이빨을 드러내며 지크를 위협했다. 세련된 검술과 천재적인 센스로 그렌의 공격을 계속 받아내는 지크였지만 아무래도 근본적인 수준 차는 어쩔 수 없었다.
보통은 지크의 원군이 붙어 그 수준 차를 메워왔다. 굉장한 실력을 자랑하는 그렌도 지크에게 원군이 붙는 순간 형편없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지크의 원군은 얼굴조차 비추지 않고 있었다.
콰아앙!
그렌이 크게 휘두른 검에 지크가 몇 걸음 물러선다. 그렌은 그 모습을 저열하게 웃으며 쳐다봤다.
“오늘은 평소의 친구들이 없는 모양이지?”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지크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하지만 그렌은 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뒤에서 급습하고 있는 밸리드 놈들을 막으러 갔군.’
스틸월 백작군의 주력 병력 대부분이 진영 전면에서 연합군을 막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후방을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물렀다가는 자칫 전면이 뚫릴 수가 있다. 그렇다고 후방에서 달려오는 적을 그대로 둘 수 없는 상황.
게다가 그들의 움직임을 보면 최소 기사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정예라는 걸 알 수 있을 터.
어쩔 수 없이 평소 지크를 돕던 놈들은 그들을 막으러 간 것이 틀림없었다.
‘최상의 결과다!’
그렌은 광희했다.
“그래, 그래서 혼자 나를 막으러 온 건가? 이렇게 중요한 때에?”
“뭘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애초에 이번에 나는 널 혼자 상대할 생각이었어. 가만 생각해보니 너 따위에게 동료들과 한꺼번에 달려든단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거든.”
“과연 지크 모어. 그 마음가짐은 확실히 마왕이로군.”
그렌은 대놓고 지크를 ‘지크 모어’라 칭했다. 이제 숨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는 다시 검을 세웠다.
“하지만 난 용사가 될 생각이거든.”
그렌이 슬쩍 손가락을 흔들었다. 순간 지크는 자신의 주변 온도가 급격히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지크가 검을 휘둘렀다.
콰드득!
주변에 하얗게 서리던 얼음이 지크의 마력에 깨져나갔다. 마법은 지크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빈틈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했다.
물론 지크도 자신의 상황을 충분히 인지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렌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크의 빈틈을 노린 건 그렌이 아니었다.
후웅!
온갖 감각에 걸려든,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지크가 피한다. 동시에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푸욱!
검이 상대의 몸에 파고들었다. 공격을 성공시켰지만 지크는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이걸 당했다고?’
바로 반격을 하긴 했지만 몸의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 내지른 검이다. 공격이라기보다는 상대의 두 번째 공격을 끊어내려는 견제에 불과했다.
방금 스쳐 지나간 검의 날카로운 기세를 생각한다면 상대의 실력은 꽤 높다. 이런 견제에 불과한 검에 당할 이가 아니다.
생각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방심했거나 혹은….
‘방어를 할 생각이 없었거나.’
후웅!
급히 검을 회수하며 상체를 더욱 옆으로 눕혔을 때, 상대의 검이 다시 한번 지크의 몸이 있는 곳을 가로질렀다. 자신의 부상을 아랑곳 않는 공격. 지크는 상대의 얼굴을 쳐다봤다.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할튼 바이너!’
지크가 귀환 후 한스와 함께 처음으로 짓밟았던 상대가 거기 있었다.
그는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지크의 공격에 생긴 어깨의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지크를 끝장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지크는 다리에 힘을 줬다가 그대로 지면을 박찼다.
콰득!
예리하게 갈린 검기가 지크가 있던 곳에 구멍을 냈다.
탁!
지크는 부드럽게 지면에 착지하면서 팔뚝을 힐끔 쳐다봤다.
팔뚝에 피가 내를 이루며 바닥을 향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마지막 검기를 완전히 피해내지 못한 것이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검기가 스쳐 지나간 피부가 살짝 패여 있었다.
지크는 상처에서 눈을 떼고 공격이 날아온 곳을 쳐다봤다. 그렌이 아쉽다는 듯 검을 회수하고 있었다.
‘동료를 끌고 왔나.’
할튼이 지크를 경계하며 그렌 쪽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그의 어깨에 난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지크는 조금 더 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주위에 얼음 송곳을 띄워놓고 있는 피나와 할튼을 향해 지팡이를 향하고 있는 첼시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할튼을 바라본다. 첼시의 치유 마법에 할튼의 상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역시 썩어도 루벨라와 같이 성녀 후보로 뽑혔을 만한 인재였다.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놈들을 모두 데려온 건가.’
아무리 그렌이 연합군에서도 제일가는 실력자라 하지만, 그렇다고 지크 한 명을 죽이기 위해 병력을 아무렇게나 동원할 순 없었다.
애초에 스틸월 백작군을 섬멸하기 위해 연합군을 움직인 것도 회귀라는 뒷배를 믿고 온갖 무리수를 둔 끝에 나온 것이 아니던가.
피나와 첼시는 원래 그렌의 동료였고, 할튼은 예전 유라스에서 봤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렌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이 분명했다.
분명 위기 상황이었지만, 그렌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온갖 발악을 했다는 증거이니만큼 지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상황이 바뀐 것 같지?”
그렌이 이죽였다.
“비겁하다고는 말하지 마라. 원래 네가 했던 짓이잖아?”
“설마 내가 그럴 리가.”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양심은 있는 모양이군.”
그렌은 할튼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할튼의 눈에서 뚜렷한 증오의 눈길이 보내진다.
자신의 빛내는 미래를 앗아간 적. 복수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는 할튼의 의지가 확연히 느껴졌다.
그러나 자신을 죽이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의지라는,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감정을 두고도 지크는 별 동요가 없었다.
저런 이들이야 회귀 전에 수십수백 수레를 채우고도 모자랄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위기 상황인 것도 확실하다.
그렌의 실력은 확실히 자신을 상회하고, 할튼의 실력도 완전히 깔아 보기엔 제법 좋다. 틈만 나는 대로 피나의 마법이 지크를 노릴 것이며, 혹시 지크의 공격이 성공하더라도 첼시는 지크가 입힌 대미지를 모두 회복시킬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별로 긴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우스웠다.
익숙한 상황이다. 회귀 전, 그렌에게 패했을 때 그의 파티원들이 생각났다. 지금도 그 무리를 상대하라면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저어질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과 균형적인 능력을 가진 파티였다.
하지만 눈앞의 그렌의 파티에, 기억 속 그들의 모습은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힘이 부족하면 머릿수를 채우는 게 그리 나쁜 건 아니지. 그런데 말이야. 원래 네가 생각한 구성을 생각하면 너무도 초라한 것 아니냐?”
그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에 비해 지크는 여유롭게 그렌의 일행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확인했다.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어떤 인물들과 대조를 하는 듯이.
“만족하고 있냐?”
뜬금없는 질문. 하지만 그렌은 그 질문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
“…죽어!”
그렌이 지크를 향해 뛰어들었다. 동시에 그렌의 파티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아앙!
지크는 가장 먼저 짓쳐든 그렌의 검을 막아냈다. 묵직한 파괴력이 지크의 검을 몰아붙인다. 이번에도 지크는 그렌의 힘을 모두 감당해내지 못하고 뒤로 밀렸다.
할튼은 그 틈을 노렸다. 지크는 그렌의 검을 막기 위해 모든 신경을 집중한 상태. 다른 곳에 여유를 둘 수 있을 정도로 그렌의 실력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할튼은 훤히 드러난 지크의 옆구리에 칼을 찔러 넣었다.
당장이라도 지크의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할튼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할튼의 공격은 갑자기 날아온 빛에 의해 방해받았다.
콰아아앙!
“크으으윽!”
할튼은 검을 꽉 쥐었다. 튕겨 나갈 것 같은 검을 꽉 붙잡기 위함도 있었지만, 밉살스러운 지크의 피를 보는 것을 방해한 상대에 대한 분노도 있었다.
‘어떤 노…!’
할튼은 자신의 검을 가로막은 상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한스.”
저도 모르게 상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한스도 입을 열었다.
“또 뵙는군요, 바이너 기사님.”
“너…!”
뭐라 입을 열다가, 바이너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가 있던 곳으로 검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라라의 검이었다. 그녀는 한스의 옆에 서서 바이너를 향해 검을 겨눴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그렌에게 향했지만, 딱 그때뿐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바이너에게 못 박혔다.
후웅!
라라가 바이너를 경계하는 틈을 타 한스는 그렌을 향해 에스텔레이드를 휘둘렀다.
콰앙!
지크도 감당하지 못하는 그렌을 한스가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에스텔레이드는 토르니움에 의해 너무도 간단히 막혔다. 오히려 공격을 한 한스가 역으로 밀렸다.
하지만 그렌도 옆에 있는 지크를 두고 무작정 한스의 멱을 따겠다 공격을 할 순 없었다.
후웅!
지크의 검이 그렌을 노린다. 적어도 한스의 팔 한 짝 정도는 날리고 싶었던 그렌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격이 끝난 건 아니었다. 지크와 한스, 라라가 있는 자리로 얼음 송곳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피나가 마법 공격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법은 어디선가 날아온 불덩이에 모조리 파괴되었다.
“…엘레나.”
지팡이를 잡고 있는 피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눈에 몸을 커다랗게 변형시킨 노웸을 타고 스녹과 함께 지크의 곁에 내려서는 엘레나가 들어왔다.
“저기도 인원이 제법 모였네요.”
첼시가 인상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쉽게 갈 수도 있었을 길이 어려워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당장이라도 성법을 쓸 수 있도록 지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렌은 지크의 곁으로 모인 자들을 싸늘하게 살폈다. 라라에게 잠시 시선이 갔지만, 오래 있진 않았다.
“친구들은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지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평소의’ 친구들에 대해 물었었잖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