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2화
그렌은 꼭두각시로 만든 지휘관을 움직여 바로 군을 돌렸다. 목표는 당연히 지크가 향했으리라 생각되는 피네 자작령의 본성이었다.
감히 자신을 속인, 텅 빈 갑옷을 움직인 이를 찾아내 온갖 고통을 주며 보복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아마 대지의 폭군일 거야.’
그라면 금속인 갑옷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멍청하게! 분명 그놈이 지크 모어의 옆에 달라붙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정말로 진귀하게도 그렌은 스스로를 탓하고 있었다. 만약 스녹의 능력에 대해 조금만 생각했더라면 이렇게 쉽사리 낚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렌의 스녹에 대한 인식은, 그가 세상에 뿌린 많은 마인 중 하나일 뿐이었다. 마인들의 능력 하나하나를 세심히 고찰한 적이 없는 그렌이니만큼 그가 스녹의 능력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 건 필연이었다.
‘여기 어디쯤 있긴 하겠지만….’
그렌은 성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이 근방 어딘가 땅속에 스녹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리 대지의 환수의 계약자라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렇게 섬세하게 금속을 조정할 순 없을 테니까.
생각 같아서는 이 근방 대지를 전부 뒤집어 버려서라도 찾아내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다음 회귀 때 조져 버리겠어!’
약간의 변수가 생기더라도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라고 그렌은 이를 갈았다.
연합군은 빠르게 진군했다. 산사태에 휘말려 군마는 대부분 잃어 버렸지만 그들은 정예였다. 애써 피네 자작령에서 가져온 물자마저 대부분 버리고 이동한다는 극단적인 강행군이 더해지자 보통 사람이라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이동 속도가 나왔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노력은 보답받지 못했다.
처음 주도의 성벽을 보았을 때, 연합군은 잠시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주변에 스틸월 백작군은 보이지 않았고 주도의 성벽도 공격을 받았다기엔 지나치게 멀쩡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혹, 스틸월 백작군이 그들 추격대에 대한 승리에 만족해 철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주도 안 본성을 보는 순간 완전히 박살 났다.
어딘가 크게 박살 난 곳은 없다. 하지만 성벽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와 핏자국들이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확실히 알리고 있었다.
“이런, 젠장!”
기사 한 명이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말로 하지 않았을 뿐, 다른 이들도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렌도 마찬가지. 오히려 다른 이들보다 더 압도적인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분노만 표출하고 있기에는,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성 안으로 군을 진입시켜선 안 돼!’
적군에 벨리 와이그가 같이 있다는 정보가 있던 이상, 피네 자작가가 밸리드의 주구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확률이 높다. 적어도 내통을 했다는 확신 정도는 가졌으리라.
하지만 지금 그렌에게 그따위 건 별로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지크를 확보하는 것. 그가 꾸민 모든 음모가 밝혀진다고 해도 지크만 확보하면 됐다.
‘그놈이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아는지 모조리 알아낸 다음 회귀를 하면 그만이야.’
그러나 적어도 지금, 연합군이 그 사실을 알면 안 됐다. 여기서 피네 자작가와 밸리드의 내통 사실이 다른 연합군 세력에게 알려진다면 그들은 더 이상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려 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거의 확실했다.
그건 즉, 지크를 잡을 군사력이 부족해진다는 걸 뜻했다.
때문에 그렌은 즉시 지휘관을 움직였다.
피네 자작가의 병사들 중에서도 밸리드와 관련이 있는 자들만 성을 수색하도록 했고, 나머지는 성 외부에 남겨뒀다.
그런 후, 그렌 본인은 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확인할 것이 있었다.
‘지하에 있는 밸리드 시설은 괜찮겠지?’
그것만 들키지 않았다면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본성을 지키던 밸리드 신도들이야 변명할 수 없지만, 자신의 세력 안에서 밸리드의 주구들이 발견된 건 스틸월 백작가도 마찬가지.
물론 아예 전투 인원이 상주하던 만큼 그 심각성은 피네 자작가가 더 위였지만, 외부에서 보자면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이번 전쟁의 전개상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시간을 조금 더 가질지 모른다.
‘최악이라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카르위먼의 참전만 막아낼 수 있으면 돼.’
하지만 그의 기대는 충족되지 못 했다.
그렌은 지하 감옥 한편에 뻥 뚫린 구멍을 허탈하게 쳐다봤다. 제발 들키지 말라 기원한 밸리드의 시설로 향하는 비밀 입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주먹을 꽉 쥐면서도 그렌은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남은 적이 숨어 있을지 모르기에 토르니움을 뽑아 들고 주변을 경계하며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적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밸리드 신도들의 시체뿐.
마지막 방에 들어선 그렌의 발걸음이 멈췄다. 밸리드 북부 지부의 책임자로 내정되어 있던 비시푸나와 그의 호위들의 시체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핏물이 바닥을 가득 메운 채 말라붙어 있는 모습이 꽤 끔찍했다.
하지만 그렌에게 그 모습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입구의 맞은 벽에 새겨진 검붉은 글자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글자는 피로 쓰여 있었다. 아마도 방에 나뒹굴고 있는 시체들의 피를 사용한 것 같았다.
섬뜩한 광경이었지만 그렌의 신경은 글자의 내용에 쏠려 있었다.
【맹수에게 쫓기는 개새끼처럼 허겁지겁 달려왔을 고귀하고도 고결한 용사님께.】
찬란한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오히려 무척이나 비틀리고 냉소적인 뜻을 한껏 표현한 글.
그렌은 본능적으로 저 글이 자신을 향해 쓰인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날 잡겠다고 온갖 난리를 치고 있는 네 모습이 상상만 해도 웃기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사람은 그게 무엇이 됐든 일단 칭찬을 해야 하는 법. 헛고생하느라 수고 많았다.】
이어진 문장도 앞선 글귀와 다르지 않게 조롱 일색이다.
【보다시피 너희가 음습한 바퀴벌레와 정다운 이웃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를 찾았다. 너와 달리 진짜 고귀한 카르위먼의 성기사께서 이곳을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지으셨지. 아마 곧 카르위먼은 너희에게 파문과 선전포고라는 선물을 보내줄 거야. 그리고 그때가 너희 연합군이 파멸하는 날이겠지.】
그렌의 눈동자에 핏발이 돋아났다.
【하지만 고작 그렇게 끝내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겠어? 네가 날 쫓아다닌 세월이 얼만데. 그러니 어서 너희 본진으로 돌아가도록 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끝나기 전에 발버둥이라도 한 번 쳐봐야지.】
그리고 다음 문장으로 글귀는 끝났다.
【수십 혹은 수백 혹은 수천 혹은 수만 년 동안 네 정다운 친구였던 이가.】
“…이 개자식이이이이이이!”
죽은 시체들 사이에서, 그렌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댔다.
* * *
“네? 바로 본대로 귀환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지휘관의 명령에 부관이 당황해 말했다.
“그래. 아마 적들도 본대로 귀환했을 것이니, 우리도 따라가야지.”
“하지만 막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강행군 때문에 피로를 느끼는 자들이 꽤 많습니다. 하루 정도는 성에서 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적들이 어째서 기껏 점령한 주도를 버렸는지도 의문이 남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가려 뽑은 정예라지만 전투의 패배와 불편한 잠자리, 그리고 속았다는 허탈함과 이어진 강행군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꽤 피폐해진 상태였다.
한데 쉬는 시간도 없이 또 다시 바로 움직이겠다니.
게다가 적들의 움직임도 이상했다.
분명 적들은 이번 전쟁의 명분을 뒤집어 버리기 위해 피네 자작령을 점령하려는 것으로 추측됐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기간 동안 주도를 점령하고 있어야 한다.
성을 한 번 함락시켰다고 영지전의 승리라고 주장하기에는, 피네 자작이 떡하니 살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적들은 주도를 점령하고 있긴커녕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혹시 점령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본성 근처에 흩어져 있는 피네 자작군의 상태를 생각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혹시 성을 점령할 때 너무 커다란 피해를 입어서 수성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철퇴한 것일까.
그것은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적들이 다시 스틸월 백작령으로 향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어떤 작전을 수행하느라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전혀 다른 장소로 이동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래저래 부관은 아직 적의 움직임에 대해 어떠한 확신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휘관은 뭔가 묘한 확신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주장을 계속 밀고 나갔다.
“그들은 본대로 귀환했음이 확실하다! 당장 떠날 채비를 갖추도록!”
“…알겠습니다.”
이제는 익숙해지기까지 한 지휘관의 독선적인 행태에 부관은 한숨도 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가는 그의 어깨가 묘하게 처져 있었다.
부관이 나간 지 얼마나 됐을까. 그렌이 안으로 들어 왔다. 그는 지휘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터벅터벅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무례를 지적해야 할 지휘관은 아무런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아예 반응 자체가 없었다.
그렌은 지휘관의 앞에 서서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초점이 잡히지 않은 흐리멍덩한 눈이 지휘관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역시 단시간에 하는 세뇌는 부작용이 커.’
부작용만 없었다면 세계를 그의 뜻대로 주무르는 데 훨씬 더 많은 도움이 됐을 텐데. 그렌은 아쉬움에 혀를 찼다.
‘이 녀석도 얼마 못 쓰겠군.’
하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고작 이런, 조연조차 되지 못하는 인간 하나쯤 죽어나가는 것이야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그렌은 남 걱정하고 있을 때도 아니었다.
“쿨럭!”
그렌의 입에서 선홍색 피가 튀어나왔다. 그렌은 입가의 피를 손으로 거칠게 닦았다. 손에 묻은 피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반동이 심해.’
지금껏 재능이 떨어지는 그렌을 용사라는 칭호에 걸맞게 만들어준 것은 클로원 제국이 남긴 유산이다. 적은 마력을 강제로 높이고 떨어지는 근력이나 반사 신경 등을 억지로 상승시킨다. 거기에 기타 다른 능력들을 올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몸의 성능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이니만큼 올바른 사용법에 따라 천천히 몸을 익숙해지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렌은 이번 시간선에서는 그 유산을 마구잡이로 사용했다. 그 덕에 능력은 빠르게 올랐지만 몸은 반동에 휘청였다.
그러나 그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회귀를 하면 몸도 원래의 건강한 상태로 돌아갈 거야.’
지금은 지크를 잡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래, 지크 놈만 잡고 정보를 빼낸 다음 회귀를 하면 돼.’
물론 본진에서 기다리겠다는 저 말이 거짓일 수도 있다. 때문에 그렌은 지크의 행방을 파악하는 데도 총력을 기울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가 본진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곧 있을 전투에서 지금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동원한다!’
어쩌면 이번 시간선 최후의 전투가 될지도 모를 사건을 눈앞에 두고, 그렌은 타오르는 전의를 예리하게 갈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