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0화
지크와 와이그는 일단의 기사들을 데리고 성을 질주했다. 밸리드의 신도들이 공격을 해왔지만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 와이그가 대단했다. 그는 왜 자신이 밸리드 도살자라 불리며 밸리드 신도들에게 두려움을 받는지 증명을 하겠다는 듯 무자비하게 앞을 가로막는 신도들을 도륙했다.
푸욱!
와이그의 검이 다시 한 생명을 거뒀다. 검에 찔린 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여긴 완전히 밸리드 놈들에게 점령당했군요.”
와이그는 불쾌한 눈빛으로 자신이 죽인 자를 내려다봤다. 하녀복을 입은, 평범하게 생긴 중년의 여인이었다.
지금껏 그를 막아온 밸리드의 신도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지크와 와이그를 향한 살기도 없이 구석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다.
이 악의 구렁텅이 안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주어진 일만 하던 평범한 사용인 같았다.
하지만 와이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민 순간 눈빛이 변했다. 품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와이그를 향해 내질렀다.
물론 그런 허접한 공격에 당할 와이그가 아니었다. 그녀의 공격은 와이그에 치명상을 입히긴커녕 닿지도 못했다. 오히려 와이그의 검이 그녀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냈다.
기습을 성공적으로 막았지만 와이그는 기분이 좋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하녀는 밸리드의 기사나 신관이 아니다. 그렇다고 시체에서 밸르의 더러운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니 세뇌를 당한 것도 아니다.
제정신으로 순수하게 밸르를 섬기는 일반 신도인 것이다.
그리고 그건 와이그의 복장을 말 그대로 뒤집어 놓는 일이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성 안에 있는 자들 중 밸리드와 관련 없는 자들은 없다고요.”
“지크 님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카르위먼의 성기사로서 최소한의 확인은 해야 했던 터라….”
“걱정 마십시오. 충분히 이해합니다.”
“어쨌든 이걸로 세 번째입니다. 부딪친 사용인들이 전부 똑같은 반응을 한 이상, 지크 님의 말이 맞겠지요.”
와이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성에 있는 모든 자들을 제거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이 성에 일반인은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밸리드 신도들이죠. 양심의 가책 같은 것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거 하나만은 마음에 드는군요.”
그리고 지크와 와이그는 다시 내달렸다.
그들의 뒤로 밸리드 신도들의 시체와 피가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새로운 북부 지부라기엔 녀석들의 전력이 너무 약하군요.”
“아직 완성된 곳도 아닌 데다가, 주력은 있지도 않은 저를 잡겠다고 연합군 추격대와 맞부딪쳤던 숲에 나가 있을 테니까요.”
“지크 님은 정말로 바퀴벌레를 다루는 데 있어서 뛰어나십니다.”
“으음, 분명 칭찬이시겠지만 바퀴벌레라는 어감 때문인지 좋은 뜻으로 들리지 않는군요, 그거.”
누가 들으면 아늑한 의자에 앉아 한 손에 음료를 들고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는 상황인 듯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내달리며 보이는 족족 밸리드 신도들의 멱을 따고 있었다.
“목표는 어디인지 아시죠?”
“알다마다요.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바퀴벌레 소굴 청소는 제가 전문이라고 말입니다. 그 음습하고 더러운 놈들이 좋아하는 장소야 뻔하죠.”
또 한 명, 밸리드의 기사를 베어버린 와이그는 자신의 발밑을 쳐다봤다.
“지하에 있겠죠.”
일단 밸리드 놈들이 성에 잔뜩 퍼져 있다는 건 확실했고, 그래서 누가 봐도 이 장소는 밸리드 놈들의 거점이라는 것까지 의문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래도 증거는 많을수록 좋았다.
“이 정도로 놈들이 많다면 본격적으로 완성된 곳이 아니라 해도 정식으로 종교적 의식 장소 정도는 만들어 놨겠죠.”
와이그가 콧김을 뿜어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럼 어서 찾아서 박살냅시다. 그런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해악 아니겠습니까.”
“이를 말입니까.”
계속해서 지하를 향해 내려가던 그들은 어느덧 지하 감옥에 이르렀다. 꿉꿉하고 축축한 데다가 쾨쾨한 곰팡내와 옅은 피비린내까지 묻어나는 공기는 사람의 기분을 바닥으로 처박는 데는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의외로 와이그는 이곳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아, 밸리드 놈들을 처박아 두는 데로는 아주 딱 들어맞는 곳이군요. 놈들이 제 주제를 알고 이런 곳에 알아서 모여 살았다면 약간이나마 호감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물론 놈들을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린다는 사명에 영향을 주진 않았겠죠?”
“당연하죠. 그놈들의 해악은 약간의 호감 정도로 묻어두기엔 너무도 끔찍하니까요.”
지하 감옥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척 봐도 말라붙은 피가 곳곳에 산재한 것이, 적어도 이곳에서 상당한 사람이 죽어 나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둘은 지하 감옥 끝에 다다랐다. 하지만 더 이상 길은 없었다. 차가운 감옥의 벽면만이 그들을 어둡게 환영했다.
와이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 어딘가에 분명 비밀 통로가 있을 겁니다. 정말로 바퀴벌레 같은 짓을 즐겨 사용하는 놈들이죠.”
그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지크를 쳐다봤다.
“일단 다른 곳에 있는 놈들부터 처리하시죠, 지크 님. 이곳은 교황님께 소식을 전해 전문적인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니, 어렵지 않게 통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당장 벌레들의 둥지를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짜증 난 건지 와이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리고 지크는 와이그의 그 짜증을 당장 풀어줄 용의가 가득했다.
“지크 님?”
와이그의 의문성을 반쯤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지크는 어느 창살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죄인이 없기 때문에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지크는 어느 벽면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손을 턱에 얹고는 벽면을 쭉 훑었다.
‘그러니까….’
기억을 되새기며 그는 벽면을 이루고 있는 벽돌 몇 개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륵!
놀랍게도 별로 힘을 준 것도 아닌데 벽돌은 지크가 누르는 족족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와이그가 눈을 빛냈다. 그도 지크를 따라 창살 안으로 들어왔다.
쿠구구궁!
곧 지크가 선 벽면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 한 명 정도 들어갈 만큼의 벽면이 스르륵 뒤로 밀리더니 곧 그들 앞에 입구 하나가 생겼다.
“굳이 사람을 부르실 필요는 없으실 것 같군요.”
지크가 통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통로에 대한 정보의 출처도 비밀입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와이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통로 안으로 발을 디뎠다.
“지크 님은 정말로 신비한 존재입니다만, 뭐, 이제 와서라는 느낌도 있으니. 밸리드 놈들이나 때려잡읍시다.”
지크도 와이그의 뒤를 따라 통로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는 슬쩍 비밀 통로의 문을 돌아봤다.
‘이야, 역시 그 공주님 쓸모 있네.’
만약 세르피나가 들었다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박박 갈 생각을 태연히 한 지크는 그대로 통로 너머로 사라졌다. 다른 기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 * *
콰아아앙!
와이그의 찬란한 빛의 검이 거센 성력의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을 막으려던 두 명의 밸리드 기사들이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들은 와이그의 공격을 받아 넘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와이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빌어먹을 쓰레기들이!”
그의 검이 한층 더 광폭하게 빛났다. 더 강력한 성력이 밸리드의 두 성기사에게 들이닥쳤다.
“크헉!”
“크악!”
이번 공격은 막을 수 없었는지 그들의 몸에 빛이 부딪쳐 들었다. 단말마의 비명을 날리며 그들의 몸이 산산이 찢겨 나갔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니가 슬쩍 지크에게 말했다.
“평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시군요.”
알고 지낸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들이 알던 벨리 와이그는 진정한 성기사의 귀감이었다. 정의롭고 강하며 모두에게 친절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밸리드의 신도들을 베어버리고 있는 와이그는 정말로 그들이 알던 그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오히려 밸리드 신도들보다 악귀처럼 날뛰고 있는 그가 더 사교도 같다는, 불경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저게 밸리드를 상대할 때의 카르위먼의 자세입니다. 성녀님인 루벨라 님조차 밸리드를 상대로는 일말의 자비도 없지요. 그러니 카르위먼과 적대할 생각이 없다면 밸리드의 일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다뤄야 할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만약 이번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았다면, 밸리드 신도들을 휩쓸고 있는 저 성력이 자신들을 향했을 거라 생각하니 대니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와이그가 대놓고 날뛰고 있긴 하지만, 다른 이들이라고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카르위먼처럼 종교적으로 박멸해야 할 상대는 아니라 해도 밸리드는 그들 스틸월 백작가를 음모에 빠뜨린 세력이었던 것이다.
그들도 상당한 분노를 담아 밸리드 신도들을 도살하고 다녔다.
지하의 밸리드 시설은 그리 크진 않았다. 예전에 처리했던 밸리드의 북부 지부와 비교해도 확실히 작다.
그러나 영지 하나가 통째로 밸리드의 세력권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시설을 그리 크게 짓지 않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퍼엉!
날아오는 밸리드의 마법을 베어버린 지크는 그대로 밸리드의 신관에게 달려들었다. 지크가 가까워지자 신관이 허둥지둥 지팡이를 움직인다. 당연히 그런 움직임으로 지크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서걱!
신관을 두 조각 낸 지크는 그대로 다음 목표를 찾아 움직였다.
콰앙!
눈앞의 커다란 문을 걷어찬다. 분명 뛰어난 장인이 만든 게 분명한 밸르의 조각이 새겨진 문이었지만 지크의 발길질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오히려 그 밸르의 조각을 노리고 발길질을 한 감도 있었다.
‘여기가 마지막 방이군.’
밸르에 대한 기도를 올리는 곳인지 방은 상당히 장엄하게 꾸며져 있었다. 규모도 크고 벽면에 새겨져 있는 조각도 하나하나가 생동감이 넘쳤다.
그 안, 스무 명 정도의 신도들이 지크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무리의 중심에 있는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새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쭈글쭈글한 노인.
지크도 어느 정도 아는 자였다.
“이야, 여기에 우두머리가 계셨네.”
“저자는….”
지크의 뒤를 이어 방에 들어온 와이그도 노인을 눈치 챘다.
“비시푸나 추기경!”
“저 작자가 이곳의 총 책임을 맡고 있는 자일 겁니다.”
와이그가 웃었다. 웃음은 전염되는 법. 하지만 그 누구도 지금 와이그의 웃음을 보고 같이 웃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지크는 생각했다.
‘음, 이거 뺏기는 좀 그렇지?’
트리슬로와처럼 대놓고 지크의 분노를 산 것도 아니다. 만약 비시푸나가 그런 놈이었다면 와이그가 어쨌건 지크 자신의 손으로 오랫동안 괴롭히다가 끝장을 냈겠지만.
‘트리슬로와도 내가 먹어 치웠고. 저 정도는 양보해주자.’
지크는 와이그를 향해 말했다.
“저 작자는 와이그 님께 양보하겠습니다. 트리슬로와야 원한이 있었으니 제가 끝장냈지만, 저자는 카르위먼의 검이신 와이그 님께서 처단하시는 게 보기 좋겠지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정말로 감사합니다, 지크 님!”
와이그가 격하게 기뻐했다. 하지만 반대로 비시푸나의 얼굴은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 빌어먹을 놈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양보니 뭐니 한단 말이냐!”
지크와 와이그는 서로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봤다. 그리고 비시푸나를 바라보며 동시에 말했다.
[바퀴벌레 두목.]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