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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21화 (521/628)

제521화

바퀴벌레 두… 아니, 비시푸나는 확실히 새로운 밸리드 북부 지부의 총책임자로 내정된 추기경답게 무척이나 강했다.

그가 쏘아 보낸 음습한 밸르의 힘은 상대방을 사악하고 집요하게 노렸다. 웬만한 상대라면 그게 기사건 마법사건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불행하게도 그의 상대는 카르위먼에서도 가장 강한 성기사라 칭송받는 벨리 와이그였다.

게다가 그는 밸리드에 대한 강한 증오심마저 갖고 있는 자였다.

콰아앙!

“커헉!”

비시푸나가 입에서 피를 뿌리며 뒤로 튕겨져 나간다. 쭈글쭈글한 노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동정심을 일으킬 만도 하건만, 와이그의 눈에는 일절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밸리드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몬스터일 뿐이었다.

‘무시무시하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크는 혀를 내둘렀다. 이제는 와이그에게도 밀리지 않을 힘을 손에 넣은 지크였지만, 그렇다 해도 와이그의 박력은 사람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쾅!

자신에게 향한 공격을 한 걸음만 움직여 피해낸 지크는 자신을 공격한 상대방을 살폈다. 분명 비시푸나의 호위 기사 같은 놈이었다.

“크윽!”

공격이 실패한 것에 실망한 것일까. 녀석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에 물들었다.

‘공격이 실패했다고 짓기에는 조금 과한 얼굴인데?’

지크는 뒤를 돌아봤다.

‘이것 때문이군.’

방 곳곳에 새겨져 있는 밸르의 조각상 중 하나가 방금의 공격에 반쯤 박살 나 있었다. 아무래도 지크가 공격을 피하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파괴된 모양이었다.

“어라? 지금 자기가 믿는 신의 조각상을 파괴한 거야? 이야, 이런 신성 모독이 있나!”

다만 의도치 않은 상황이라도 지크의 입이 멈출 이유는 없었다.

“아님, 그거냐? 너희 신은 자신의 조각상을 부수면 좋아해 주거나 그러냐? 완전 변태 새끼잖아! 밸르는 변태 신이었던가? 하긴, 그러지 않으면 이런 바퀴벌레 같은 짓을 신도들한테 시키진 않았을 거야.”

“닥쳐어어어!”

신앙하는 신의 석상을 깨부순 것만으로도 마음이 흔들리는 판국에 지크의 혓바닥까지 더해지자 밸리드의 성기사는 분노로 눈앞이 뿌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수천수만 번의 닥치라는 말을 들었던 지크가 정말로 닥쳤던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실핏줄을 터뜨린 채 분노에 휩싸여 달려오는 자들은 바닥에 기어 다니는 개미떼만큼이나 많이 본 지크다.

당연히 적의 분노 따위에 그의 마음은 일절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면 뭐야. 너 밸리드 안의 카르위먼 신도냐? 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스파이 중에 너랑 비슷한 놈이 있었어. 자세히 보니까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달려 있는 게 똑같네. 말을 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적절히 눈감아 줬을 텐데.”

그 와중에도 밸리드 성기사의 공격은 계속됐지만, 지크는 정말로 얄밉게 피해냈다. 얄밉게다.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내는 데다가 피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누가 봐도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눈이 뒤집힌 밸리드 성기사에게, 지크의 도발은 너무도 효율적으로 먹혀들었다.

“밸르란 놈은 어떻디? 역시 변태 자식이냐? 생태는 어때? 생선 대가리니까 물에서 사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 바다야 강이야 호수야? 일단 어디서든 포식자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피라미 비슷한 역할인 건 확실할 것 같은데. 상어는 봤대?”

“닥쳐어어어어어어!”

밸리드 성기사가 검을 높이 쳐들었다. 음습한 밸르의 기운이 검에 가득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의 검이 내려쳐지는 일은 없었다.

서걱!

지크의 검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그의 검이 그린 섬광은 적의 목을 정확히 갈랐다. 강하게 응축된 밸르의 기운이 사라지고 힘을 잃은 검이 바닥에 아무렇게 나뒹굴었다.

‘닥치라는 말밖에 모르나. 어휘력 빈약한 놈 같으니. 실력이 없으면 침착성이라도 있어야지.’

그것으로 상대에 대한 감상은 끝이었다. 지크는 바로 다음 녀석을 찾으려 고개를 돌렸다.

‘대충 정리됐군.’

최후의 정예 같은 수준의 녀석들이었지만, 지크 쪽 병력의 질도 상상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지크와 벨리 와이그의 무력은 압도적인 수준.

밸리드 신도들은 대부분이 사망하고 비시푸나를 포함해 단 세 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크악!”

‘이제 두 명이군.’

대니의 검에 또 한 명의 기사가 또 쓰러졌다. 과연 강철검 기사단의 부단장이라고 해야 할까. 지크, 와이그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의 검 또한 굉장히 강했다.

곧 다른 한 명도 스러졌다. 이제 남은 건 비시푸나뿐이었다.

‘그것도 곧이군.’

“흐아아아압!”

와이그가 커다란 기합성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반투명한 막에 와이그의 검이 막혔다. 하지만 심하게 출렁거리는 막의 상태를 보면 그리 오래 버틸 것 같지 않았다.

“으으윽!”

비시푸나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어찌나 무는 힘이 강했는지 잇몸이 주저앉으며 입 밖으로 피가 줄줄 샜다.

그러나 필사의 노력을 쥐어 짜낸다고 해도 능력이 달리는 일을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콰지직!

비시푸나를 감싸고 있는 막에서 기어이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란 비시푸나가 대응을 하려 했다. 그러나 와이그의 행동이 더 빨랐다.

와이그가 살짝 검을 뒤로 뺐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막을 후려쳤다.

콰아앙!

“크아악!”

노도 같은 성력에 비시푸나를 보호하던 막이 깨지고 빛이 비시푸나를 가격했다. 온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에 비시푸나가 비명을 질렀다.

극히 유리한 상황이 됐지만 와이그의 눈빛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오랜 세월 카르위먼의 검으로서 적을 처단해 온 그의 경험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서걱!

와이그의 검이 고통스러워하는 비시푸나의 목을 그대로 베었다. 새로운 밸리드 북부 지부의 책임자라는 허울은 그렇게 사라졌다.

“후우!”

숨을 깊이 내쉬고 와이그는 검을 수납했다. 강렬한 시선으로 자신이 베어 넘긴 비시푸나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수고하셨습니다. 과연 카르위먼 최고의 성기사라는 표현이 납득 갈 정도로 대단한 무용이었습니다.”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보다는 지크 님이 더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방금 전까지 눈에 불을 켜고 밸리드 신도들을 때려잡으러 다니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와이그의 웃음은 털털했다.

지크의 뒤에서 대니가 살짝 눈을 비빌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만족할 순 없겠죠. 다른 동료들이 곳곳에서 처리를 하고 있을 테지만, 아직 바퀴벌레는 많을 테니 말입니다.”

“지크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놈들은 토벌할 때 완전히 토벌해야지, 그렇지 않다면 다른 곳으로 도망가 또 더러운 알을 깔 테니까요.”

와이그는 허리춤의 검을 한 번 흔들어 보이며 여전한 전의를 불태웠다.

그렇게 스틸월 백작군의 별동대는 피네 자작령의 본성 곳곳을 헤집으며 살아 있는 모든 밸리드 신도들을 도륙하며 성을 완전히 장악했다.

* * *

별동대의 지휘부가 본성의 응접실로 쓰이는 곳에 모였다. 작전이 크게 성공한 덕분에 모인 이들의 면면은 밝았다. 하지만 긴장을 풀고 있지는 않았다.

분명 그들의 영향력 안에 떨어졌지만, 이곳은 적지였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도련님.”

대니가 물었다.

“예정대로 이곳을 계속 점령하고 계실 겁니까?”

지크가 피네 자작령을 공격하겠다며 내세운 명분은 피네 자작령을 점령해, 일단 겉보기로는 영지전 성격인 이 전쟁의 성격을 뒤집어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애초에 명분이었을 뿐, 지크는 이곳에 남을 생각이 없었다.

“아뇨, 철수할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계획과는 다릅니다만.”

대니의 목소리에 추궁하는 듯한 어조는 전혀 없었다. 지금껏 지크가 세워 온 놀라운 성과를 보며 그는 지크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없앤 상태였다.

“우리가 이곳을 점령하려 한 이유는 적들의 명분을 날려버려 다른 영지와 왕국의 참전을 이끌어 내려고 한 것입니다. 한데, 더욱 굉장한 발견을 하지 않았습니까.”

“밸리드 말씀이시군요.”

대니는 침음성을 삼켰다.

설마 왕국의 귀족이 밸리드와 달라붙어 자신의 본성을 밸리드의 본거지로 만들었을 줄은 몰랐다.

지금 스틸월 기사들에게 피네 자작가의 이미지는 땅바닥을 기기는커녕 아예 지저로 뚫고 나갈 만큼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귀족이 밸리드와 손을 잡는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인 것이다.

“도련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들을 속인 것이지만 대니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말았다. 이번 발견으로 스틸월 백작가가 얻을 이득을 생각하면 한 번 속는 것 정도야 손해 축에도 끼지 못했다.

“하루 정도 쉰 후 우리는 바로 백작령으로 돌아가 본대와 합류합니다. 그리고 왕성과 주변 영지에 연락을 넣어야겠죠. 물론 카르위먼에도 말이죠.”

지크가 와이그를 쳐다보자 그는 자신의 가슴을 쿵쿵 쳤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뚜렷한 증거가 나온 이상 카르위먼은 철저하게 스틸월 백작가의 편을 들 겁니다. 감히 밸리드와 손을 잡은 자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 세상에 철저히 보여줘야죠. 물론 크로뇽 왕국의 국왕 전하와 다른 영주분들께도 제 이름을 걸고 여기서 보았던 일들을 증명하겠습니다.”

카르위먼의 최고 성기사가 하는 보장은 강력하기 이를 데 없다. 하물며 그것이 밸리드의 존재 증명이라면 더더욱.

지크가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이 전쟁은 지금까지처럼 영지전이란 겉모습을 뒤집어쓴 우스꽝스러운 전쟁이 아니게 될 겁니다. 적들이 우리에게 누명을 씌운 밸리드의 주구란 낙인은 역으로 놈들이 뒤집어쓰게 될 것이고, 놈들이 만들려 했던 연합군은 오히려 우리가 만들게 될 겁니다.”

지크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 놈들이 어떻게 발악을 할지 느긋하게 지켜보도록 하죠.”

* * *

숲을 향해 진군한 연합군은 기습적으로 적들을 들이쳤지만, 곧 엄청난 허탈감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적이라 생각했던 이들은 텅 빈 갑옷들이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적은 혼자서 움직이는 갑옷들로 자신들을 완벽히 속인 것이다.

연합군은 신경질적으로 천막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적병은커녕 무기나 식량 같은 물자조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빈 천막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젠장!”

또 하나의, 텅텅 빈 천막을 확인한 그렌은 신경질적으로 천막의 천을 잡아당겼다. 막대한 힘에 천막을 지탱하고 있던 나무가 부러지며 우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그렌은 시선조차 주지 않고 다른 천막을 들쳤다.

그곳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그들이 속은 건 명확했다. 그렌도 그걸 깨닫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방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려 할 때 혹시나 싶어 찾아본 곳을 또 찾아본다는, 그런 무의미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그렌은 주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갖 분노와 짜증이 마음속에서 활화산처럼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섬뜩한 생각도 함께 들었다.

적들이 완전히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아닐 터. 그들을 속이고 어디론가 향한 건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이 향한 곳을 짐작하는 곳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피네 자작가의 주도!’

그리고 지금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는 그렌으로선, 만약 피네 자작가의 본성이 함락되었을 시 닥쳐올 파장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당장 움직여야 해!’

비단 파장 때문만도 아니다. 지크도 그곳으로 향했을 테니, 지크를 잡으려면 자연히 그곳으로 가야 한다.

그렌은 벌떡 일어서 자신이 세뇌한 지휘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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