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7화
날이 저물었다. 초라한 연합군의 모습을 배려해주기라도 하는 듯 하늘은 달과 별조차 숨긴 채 우중충한 모습만을 내보였다.
연합군 진영의 모습은 말 그대로 처참했다.
근처 나무를 잘라낸 후 윗부분을 날카롭게 만들어 지면에 꽂아 넣은 간이 목책이 듬성듬성하게 주변에 꽂혀 있다.
하지만 구조물이라고 보이는 것은 그것 외에는 그나마 몇 개 정도 쳐있는 천막뿐이었다.
지휘관 등 고위 인물 몇 명이 갖고 있던 마법 상자에 들어 있던 비상물자였다. 이 몇 개의 천막과 약간의 식량이 그들이 갖고 있는 최후의 물자였다.
아무리 마법 상자라도 용량에 한계는 있다. 특히 군대의 보급품을 모두 실어 나르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마법 상자도 아티팩트였기에 너무 많은 수를 보유할 순 없다.
때문에 그들이 가진 물자는 그들 군대의 규모에 비하면 딱 잘라 보잘것없었다.
말 그대로 비상용품인 것이다.
몇 있는 천막은 당연히 고위 인물들에게 배정되었다. 다른 기사들은 천막은커녕 모포조차 제대로 구비 못 한 채, 땅바닥에 누워 고된 몸을 달랬다.
있는 것이라곤 주변에서 그러모은 수풀 정도가 전부. 그것도 그들 인원이 전부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모으지 못해 그저 시늉 정도만 하는 꼴이었다.
당연히 평소 부유한 생활을 해온 기사들에겐 아무리 좋게 말해도 편하다고 말할 수 없는 환경이다. 하지만 누워 있는 기사들은 전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쓰라린 패배를 잊기 위한 도피일까 아니면 곧 있을 전투를 위한 준비일까. 어느 쪽이든 선잠에 들지 않고 단잠에 빠져들었다는 것 정도가 지금 연합군에게 주어진 달콤한 사치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달리 잠에 들지 못한 이도 있었다.
‘어쩌지?’
그렌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끊임없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만약 지금 그가 입 밖으로 그 말들을 내뱉었다면, 백이면 백 그를 미친놈처럼 취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렌은 남의 눈치를 볼 여력조차 없었다.
‘절대로 그냥 둘 수 없어.’
그의 뇌리에 떠오른 이는 당연히 지크였다. 밉살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다. 문득 정말로 눈앞에 있는 것 같아 몇 번이나 검을 뽑을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망상을 계속할 여유조차 없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어째서 알고 있는 거야!’
그가 루벨라와 엘레나, 라라를 동료로 삼으려 한다는 건 혹시나 녀석이 때려 맞춘 것일 수 있다.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상황과 환경이 맞불려 예상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브레이브와 모어의 언급은 다르다.
‘대체 어떻게!’
머리를 쥐어뜯으며 수많은 경우의 수와 변수를 생각했다. 지금껏 지나쳐온 시간선의 기억을 이 잡듯 뒤졌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으로는 도저히 한 가지 생각으로밖에 귀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렌은 그 한 가지 생각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무수한 시간을 살아올 수 있었던 원인인 그것은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어야만 했다. 자신만의 것이어 왔다.
하지만 지금, 그 전제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생각을 부정할 방법을 생각해내고 그 방법이 깨져나가는 걸 얼마나 반복했을까. 그렌은 정말로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이 그 소름 끼치도록 공포스러운 생각이 가장 현실성을 띤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침을 꿀꺽 삼킨다. 머릿속에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조차 무서워, 절로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정말로 녀석이 회귀 전의 정보를 알고 있단 말이야?’
신실한 신도가 신의 부재를 깨닫고 충성스러운 충신이 주군의 배신을 깨달으며 극진한 효자가 부모가 원수임을 깨달아도 지금 자신의 절망과 공포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그렌은 확신했다.
‘그럼 녀석은 대체 어떻게 그 정보를 알고 있지?’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가득한 낭떠러지 위로 나 있는 얇고도 약한 돌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그렌은 한발 한발 생각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누가 알려준 건가? 아니면….’
얼굴을 완전히 뒤덮은 식은땀이 결국 턱선을 지나쳐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지크 놈이 회귀한 건가?’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충격만으로 심장이 저절로 멈추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로지 지크를 따라잡기 위해서 만으로 몇 번의 회귀를 거쳤던가. 결국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일대일로는 성장이 끝난 지크를 어쩌지 못해 파티를 짜야만 했다.
지크를 타락시키는 데는 또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 그렌이 원할 만큼 완벽한 마왕으로 만드는 시행착오도 어마어마했다.
정말로 온갖 수단과 방법에 회귀라는 초월적인 능력을 더 해야 그 인생을 그가 원하던 바로 덧씌울 수 있었던 게 바로 지크인 것이다.
한데 그런 지크가 회귀를 했다고?
‘몇 번째 회귀를 한 거지? 어떻게 회귀를 했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하지만 그렌의 의문은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빙빙 돌 뿐, 명쾌한 해답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만도 없다.
‘지크! 지크를 잡아야 해!’
역시나 가장 좋은 방법은 본인에게 정보를 뜯어내는 방법이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회귀를 아는 지크라는,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에게 좋은 쪽으로 움직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문제는 저 빌어먹을 겁쟁이로군.’
그렌은 연합군의 지휘관을 보며 이를 갈았다.
‘피네 자작령의 본성으로 향하겠다니!’
그러다 지크를 놓치면 어쩌겠다는 건가.
정찰을 꾸준히 하고 있어, 아직 적의 병력이 숲 경계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냈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 그곳에 주둔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혹시라도 스틸월 백작령으로 돌아가 그들의 본대에 합류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잡아야 해!’
스틸월 본대에 합류한다면 지크를 잡는다는 난이도는 더욱 올라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의 군세가 적보다 떨어진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냐!’
그렌은 마음을 굳혔다.
잠시 후, 연합군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은밀한 신호가 조용히 솟구쳤다.
* * *
연합군은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며칠 간의 휴식으로 패배의 충격을 조금이나마 달랬고 흩어졌던 아군도 대충 모을 수 있었다. 조금 더 체류한다면 아군이 더 합류할 테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무엇 때문인지 스틸월 백작군은 숲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연합군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적이 언제 움직일지 모르고 무엇보다 식량이 큰일이었다.
천막도 모포도 없이 땅바닥에서 대충 쓰러져 잠을 청하는 날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곧 피네 자작가의 본성으로 가게 된다면 적어도 이런 거지 같은 생활은 끝날 것이다. 그런 기대를 가지며 기사들은 잠이 들었다.
하지만 지휘관은 아직 깨어 있는지, 그의 천막 안에서는 불빛이 비쳤다.
그런 지휘관의 막사에 접근하는 사람이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제너드경.”
“지휘관님을 뵈러 왔습니다.”
대답을 들은 기사는 흘끗 옆에 있던 동료 기사를 쳐다봤다. 그렌 제너드는 분명 대단한 이였지만, 그들은 지휘관을 옆에서 호위하면서 그렌의 무례하고 막무가내인 행동을 모두 봐왔던 것이다.
그의 방문을 그들의 대장은 절대로 반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렌의 방문조차 알리지 않을 순 없었다.
“대장님! 제너드경이 오셨습니다!”
“….”
과연 지휘관도 그다지 탐탁지 않은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모셔라.”
명백한 축객령.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이자 연합군 무력의 일각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기사들도 지휘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바쁘시답니다. 죄송하지만 나중에 다시 오시길 바랍니다.”
기사가 공손하게 하나 단호하게 말했다. 그렌은 조용히 두 기사를 쳐다봤다. 그들도 지지 않고 그렌의 시선을 마주쳤다.
“…정말로 만나 봬야 하는데….”
“죄송하지만 명령받은 일입니다. 입장은 불가합니다.”
“어쩔 수 없지.”
두 기사는 안도했다. 아무래도 연합군 최강이라 불리는 그렌과 갈등을 빚는 것 자체가 상당한 스트레스였던 것이다. 두 기사는 그가 이대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 둘은 처리하는 게 편했으니.”
순간, 두 기사는 저도 모르게 검에 팔을 뻗었다. 연합군의 정예인 추격대, 그중에서도 지휘관의 호위를 맡을 정도로 실력이 좋은 이들이 그들이다. 심상치 않은 낌새에 머리보다 몸이 움직인 것이다.
하나, 그뿐. 그들이 이 세계에 최강자는 아니고 전능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땅에서 솟아난 걸까. 아니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가. 어느 순간 두 기사의 옆에 서 있던 두 개의 그림자가 기사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신음도 없이 두 기사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하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쓰러지는 그들의 몸을, 언뜻 그림자라고 착각될 정도로 검은 로브를 입고 있는 자들이 받아낸 것이다.
방해꾼이 사라지자 그렌은 천막의 입구를 막은 천을 신경질적으로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분명 바쁘다고 했을 텐데요.”
그렌의 모습을 본 지휘관이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다지 바빠 보이지 않습니다만.”
“겉으로 보이는 게 모두 진실은 아니죠.”
실제로 지금껏 깨어 있을 정도로 지휘관의 일은 많았다. 물론 사람 한 명 만날 시간을 빼는 게 어려울 정도로 바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는 그렌이 호위 기사들을 무시하고 강제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연합군 최강인데다가 아군이기도 한 그렌을 무력으로 잡아둘 순 없을 테니까.
물론 그렇다면 호위 기사들이 새파란 안색을 한 채 따라 들어오는 게 당연할 텐데, 바깥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기색은 없었다. 두 기사의 인기척은 여전히 문밖에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일단 그렌에게 용건을 물었다.
“그래, 무슨 일입니까.”
그렌은 저벅저벅 지휘관에게 다가갔다.
“내일 본성으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틸월 백작군의 별동대를 잡아야 합니다.”
“또 그 소립니까.”
지휘관은 한숨을 한 반 쉬고 그를 무시하듯 고개를 돌렸다.
“허락할 순 없습니다. 우리는 피네 자작가의 본성으로 향할 겁니다.”
“당신의 허락은 필요 없습니다.”
지휘관이 그렌을 쳐다봤다. 그는 그제야 그렌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싸늘하다. 적어도 아무리 기분이 나쁘고 사이가 안 좋다고 해도 아군에게 하는 얼굴이 아니다. 지휘관의 위기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건 이 군대는 별동대를 공격할 거요.”
순간 그렌의 몸이 움직였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가간 그는 지휘관의 목줄기를 쥐어 잡았다. 지휘관은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렌의 손에서 벗어나긴 커녕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경악한 얼굴로 그렌을 내려다보는 지휘관은, 어느샌가 그렌의 등 뒤에 서 있는 검은 로브의 인간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지휘관이 제정신으로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