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3화
추격대가 본진으로 귀환했다.
스틸월 백작군의 별동대를 쫓아 맹렬한 기세로 출진했던 추격대였지만, 본진으로 귀환한 지금은 그 기세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봐도 그들이 졸전 혹은 패전을 한 군세라는 걸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초라한 몰골에 모두 피곤에 절어 움직임 자체가 굼뜨다.
그 누가 그들을 연합군 최고의 정예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들은 본진에 돌아오자마자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주저앉아 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에게 뭐라고 하지 못했다.
오히려 부관은 그들의 편의를 봐주기를 지휘관에게 요청했다.
갑자기 독선적이고 고집스러운 성격으로 변한 지휘관이었지만 다행히 그 요청은 별말 없이 수락되어, 추격대는 정말로 오랜만에 편히 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정작 추격대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그렌은 그들에게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병사들은 주연, 조연은커녕 엑스트라조차 아닌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과도 같았으니까.
지금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지크뿐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렌의 희망은 보답받았다.
며칠 전, 별동대가 스틸월 백작군의 본진으로 돌아왔다는 정보를 들은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분명 지크가 끼어 있다고 했다.
‘이번에야말로 놈을 죽인다!’
저 멀리 보이는 스틸월 백작군의 진영을 보며, 그렌은 음습한 살기를 피워 올렸다.
* * *
그렌이 단순하게 지크에 대한 살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 어떻게 보면 속 편한 그와는 달리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래, 결국은 들켰다고.”
피네 자작의 보고에 플로드 백작은 절로 새어 나오는 한탄을 참을 수 없었다.
피네 자작가에 있던 밸리드 세력을 들켰단다. 그 소식은 플로드 백작에겐 무척이나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마른하늘에 친 날벼락에 플로드 백작가 저택의 일부가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이 정도의 충격은 받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속일 수는 없는가? 단순히 밸리드 신도들이 성에 있던 정도라면 딱 잡아뗄 수도 있지 않은가. 어차피 스틸월 백작가 내에서도 밸리드 신도들이 나온 만큼 그들도 강하게 주장할 수 없을 텐데.”
“본성에 만들어 놓은, 밸르께 기도를 드릴 제단과 그 주변 시설을 들켰다고 합니다.”
“…그딴 것도 만들어 놓았던 건가.”
“밸르를 섬기는 자로서 무척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제단과 그 주변시설을 ‘그딴 것’ 취급한 플로드 백작이 피네 자작은 상당히 불만인 모양이었다.
그의 눈꼬리가 살짝 솟아올랐다.
플로드 백작도 그걸 눈치챘다. 하지만 자신의 발언을 수정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지금 이 심각한 위기 상황이 닥쳐온 이유가 바로 그 제단 때문이 아닌가.
“카르위먼은 당연히 이 사실을 알겠지?”
“벨리 와이그가 동행했으니까요. 그의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을 겁니다.”
“젠장!”
쾅!
플로드 백작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마력이 담긴 그 주먹에 책상이 산산이 부서졌다. 나무 파편이 이리저리 튄다.
하지만 두 사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안에서 소란이 일자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가 안을 향해 소리쳤다.
“아무것도 아니다. 임무나 계속하도록.”
경비병에게 퉁명스레 말한 백작은 자작을 쳐다봤다. 아니, 노려봤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분노를 내리누르곤 있지만 플로드 백작은 지금 굉장히 동요하고 있었다.
자신이 꾸민 음모가 역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만약 연합군이 밸리드와 협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널리 퍼진다면 끝장이다.
특히 카르위먼이 정식으로 참전이라도 한다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진다.
거기에 만약 밸리드와 협력을 했다는 용의가 피네 자작가에서 끝난다면 다행지만, 플로드 백작가까지 확장된다면?
그때는 이번 전쟁의 패배가 문제가 아니라 플로드 백작가의 존망을 걱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럴 가능성은 무척이나 높았다.
그의 눈앞의 자작이 플로드 백작가가 밸리드와 협력을 했다는 증거를 모아놨다는 얘기를 했었으니.
‘이번 습격 때 적들이 그 증거를 놓쳤다고 생각하는 건 행복하기만 한 망상이겠지.’
“걱정 마십시오.”
“걱정? 걱정하지 말라고? 이 상황에서 어떻게 걱정을 하지 말라는 건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당연히 백작의 노여움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진 피네 자작의 말은 활화산처럼 터지고 있던 백작의 분노를 순식간에 멈추게 만들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 방법이 있어?”
“그렇습니다.”
“어떤 방법인가!”
며칠을 사막에서 헤맨 여행자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백작이 반색을 하며 자작을 독촉했다.
만약 지금 백작에게 무언가 요구를 한다면 상당히 무리한 요구마저 완벽히 들어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어진 피네 자작의 말에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몇 배나 더 험악해졌다.
“저도 모릅니다.”
“…자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목소리 안에 잔뜩 졸여진 감정은 결코 고함을 쳤을 때보다 더 그 압박감이 떨어지지 않게 했다.
조용하게 분노하는 플로드 백작에게 피네 자작이 조금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도 백작의 인내가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부에서 온 전언입니다. 하나의 조건만 확실히 채워준다면 나머지는 전부 처리해 주신답니다.”
일단 피네 자작이 장난을 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백작이 조금은 분노를 죽였다.
적어도 당장 베어버릴 것까지는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상부라면 당연히 크로뇽 왕국이 아니라 밸리드를 말하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그 조건이 뭔가.”
“스틸월 백작군의 전멸입니다.”
“어려운 일이군.”
이번 전쟁에서 정말로 단 한 번도 승리를 따내지 못한 연합군이다.
이미 본진에서도 슬슬 패배를 전망하는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당연히 플로드 백작 앞에서 그런 말을 할 멍청한 이는 없었지만, 전장에서 구른 기간이 긴 백작은 그 분위기를 어렵지 않게 탐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바닥을 기는 아군의 사기에 비해 적의 사기는 드높기 그지없다.
몇 번이나 싸워 모두 승리를 따낸 것이다.
사기가 낮을 리가 없다.
게다가 병력의 질은 애초부터 적이 더 높았고 우세했던 병력 차는 여러 차례 패전을 겪으면서 좁혀졌다.
그런 상황에서 스틸월 백작군을 전멸시키라니.
“하지만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방법이 뭔지는 정말 모르는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지금껏 내가 봐 왔던 자네라면 밸리드에서 결코 지위가 낮지 않을 것 같은데. 자네한테도 숨긴단 말인가?”
“그렇다고 가장 높은 것도 아니죠.”
찜찜하기 이를 데 없다.
혹 밸리드 쪽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작은 그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네 자작의 말대로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좋아. 자네 말대로 하도록 하겠네.”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건대, 공격은 최대한 빨리 하셔야 할 겁니다.”
“알고 있어.”
괜히 시간을 끌어 밸리드와의 협력 관계가 드러나 스틸월 백작군에 다른 원군까지 추가되는 것은 사양이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닙니다. 이번에 있을 총공격에는 우리 밸리드도 다른 방향에서 참가할 생각이니까요.”
“…….”
플로드 백작은 과연 그게 좋은 소식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연합군이 밸리드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정보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건네주지 않는 게 좋다.
하지만 스틸월 백작군을 반드시 전멸시켜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이상, 아무리 그것이 밸리드일지라도 원군의 존재가 본능적으로 반가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같이 싸울 수는 없네. 만약 밸리드가 우리와 협력을 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면 적에게 짓이겨지는 것 이전에 우리 군이 혼란에 빠질 게야.”
밸리드와 협력하는 연합군은 극히 일부일 뿐, 다른 이들은 그저 평범한 이들이었다.
“물론이죠. 저희가 생각할 수 있는 걸 상부에서 생각하지 못했겠습니까. 상부에서도 다 생각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고민이 해결된 사람이라고 하기에 플로드 백작의 반응은 무척이나 떨떠름했다. 하지만 이 길밖에 없다.
“그만 나가보게. 최후의 전투를 대비해 나도 준비를 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피네 자작은 인사를 한번 한 후, 백작의 막사에서 나왔다.
그는 그대로 자신의 막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상부에서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자신의 영지의 함락부터 흘러나간 정보까지. 피네 자작의 심정도 암울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전투가 끝난다면 자신의 몰락은 확실했으니까.
그나마 상부에서 방법이 있다 한 것이 구원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서 통용될 만한 방법이란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세력을 노출시켜가면서까지 스틸월 백작군을 전멸시키라니.’
그게 과연 어떻게 밸리드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마치 스틸월 백작군을 전멸시키고 싶은 제삼자에게 휘둘리는 것 같은 기분이야.’
하지만 자작은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지워 버렸다.
‘그 누가 우리 밸리드를 이용한단 말인가.’
그들은 다른 이들을 이용했으면 이용했지 이용당하진 않는다.
밸리드에 심취한 피네 자작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피네 자작님.”
그때 누군가 피네 자작에게 인사를 해 왔다.
피네 자작은 인사를 한 이를 쳐다봤다.
‘그렌 제너드.’
저 빌어먹을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그리고 자신의 영지를 지키지 못한 등신들 중 한 명.
연합군 내에서도 보기 역겨운 인간들 중 톱을 달리는 이였지만, 피네 자작은 능숙하게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안녕하십니까, 제너드 경.”
“백작님의 막사에서 오시는 것 같습니다만, 혹시 뭔가 백작님의 의향을 들으신 게 있습니까?”
뭔가를 기대하는 투 같다고, 자작은 생각했다.
“곧 스틸월 백작군을 향한 총공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그거 잘됐군요.”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인 주제에 밸리드의 의향에 따라 상대를 공격하는 꼭두각시를, 피네 자작은 평소에 깊이 비웃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오늘은 그 비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눈 때문인가.’
묘하게 반짝이는 그렌의 눈이 자작은 퍽 꺼려졌다.
“제가 바빠서 그러니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아, 제가 바쁜 분을 잡아 두고 있었군요. 어서 가시죠.”
피네 자작은 고개를 한번 숙여 보이고는 그렌을 지나쳤다. 왜인지 웅성대는 마음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다.”
혼자 남은 그렌이 중얼거렸다.
“이번에야말로 놈을 잡는다.”
그의 목소리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 * *
며칠 후, 연합군은 모든 군을 동원해 스틸월 백작가의 공략에 나섰다.
지크는 방벽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의 마음은 무척이나 설레었다. 달려드는 군세 어딘가에 그가 있을 것이다.
‘슬슬 진실이란 걸 감당해야 하지 않겠어? 응, 그렌 제너드?’
지크는 허리춤의 검을 쓰다듬으며 돌진해 오는 연합군을 찬찬히 훑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