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9화
피네 자작령의 주도는 딱 자작령의 평균적인 규모를 갖고 있었다. 영주의 성을 감싸고 있는 본성과 본성을 감싸고 있는 성벽. 그 바깥의 영민들이 살아가는 시가지. 그리고 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성벽까지.
하지만 시가지의 성벽은 아무래도 변경백이라는 지위를 갖고 있는 스틸월 백작령의 그것과는 무척이나 초라했다. 과장 좀 섞어 조금 높은 담벼락이라고 해도 납득이 될 정도였다.
그런 것이 스틸월 백작군 내에서도 정예로만 이루어진 별동대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턱!
고작 한 번의 제자리 뛰기로 성벽 위로 올라온 지크는 가만히 성벽 너머를 살폈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달빛과 별빛이 도시의 모습을 비춘다.
‘경비는 없군.’
적다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없었다. 아무리 작은 도시라도 이런 야심한 시각에 경비가 없는 건 딱 잘라 있을 수 없다. 말 그대로 도시에 대한 방어를 포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지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태연히 일어나 있었다.
‘역시 싹 데려갔군.’
지크는 피식 웃었다.
‘자기만이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엄청난 힘을 내가 썼다고 언급했으니, 피네 자작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르기나 했겠어?’
게다가 설혹 피네 자작가의 정체가 들켜도 회귀를 시키면 전부 없었던 일이 될 거라는 낙관적인 생각도 한몫 했을 것이다.
더 이상 그런 기회는 없다는 것도 모른 채.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새로운 북부 지부를 목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예상치 못한 방위 전력이 있다고 해도 이상한 건 아니지.’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평소보다 그 전력은 대폭 하락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지크는 뒤로 수신호를 보낸 후 성벽 너머로 뛰어내렸다.
보통이라면 성문을 열고 다른 이들을 불러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별동대의 실력은 그 보통의 상황을 의미 없게 만들었다.
슉! 슉! 슉!
검은 그림자들이 성벽을 계속 뛰어넘어 온다. 경비병 하나 없는 무경계한 환경 속에 스틸월 백작군은 별 어려움 없이 피네 자작령 주도 안으로 진입했다.
그들이 전부 성벽 안에 내려앉기까지는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지크가 손가락을 피네 자작령의 본성을 가리켰다. 그리고 뛰었다. 다른 이들이 지크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주도는 그리 크지 않아, 스틸월 백작군이 본성 앞에 도착하기까지는 그리 길지 않았다.
‘역시, 여기까지 경비병이 없지는 않군.’
본성 이곳저곳에 횃불이 걸려 있고 순찰을 도는 경비병도 좀 보였다.
물론 아무리 하위 귀족이라도 영지를 가진 귀족의 성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무척이나 적은 수였다. 아마도 적에 대한 방비라기보다는, 영주성을 완전히 비웠을 때 영민들이 성 안의 물품을 도둑질할 가능성에 대비한 것일 것이다.
지크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스틸월 기사와 엘프들로 이루어진 별동대에서, 유난히 튀는 갑옷을 입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벨리 와이그.
카르위먼의 그 성기사는 꽤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크의 말이 맞는다면 이곳이 바로 밸리드의 새로운 북부 지부일 테니, 그에게는 지옥의 구렁텅이와 다를 바 없는 곳이다.
언제든 이 평범한 귀족의 성으로 위장한 지옥에서 튀어나올 악마를 짓이길 수 있도록, 그의 손은 허리에 찬 검 언저리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일단 최대한 들키지 않게 가볼까.’
눈에 보이는 경비 상황을 본다면 정면으로 돌진한다고 해도 손쉽게 승리를 쥐어 잡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상대의 저항을 키울 이유도 없다.
본성의 성벽은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았다. 역시 영주성의 성벽마저 간단히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정예로 이루어진 별동대는 이번 성벽조차 어렵지 않게 뛰어 올랐다. 방해를 해대는 병사들이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랐겠지만, 간신히 구색이나 맞춘 적 경비병들은 그들을 막기는커녕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일단 성벽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린다.’
피네 자작가의 병사들에겐 불행히도 그건 그들에겐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컥!”
“끄르륵!”
제대로 된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병사들은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별동대의 손에 영주성의 성벽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아무리 적 전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아무런 소동도 없이 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역시 무리였던 모양이다.
채앵!
처음으로 공격이 막혔다. 검을 휘두른 스틸월 기사는 제법 당황했다. 설마 정예 기사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가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공격을 받은 대상이 살아남은 건 아니었다. 다른 기사가 뒤이어 그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호를 보내는 것은 막지 못했다.
삐이이이익!
날카로운 신호가 울리다 끊어졌다. 두 번째 기사의 공격으로 적의 숨통이 끊어진 것이다. 그러나 날카롭고 높은 신호는 근처에 충분히 울려 퍼졌다.
‘여기까지군.’
지크는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슬슬 들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병력이 없다 해도 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관리인이나 사용인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만 남아 있었다고 생각했을 시, 들키는 시간이 좀 빠른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을 가져다 붙이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밸리드 놈들.’
땡땡땡땡땡!
비상종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며 조용히 잠들어 있던 성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창 너머로 성 안의 광원이 하나둘 늘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할 거야?”
화살을 메기며 레오나가 지크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긴. 애초에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잖아. 그냥 우리가 계획했던 일을 계속해야지.”
지크는 성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성을 점령한다.”
“알았어.”
레오나는 가장 가까이에서 달려오는 병사를 향해 활을 쏘며 내달렸다.
그녀가 멀어지는 걸 보며 지크는 자신의 검을 고쳐 잡았다. 요 근래에 계속 바뀐 검의 감촉이 낯설다. 지크는 슬쩍 검을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점점 윈두르가 그리워지는군.’
새침데기 같은 성격의 검이었지만 확실히 그 무엇보다도 우수한 검이었다. 하지만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지크는 옆에 선 와이그를 쳐다봤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이곳에서 정말 밸리드 놈들의 흔적이나 그 신도가 발견된다면, 그 즉시 저는 지크 님과 힘을 합할 겁니다.”
자신만 믿으라는 듯 그는 가슴을 퉁퉁 쳤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지크는 몸을 날렸다. 와이그도 그의 옆에 바짝 붙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둠의 안락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성은 기습에 당한 맹수처럼 격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사방에서 고함과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점 본격적인 전투 소리가 섞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군요.”
와이그가 중얼거렸다.
“그 정도의 병력이 빠져나갔으면 이 정도로 버틸 병력이 없을 텐데 말이죠.”
“네,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제가 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면 말이죠.”
병사 몇 명을 베어낸 지크는 그대로 성 안으로 진입하는 문을 걷어찼다.
콰아앙!
성문이 터지며 안쪽이 드러났다. 벽에 걸린 촛불이 기본적인 광원을 형성하고 있다. 문 뒤에는 두 명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도 병사도 아니다. 갑옷을 입고 있지 않다. 물론 갑작스러운 기습에 갑옷조차 제대로 챙겨 입고 오지 못한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기세부터가 달랐다.
문의 파편이 지면에 떨어지기도 전에 문 뒤편에 있던 사람들이 공격해 왔다. 하지만 지크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몸을 틀었다.
후웅!
지크의 심장이 있던 자리로 검이 지나갔다. 소름끼치도록 정확한 급소를 노리는 공격. 하지만 그래 봤자 빗나갔다면 쓸모없는 것이다.
지크가 반격했다.
콰아앙!
지크의 검과 상대의 검이 충돌했다. 아직 떨어지지 않았던 문의 파편이 충격에 휘말려 더욱 멀리 내동댕이쳐졌다.
후웅!
상대는 한 명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 사람이 지크의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 또 다른 사람이 지크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지크는 그 공격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든든하기 짝이 없는 우군이 될 자가 옆에 있었으니까.
꽈아아앙!
지크의 생각처럼 그를 향한 공격은 옆에서 튀어나온 검에 막혔다. 충격으로 인한 굉음이 시끄러워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지크는 옆쪽을 슬쩍 쳐다봤다.
새하얗게 타오르는 것 같은 빛이 감싼 검이 상대의 검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 기운….”
와이그의 입이 열렸다. 언제나 루벨라에게 향하던 인자한 미소와 껄껄거리던 소탈한 미소는 온데간데없다.
“네놈, 밸리드의 주구로구나!”
있는 건 밸리드 도살자, 회귀 전에는 타스니아의 킬링 머신이라고 불렸던 카르위먼의 검뿐이었다.
“베, 벨리 와이그?”
상대도 와이그를 알아봤는지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며 지크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갑자기 벨리 와이그 같은 게 튀어나오면 그야 놀랄 만도 하지.’
게다가 그 벨리 와이그가 적대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와이그의 시선이 자신과 맞서고 있는 상대와 그 검을 훑는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
지금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축축하고 더럽고 음습한 기운은 그에게 카르나의 신성한 성력 다음으로 익숙한 기운이었으니까.
“이 쓰레기들이 감히 개같은 수작을 부려!”
콰아아아앙!
성력이 휘몰아쳤다. 지크는 슬쩍 뒤로 빠졌다. 그리고 그 상태로 와이그의 전투 장면을 지켜봤다. 하얗게 타오르는 검으로 와이그는 두 명의 밸리드 신도를 몰아붙였다.
콰득!
와이그의 검에 신도 한 명의 머리가 무참하게 박살 났다. 와이그가 내뿜는 하얀 성력과 밸리드 신도가 내뿜은 새빨간 선혈이 묘하게 대비되었다.
후웅!
한 명의 밸리드 신도를 잡아먹은 와이그의 검은 바로 옆에 있던 다른 신도에게 향했다. 그는 열심히 와이그의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고작 그의 실력으로는 노도 같은 와이그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그 신도는 이를 악물더니, 곧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벨리 와이그가 왔다! 지금 쳐들어 온 자들을 절대 놓쳐선 안 된다! 한 명도 살려두지…!”
서걱!
와이그의 검이 그의 목을 벴다. 몸에서 떨어졌음에도 그의 입은 계속 뭐라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쿵!
신도의 몸이 쓰러지고 와이그의 움직임도 멈췄다. 방금 전 신도의 목소리가 확실히 전해졌는지 성 안쪽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나 지크는 그에 상관 않고 와이그에게 다가갔다.
“이제 믿으시겠죠?”
“네,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와이그는 성을 올려다봤다.
“이 빌어먹을 곳이 저 더러운 바퀴벌레의 소굴이란 걸요.”
“그럼 앞으로는 힘을 빌려주시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와이그는 성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바퀴벌레 소굴 청소는 제가 전문이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