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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18화 (518/628)

제518화

동이 틀 무렵.

일찌감치 일어난 부관은 지휘관의 천막을 찾았다. 오늘이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야숙을 끝내고 피네 자작령의 본성으로 향할 수 있다.

부관으로서 부하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는 입장상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도 적잖이 이 야숙에 신물이 나 있었다.

‘가능하다면 얼른 돌아가서 따뜻한 음식을 먹고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싶군.’

거기에 집에 두고 온 가족까지 생각이 뻗어가자 부관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쫓아냈다. 지금은 당장 있을 이동에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대장을 뵙고 싶다.”

부관은 지휘관의 막사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응?’

부관은 막사 안으로 자신의 방문을 알리는 기사를 쳐다봤다.

‘뭔가…이상한데…?’

부관은 기사를 살폈다. 딱히 달라진 건 없다. 부관이라는 직책상, 지휘관의 호위 기사인 그들은 눈에 익을 대로 익은 자들이다. 시각적으로 달라진 건 보이지 않았다.

‘…기분 탓인가?’

“들어오셔도 된다 하십니다.”

기사가 말했다. 부관은 다시 한번 기사들을 살폈다. 하지만 아까의 어색함이 마치 신기루인 듯, 기사들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착각이군.’

이게 전부 최근의 패전부터 이어진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부관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대….”

지휘관을 향해 하던 인사 소리가 도중에 끊겼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지휘관과 함께 막사에 있었던 것이다.

‘그렌 제너드?’

저 인간이 꼭두새벽부터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니, 용무야 뻔했다. 그가 줄기차게 하던 요구는 저번 패전 이후 하나뿐이었으니까.

‘또 후퇴하지 않고 별동대를 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끈질기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다. 설마 퇴각을 하는 그날까지 지휘관에게 매달리다니.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대장이 저딴 요구를 받아들일 리가 없지.’

부관은 그렌에게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고 지휘관을 향해 걸어갔다.

“본성으로 향하기 위한 대략적인 준비는 끝났습니다.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만, 언제쯤 이동할지 구체적인 상의를….”

“가지 않는다.”

“…네?”

부관이 되물었다.

“가지 않는다고 했다.”

“어, 어디를 말입니까?”

부관이 꺼냈던 화제를 생각하면, 저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는 명확하다.

하지만 부관은 굳이 되물었다. 그만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지휘관이 다른 주제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자신이 잠시 착각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지휘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빌어먹게도 예상대로였다.

“본성으로 가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적 별동대를 격살한다.”

“부, 불가능합니다! 병력 규모는 엇비슷하다고 해도 질적으로는 상대가 위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패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사기마저 저조합니다! 거기에 물자도 없지 않습니까!”

지금 적을 상대하면 안 되는 이유를 부관이 빠르게 내뱉었다.

“피네 자작가에 사람을 보내 지원을 받는다. 그러면 해결된다.”

“그러면 자작가의 방어가 완전히 무너집니다! 만약 적들이 그때 자작가를 들이친다면…!”

“우리가 적들을 감시하고 있으니 그럴 일은 없다.”

“하지만…!”

“이건 명령이다, 부관.”

부관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자신이 반대를 표해봤자 이 부대에 명령을 내리는 것은 지휘관이다. 그가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의 반대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마치 어제까지 그렌의 발언이 부대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었던 것처럼.

부관이 그렌을 쳐다봤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역시 저 녀석 때문인가.’

지휘관의 마음이 하루 만에 급격하게 변한 이유라고는 그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분명 지휘관의 본성으로의 이동 결심은 굳건했다. 그걸 고작 하룻밤 만에 뒤틀어 버리다니.

그러나 아무리 고민을 해도 이거다 하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남은 건 명령을 따라야 하는 의무뿐.

“…알겠습니다.”

부관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의 끈을 놓은 건 아니었다.

‘피네 자작가에서 거절할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피네 자작가는 연합군의 일원. 그리고 연합군은 동등하다. 거기에 아무리 자작이라지만 이번 전쟁의 명분이 되는 피네 자작은 그 작위보다 훨씬 더 우대를 받고 있었다.

‘다짜고짜 명령으로 마지막 남은 방어 병력을 모조리 동원하라면 반발을 하겠지.’

게다가 연합군의 사령관인 플로드 백작이나 그들의 주인인 피네 자작의 명령도 아니지 않는가.

‘그렇게 된다면 대장님도 어쩔 수 없이 군을 물릴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의 희망은 너무도 헛되게 끝났다.

지휘관이 연락을 보낸 지 얼마 후, 피네 자작가의 병력이 나타났다. 그들의 숫자를 보면 남아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한 것같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부관은 기함했다.

‘제정신이냐!’

연합군 본진에 있는 피네 자작을 대신해서 자작령을 통치하고 있는 대리인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그 대가리를 열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른 기사들도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명령은 명령이다.

그들의 상념이야 어쨌든 조건은 갖춰졌다. 일단 그들은 피네 자작가에서 가져온 음식을 먹었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비상식량을 동료와 함께 깨작깨작 나눠 먹는 것이 끝난 것만으로도 그들의 사기는 어느 정도 올라갔다.

하지만 환경이 대폭적으로 개선된 건 아니었다. 식량이야 어떻게 긁어모았다고 해도 천막과 모포를 그 짧은 시간 내에 모조리 준비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대다수의 기사들은 바닥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저자들, 기색이 뭔가 좀 이상한데….’

원군으로 온 자들에게 부관은 뭔가 찜찜함을 느꼈다. 일반적인 병사들의 느낌과 뭔가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오래가진 않았다. 지금도 숲 경계에 주둔하고 있는 스틸월 백작군과의 전투가 다가온 것이다.

아무리 반대를 한 일이라고 해도 전투를 방기할 수는 없다. 정해진 이상 어떻게든 승리를 짜내야 한다.

그렇게 스틸월 백작군의 별동대와 연한군 추격대의 2차전의 불씨가 지펴졌다.

* * *

그렌은 멀찍이 보이는 스틸월 백작군의 진영을 쳐다보았다. 숲에 반 쯤 걸쳐 있는 것이 무척 기묘한 형태였지만, 아마도 군에 섞인 엘프들의 영향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얼기설기 엮은 목책으로 주변을 둘러 싼 스틸월 백작군의 진영에는 여러 막사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 사이사이를 기사들이 움직였다.

“엘프들이 목격됐다는 보고는 없습니다만, 그들은 아마 숲에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놈들이 따로 행동할 가능성은 어떻지?”

“아무리 엘프가 강하다지만 그들은 소수입니다. 그 정도 숫자로 뭔가 따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군.”

지휘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본격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부대를 두 개로 나눈다. 피네 자작가의 응원군은 크게 돌아 숲에 진입해 스틸월 백작군의 뒤로 이동한다. 우리가 전면에서 적을 공격할 때 적들을 뒤에서 공격한다.”

“숲은 엘프들의 영역입니다! 그들의 수가 아무리 적다지만 숲에서 피네 자작군이 견디기는 힘들 겁니다!”

부관이 반대 의견을 내놨지만 지휘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명령이다!”

“…….”

부관은 지휘관이 무척이나 낯설어 보였다. 갑자기 이동 명령을 뒤집은 것도 그렇고, 이렇게 독선적으로 부대를 이끄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체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렌 제너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걸까.

부관은 그렌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렌의 시선은 스틸월 백작군에만 쏠려 있었다. 그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 * *

지휘관의 명령에 의해 피네 자작군은 스틸월 백작군에게 들키지 않도록 크게 우회해 숲 안으로 진입했다. 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우두머리가 명령을 내렸다.

“거슬리는 건 집어넣어라.”

병사들이 하나같이 창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졌다. 병사 한 명이 마법 상자를 꺼내 그것들을 모조리 챙겼다.

“익숙한 것 들어.”

다시 내려진 명령에 그들은 새로운 무기를 꺼냈다. 검과 지팡이. 누가 봐도 일반적인 병사들은 아니었다.

“자, 설명은 한 번뿐이다. 저놈들이 스틸월 백작가를 공격한 직후, 우리는 그 후방을 급습한다. 엘프 놈들이 반격을 가할 가능성이 높으니 주의해라. 가로막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 우리의 목표는 그것뿐이다.”

그는 부하들을 둘러보며 말을 덧붙였다.

“질문 있나?”

“혹시 저놈들에게 들키면 어떻게 합니까?”

아군을 저놈들이라 지칭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불온해 보였지만, 우두머리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섬뜩한 것이었다.

“죽여.”

“어쩌면 저들 전부에게 들킬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된다면….”

“상관없다.”

그는 편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저놈들도 전부 죽이는 걸로 돼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도저히 연합군과 한편이라고는 볼 수 없는 언동 속에, 피네 자작가는 천천히 숲 깊이 진입해 들어갔다.

* * *

“공격하라!”

지휘관의 명령에 플로드 백작군은 일시에 대지를 박찼다. 말은 대부분 잃은 상태라 하는 수 없이 두 발로 뛰어야 했지만, 기사들이 일제히 돌격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무척이나 가공하고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렌은 그 가장 앞을 달리고 있었다. 그와 스틸월 백작군 사이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고, 적들의 모습이 눈에 가까이 들어 왔다. 번뜩이는 적의 칼과 갑옷이 보였지만 그렌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오직 지크뿐이었다.

‘어디냐!’

적진을 샅샅이 훑었지만 지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몇 놈쯤 죽이다 보면 기어 나오겠지!’

콰아아앙!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목책을 박살 낸 후, 그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적을 향해 달려갔다.

‘죽어!’

후웅!

토르니움이 불길한 검은 마력과 함께 적에게 휘둘러졌다.

서걱!

마치 무른 진흙을 베는 것마냥 단단한 갑옷이 양단됐다. 하지만 정작 적을 벤 그렌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뭐야, 이거.’

사람을 벤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다. 허공으로 흩날리는 피와 살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급히 자신이 베어낸 것을 살폈다.

양단된 갑옷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뭐야….”

그렌은 급히 옆에 있던 다른 갑옷을 베었다. 그것도 텅 비어 있었다. 다른 갑옷을 베었다.

마찬가지였다.

“으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앙!

거대한 검은 마력이 스틸월 진영을 폭격한다. 그 기세가 얼마나 삼엄한지 함성을 울리며 돌진하던 연합군이 일순 멈출 정도였다.

하지만 그렌은 그걸 신경 쓸 수 없었다.

그가 만든 크레이터 안에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나뒹구는 건 갑옷의 잔해뿐.

“이게 뭐야아아아!”

그렌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 시각.

‘잘되고 있으려나?’

지크는 슬쩍 가짜 본진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뭐, 스녹이 잘해주겠지.’

그 정도의 훈련은 시켜놨다. 지금은 그를 믿고 자신이 할 일을 해야 한다.

‘그럼 나도 슬슬 해볼까.’

그의 눈에 연약하게 서 있는 피네 자작령의 성벽이 뚜렷이 들어 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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