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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24화 (524/628)

제524화

전쟁이란 것은, 아무리 포장을 두껍고 화려하게 뒤집어씌운다 해도 그 자체로 끔찍한 일이다. 사람의 신체가 조각나고 피는 허공에 흩뿌려지며 생명은 사그라든다.

사람이란 것이 보통 자신의 목숨을 최고, 그게 아니라 해도 최소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그 목숨이 대량으로 사라지는 전장이란 곳은 공포 그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히 전장에 투입된 병사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긴장으로 가득 메운 채 전투에 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게 공포스러운 감정이 사람의 마음을 들쑤신다 해도 사람은 또한 적응의 동물이기도 하다. 마음을 좀먹어가는 공포라는 강력한 감정에도 곧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연합군의 돌진을 보는 스틸월 병사들의 마음도 꼭 그랬다.

물론 긴장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공포심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처음 전장에 서서 딱딱 부딪치는 이조차 느끼지 못한 채 적을 향해 창을 내지르던 처음보다는 훨씬 진정되어 있었다.

그만큼 연합군의 돌격은 스틸월 백작군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 무뎌진 감각이 다시 전신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역시 저놈들, 평소와는 다른 것 같지?”

“젠장, 그냥 내 기분 탓이라고 계속 되뇌고 있었는데 이 새끼가 초를 치네.”

방벽 위에서 창을 꼭 쥔 채 달려오는 연합군을 보는 두 병사가 작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의 불안감의 원인은 최근 그들의 상관이 한 어떤 말 때문이었다.

연합군이 전쟁의 끝장을 보기 위해, 자신들이 얼마나 피해를 보든 악착같이 공격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

전쟁의 끝이라는 말은 기분이 좋았지만, 그 전에 적들의 강력한 공세가 예상된다는 말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냥 지금까지처럼 적당히 공격을 하다 돌아가는 걸 조금만 더 반복한 후 유야무야 전쟁이 끝나길 바랐다.

하나 상관의 말을 손수 증명이라도 해주려는 듯, 돌진하는 연합군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정말로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보자는 듯한 기세였다.

긴장을 하고 있는 건 그 두 병사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병사들과 하물며 병사들에 비해 압도적인 무력을 갖고 있는 기사들마저 평소보다 예리한 기운을 휘감은 채 연합군의 돌격을 쳐다봤다.

“발사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궁수들이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돌격하는 연합군 쪽으로 향했다.

“크악!”

“으아악!”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화살에 연합군의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부상을 입고 땅에 구르는 자들이 속출했고 그대로 목숨이 끊어지는 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동료의 죽음과 부상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연합군은 계속해서 스틸월 백작군의 진영 쪽으로 전진했다.

이번 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그렇게 시작됐다.

* * *

스틸월 백작군은 연합군이 정말로 이번 전투를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평소처럼 어느 부분이 약한지 탐색하듯 공격하는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전면에서 새까맣게 몰려드는 연합군은 매번 공격을 훌륭하게 격퇴하던 스틸월 백작군조차 기가 질릴 정도였다.

수적 우세를 내세운 연합군은 맹공을 퍼부었다. 평소에는 아무래도 지형과 방벽의 존재 때문에 위력과 사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아져 조심스럽게 운용하던 궁수 또한, 피해가 얼마나 나든 상관없다는 듯 무조건 사거리 안으로 몰아붙여 화살을 계속 쏘아대게 만들었다.

그렇게 함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평소보다 더 치열한 상황의 전장이었지만 의의로 평소의 전투보다는 덜 격렬해 보였다.

연합군이 기사와 마법사를 일절 내보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전장에 나올지 모를 그들을 대비하기 위해 스틸월 백작군 또한 고급 병력을 아꼈다.

때문에 전장에서 피를 토해가며 싸우고 있는 자들은 오로지 병사들뿐이었다.

“왼쪽 방벽을 공략하는 병사들이 상당히 많이 소모되었습니다.”

부관이 플로드 백작에게 말했다. 백작의 눈에도 왼쪽 방벽 근처의 병사들의 수가 줄어든 것이 확연히 보였다.

“바로 예비대를 투입해.”

“…하지만 백작님. 이렇게 계속 병사들을 소모하다가는 스틸월 영지를 점령할 때 곤란한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지금껏 연합군이 스틸월 백작군을 말 그대로 죽을 기세로 공격하지 않은 까닭은 그들 병력의 용도는 눈앞의 스틸월 백작군을 전멸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눈앞의 병력을 성공적으로 격멸시켰다 하더라도 스틸월 백작령을 접수하기 위해서는 일정 이상의 병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병력을 이렇게 격렬히 소모한다면 과연 승리를 거두더라도 스틸월 백작령을 성공적으로 접수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단호했다.

“나도 다 생각이 있다. 그대는 명령을 따르도록.”

“…알겠습니다.”

총사령관인 백작이 그렇게 말하는데 일개 부관인 그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그가 알지 못하는 고견이 있겠거니 하고 부관은 백작의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일단 녀석들의 힘을 빼야 해.’

아무리 스틸월 백작군이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방벽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본격적으로 성을 공략하는 것보다는 난이도가 쉬울 수밖에 없다.

‘계속 병사들을 투입한다면 적들은 지칠 수밖에 없다.’

스틸월 백작도 그 정도는 잘 알 터. 그 때문에 기사와 마법사 같은 고위 병력을 완전히 온존하고 있는 연합군과는 다르게 스틸월 백작군은 어느 정도 기사를 내보낸 상태였다.

스틸월 백작군은 점점 지쳐가고 고위 병력도 조금씩이라도 분명 소모되고 있었다.

물론 그건 말 그대로 병사들의 목숨을 무더기로 소모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부관의 걱정이 현실화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플로드 백작의 대안은, 솔직히 아무것도 없었다.

‘밸리드 놈들은 정말로 방법이 있는 거겠지?’

확신조차 할 수 없는 사교도 놈들의 장담에 자신과 가문의 운명을 맡겨야 하다니. 어쩌다 자신이 이런 상황까지 몰리게 됐는지 비참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밸리드에서 정말로 뭔가 뾰족한 수를 내주지 않는다면 플로드 백작가는 끝이었다.

전쟁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눈앞에 들이닥친 것은 꿈이 아닌 분명한 현실이었다.

연합군의 공격은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방벽 너머로 연합군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지만 연합군은 동료의 시체를 밟으며 계속해서 공격했다.

‘슬슬 올 때가 아닌가?’

아무리 이번 전투에서 모든 걸 쏟아내겠다고 다짐한 플로드 백작이었지만 그래도 수없이 죽어나가는 병사들을 보며 조바심이 일었다.

이제 와 병사들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고귀한 생각이 눈을 뜬 건 아니었다.

그들의 군은 아무리 플로드 백작이 대다수의 권한을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연합군이다. 자신들의 병사들이 끝도 없이 죽어가자 다른 영주들의 얼굴은 차츰차츰 굳어져갔다.

그리고 지금, 그들 대부분은 얼굴이 벌겋게 된 채 말없이 전장만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플로드 백작의 권세 때문에 참고 있었지만 곧 폭발할 자들이 나올 것이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어.’

혹 자신의 병력을 데리고 연합군에서 빠지겠다고 하는 인간이 있다면 목을 날려서라도 지휘권을 단단히 해야 한다.

평소라면 아무리 플로드 백작이라도 실행하긴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을 행위였지만 지금은 위급 상황이 아니던가.

그러나 다행히도 플로드 백작이 생각한 최악의 사태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스틸월 백작군의 행동이 이상해졌다. 연합군을 막아내던 병사들의 행동이 확실히 둔해졌다. 동시에 스틸월 백작군의 진영 뒤에서 신호 하나가 쏘아져 올라왔다.

‘왔다!’

“부관!”

“네!”

“당장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출격시켜라! 총공격을 가한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내린 플로드 백작은 스틸월 백작군의 진영을 핏발 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다!’

이 한판으로 모든 것의 운명이 갈린다.

* * *

‘왔군.’

또 다른 연합군 병사 한 명을 베어 넘긴 지크는 슬쩍 뒤쪽을 쳐다봤다. 저 멀리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그들이 스틸월 백작군의 진영에 도착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았다.

전장에 갑자기 나타난 완전히 새로운 군세. 하지만 지크는 그들의 정체를 일찌감치 짐작하고 있었다.

‘밸리드 놈들.’

자신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그렌이 밸리드의 세력을 동원하지 않을 리 없었다.

스틸월 백작군의 진영 후방은 상당히 경사가 있는 지형이다. 때문에 연합군도 쉽사리 포위하지 못하고 전면에나 공세를 집중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달려오고 있는 자들은 그런 지형 따위에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다. 밸리드에서도 당연히 정예들을 파견했을 테니까.

‘저놈들이 원래 피네 자작령의 본성을 지키고 있던 놈들이겠지.’

완성되지 않았다곤 하지만 그래도 밸리드 북부 지부로 예정된 곳에 배치되어 있던 녀석들이다. 아마 실력은 결코 낮지 않을 터.

지크의 계략에 넘어간 그렌이 저들을 바깥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면 아마 피네 자작령의 본성을 공략할 때 상당히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후방에서 협공을 한다는 건 분명 스틸월 백작령에게는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지크의 표정은 걱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 지크에게 있어 관심이 가는 요소는 단 하나였다.

‘드디어 기사들을 내보내는군.’

지금껏 철저하게 후방에서 전장을 지켜보기만 하던 연합군의 기사들이 연합군 진영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밸리드 놈들의 습격에 맞춰서 공격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공투를 하진 않겠지만.’

연합군이 대놓고 밸리드와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힘들 것이다. 아무리 그렌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대부분의 연합군은 밸리드에 부정적인 것이다.

‘아마 지금도 상당히 무리를 하고 있을 거야.’

지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자신의 발언에 화들짝 놀라 이리저리 날뛰고 있을 그렌의 모습이 상상되자 웃음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만족할 순 없었다. 아직 하이라이트가 남아 있다.

연합군의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스틸월 백작군의 기사들도 준비를 시작했다.

지크는 달려오는 연합군의 기사들 속에서 그렌의 모습을 찾았다.

‘저기 있군.’

그렌도 그와 마찬가지 심정인 모양이었다. 그렌의 시선이 정확히 지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틸월 기사들이 하나둘 방벽 밖으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지크도 슬쩍 방벽 밖으로 발을 뻗었다.

툭!

지면에 가볍게 착지한 지크는 주변에서 날뛰는 연합군 병사들을 적당 적당히 베어내면서 그렌이 있는 쪽으로 똑바로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 사이에 남은 사람은 없었다. 지크가 누구인지 눈치챈 병사들이 순식간에 뒤로 물러난 것이다.

지크와 그렌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이 웃었다. 사납고 살벌한 웃음이 교차한다. 둘은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검과 검이 충돌하며 만들어진 굉음이 전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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